세월호가 등장하지 않는 세월호 영화

[ACT!] 김응수 감독의 <오, 사랑>, <초현실>

지난 4월 28일에서 30일, 인디스페이스에서 세월호 추모 상영회가 열렸다. <눈꺼풀>, <그날, 바다> <공동의 기억 : 트라우마> 등 최근 작품들을 중심으로 상영이 된 이 상영회에는 김응수 감독의 세월호 영화 두 편 <오, 사랑>, <초현실>도 있었다. 3월 말 온라인과 IPTV로 먼저 공개된 두 작품이 처음으로 극장에서 상영되는 날이었다. <오, 사랑>이 상영 될 때, 관객들의 손은 종종 눈가를 스쳤다. <초현실>이 상영될 때, 객석 어딘가에서 참다못한 오열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초현실>에는 세월호나 세월호 희생자의 모습이 단 한 쇼트도 등장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에 다가갈 수 있는 핵심이 '사랑'이라 말하는 두 영화. 같은 시기, 한 감독의 손끝에서 탄생했으나 한 편의 영화가 될 수 없었던 두 영화. 이 두 영화를 극장에서 마주한 한 관객이 내놓은 글이다.(권은혜 ACT! 편집위원)

앎과 진실

<오, 사랑>과 <초현실>의 상영이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마이크를 쥔 김응수 감독은 우리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은지를 되물었다. 우리에게 앎이 부족한가?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감독의 반문은 관객과의 대화 자리가 작품 자체의 형식적인 면에 관한 이야기 ― 즉, 영화에 관한 이런저런 지식들 ― 로 흐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의사였을 테지만 우리는 그로부터 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앎과 진실은 구별될 수 있다.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는 너무 많은 앎이 외려 우리를 진실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므로 진실을 파헤치겠다고 공언하는 섣부름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응수 감독의 <오, 사랑>과 <초현실>은 이처럼 안다거나 모른다고 말하는 성급한 판단의 틀로부터 거리를 두고 진실에 다가서기 위한 대안적인 실천을 찾을 수 있을지를 신중하게 묻고 있다. 물론 <오, 사랑>의 경우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집요하게 인식하고 그 불가능성과 마주하여 참담한 무력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김응수 감독의 두 영화는 세월호 참사를 다룬 여러 영화들이라는 문맥에 놓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알다시피, 세월호를 다룬 많은 영화들이 공개되었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참사의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다. 혹은 그 진실을 밝혀낼 증거로서 어떤 단초이다. 하지만 그런 천착이란 '진실'이라기보다 '사실'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들 영화들의 개별적인 논증이 참인가 거짓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 부차적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할 수 있는 무엇이나 영화가 해야 하는 무엇인데, 이는 이런저런 증거들을 조합하여 일관된 논증을 구성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즉, 앎과 지식이 아닌 윤리학과 관계한다. 김응수 감독의 두 작품은 영화적인 윤리학에 대한 조심스러운 성찰이라는 점에서 성급하게 알고자 하는 영화들과 다른 출발선에 서 있다.
▲ <오, 사랑>(김응수, 2018)

<오, 사랑>은 어느 아버지 J와 아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음악가를 꿈꾸는 아들은 피아노를 사길 바라지만 집에 그럴 여력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에 관해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는다. 반면, 아버지는 아들의 그런 심중을 마찬가지로 알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김응수 감독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이어지고, 영화는 앎의 무력함에 관한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렇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겠죠. 아빠가 피아노를 사줄 형편이 안 된다는 걸 저는 알아요…저도 이렇게 말합니다. 싫더라도 열심히 해. 다 해줄게. 우리는 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해야만 사는 것이 지속되지요. 그러나 언젠가는 진실의 불편함과 마주해야 하지요.'

다시 말해, <오, 사랑>은 하나의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어떠한 증거, 사실, 그리고 그를 통한 논증도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세월호 참사의 진실에는 무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앎의 무력함에 관한 집요한 응시야말로 진실과 마주하려는 조심스런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협소한 의미에서의 이른바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구분선이 모호해지는 것은 김응수 감독 영화들의 지속되는 특징인데, 이는 이런저런 앎이 전제하는 참과 거짓의 문제와는 무관한 진실과 마주하려는 감독의 의지와 관계가 있다.

