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이 놓이자 저울이 기울었다

[양지훈 변호사의 법과 책] <기울어진 저울>