사랑의 윤리학

앞서 두 영화가 세월호를 '다룬'다고 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들은 세월호를 '다룰 수 없음'을 인식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새삼스럽지만,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 시의 불가능성을 말했다. 그러한 전제에서 클로드 란츠만은 <쇼아>(1985)에서 재현 불가능성의 재현이라는 영화적인 과업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었다. 환상화, 허구화하지 않기. 생존자의 인터뷰에 의존하기. 과거를 회상하는 그들의 목소리, 표정, 제스처로부터 과거를 떠올리기.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학살의 장소를 찾아 화면을 왜곡시켜 보여주기. 관건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간격을 인식하는 것이었고, 부적절한 환상화의 길을 피하면서 현재에서의 사적 기억들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역사'를 환기하는 것이었다. 이는 홀로코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식의 역사수정주의의 위험한 주장에 대한 대응이었다.

김응수 감독은 이미 <과거는 낯선 나라다>(2007)에서 <쇼아>의 태도를 일부 받아들인 바가 있다. 1986년 전방입소 반대 투쟁 중 분신한 김세진, 이재호 열사에 관해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인터뷰하며 감독은 필연적으로 '낯선' 나라일 수밖에 없는 과거를 탐사한다. 그러나 감독 자신이 인터뷰이로 등장하면서 사적 기억을 통한 역사의 환기라는 것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영화는 <쇼아>의 방식과는 갈라선다. <오, 사랑>과 <초현실>은 어떠한가? 앞서 다룰 수 없음이라 표현한 그 무기력함에 대한 집요한 인식은 같지만 ― 팽목항으로 향하는 길을 버스의 앞좌석에서 촬영한 쇼트들은 '트래킹은 모럴의 문제다'라는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 두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쇼아>와는 다른 길에 들어선다.

'사랑'과 '사랑의 말들' 사이에는 좁히지 못할 간극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다. 이런저런 사랑의 말들이 가리키고자 하는 것과 그 말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재현과 재현되는 것 사이의 틈이기도 하고,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간극, 틈, 거리, 불일치를 메우기 위해 우리는 상상과 환상을 동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 사랑>에서 J의 시점으로 들려오는 김응수 감독의 내레이션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이 잊히나요. 잊을 수 있다는 환상을 사랑하는 거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쇼트들에서 우리는 나무에 메인 노란 리본들을 다소 왜곡시켜 비추는 거울들 - '기억의 벽'이라고 쓰인 - 을 보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그토록 잊을 수 없었던 사랑의 대상은 희미해지고 그 자리에 자기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랑은 결국 타인 속의 자기를 사랑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니래요.'

이처럼 <오, 사랑>은 사랑과 사랑의 말들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우리의 자기애적 환상을 응시하고 있다(영화가 포착하는 흔들리는 구름, 바람소리, 파도의 일렁임 등은 진실을 증언하고 있지만 우리에겐 그를 독해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가 사랑을 가리키기 위해서 달리 다른 말을 사용할 수도 없음을 역설한다. '이 곤궁함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타인은 아무리 밀착해도 멀거나 지나치는 것인가요? 이 남자와 나는 어깨를 마주대고 앉아 있어요. 어떻게 포옹이 가능한가요?' 반복되는 내레이션과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설치물을 들여다보며 서성거리는 사람들의 쇼트들이 몽타주 될 때에 우리는 '나'와 '타인'을 끝없이 미끄러지게 만드는 모순적인 간격으로 끌려들어간다. 롱쇼트로 촬영된 방파제에서 진행되는 추모 행사 - 그리고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사랑의 말들까지 - 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 그곳을 흐르는 바다의 무한함과 일치하는 간격. 어떻게 우리가 '자신'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라는 구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물론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말하기. 하지만 이는 사랑의 말들이 지니는 공백을 응시하는 집요함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찾아오는 어떤 마주침을 받아들일 때에 가능하다. '계시'의 충실한 수신자가 되어야 한다. J가 노란 카네이션을 단 채로 버스 옆 좌석에 앉은 누군가로부터 어떤 신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그래야만 J가 아들과 '기억의 벽'을 찾을 때의 그의 내레이션이 말하듯이 '환상을 횡단'하여 나아갈 수 있다. 이는 김응수의 두 작품이 제시하는 사랑의 윤리학이다. 공백을 응시하며 다시 한 번 사랑을 말하기. 그럼으로써 환상을 횡단하여 나아가기. <초현실>은 그처럼 공백에 눈을 거두지 않은 채로 환상을 가로질러 다시 한 번 사랑을 말하고자 하는 영화이다.
▲ <초현실>(김응수, 2018)​​​

신호들을 수신하기

아들의 대학 MT에 따라나선 아버지가 다른 수많은 학생들과 함께 강당에 앉아 사랑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초현실>의 카메라는 강의가 진행되는 내내 말없이 강의를 지켜보는 김광배 씨의 모습을 담는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인 건호는 우석대학교 상담심리학과에 입학했고, 아버지인 김광배 씨가 부재하는 아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영화는 김응수 감독이 직접 쓴 에세이를 김광배 씨의 모습을 담은 쇼트들의 자막으로 덧입히고 있다. 내레이션은 사용되지 않는다. 쓰여진 말인 자막은 자연스레 김광배 씨의 심중을 나타내는 요소로서 기능하고, 김광배 씨의 이미지는 정말로 그런 그의 내면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만 같다. 부재하는 존재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침묵이 마치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는 없음으로부터 있음을 끌어내고자 한다.

우선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마치 이미지에 대한 설명적인 힘을 지니는 것처럼 부과된 자막이란 타인의 이미지를 환상화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닌가? 아니라면, 앞서 말한 환상을 횡단하는 사랑의 윤리학은 <초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 물론 <초현실>의 에세이는 건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말들이라는 점이 주목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초현실>의 이른바 '환상화'라는 것은 김응수 감독 자신을 매개로 하여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들어서게 된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감독 자신이라는 항의 도입에 의해 영화의 말 걸기 구조가 복잡해진다는 점은 <과거는 낯선 나라다>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초현실>의 상황은 이미 현실을 초과해 있는 면이 있다. 첫째로 부재하는 아들 건우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MT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로 자막이 전하는 사랑의 말들은 죽은 아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버지라기보다 성인이 되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아들에게 애정 어린 책망의 말들을 전하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그렇다. 말하자면 <초현실>이 어떤 환상화의 길을 따른다면 이는 '현실-환상'이라는 짝이 아니라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초)현실-환상'이라는 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초현실>의 에세이는 이미 한 차례 굴절된 현실을 다시 환상화하고 있다. 따라서 <초현실>은 현실과 그에 대한 환상화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파악될 수 없다. 더불어 김응수 감독 자신은 여기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는다. 즉, 신호들의 수신자가 된다.

김응수 감독은 OKULO(오큘로)와의 인터뷰(링크)에서 자신이 <오, 사랑>과 <초현실>을 찍게 된 계기를 밝히고 있다. 그는 정의감이 넘쳐서 했던 영화는 아니라고 말하며 <옥주기행>(2016)의 촬영 중에 진도에서 팽목항을 안 볼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팽목항에서 배를 타고 다른 섬으로 가는 숏에 팽목항의 전경이 보입니다. 멀리 노란색 깃발들이 보여요. 물론 가능한 안 나오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죠. 너무 큰 주제라 뚜렷이 나오는 순간 영화 전체를 잡아먹을 것 같았어요. 회피하려 했던 게 아니라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 주제였어요…그러나 시간이 주어질 때 팽목항의 스산한 풍경을 따로 찍어두었죠. 그냥 그런 게 쌓이고 쌓여서 나 몰래 영화가 된 것이 <오, 사랑>입니다. 그 영화를 찍다가 우연히 만난 풍경이 건우의 MT 장면이었고, 그게 영화 <초현실>이 되었어요."

마치 <오, 사랑>의 J처럼 김응수 감독은 주변 신호들의 충실한 수신자로서 두 영화의 촬영에 임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초현실>의 형식적 구조와도 상응하는 것이다. 김광배 씨의 이미지로부터 김응수 감독은 신호들을 수신하여 기록하듯 자막을 덧입힌다. 침묵하는 이미지를 바라보며 김응수 감독은 환상을 가로지른다. 감독에 의해 쓰인 에세이뿐만 아니라 <초현실>은 그 자체로서 다시 한 번 발화된 사랑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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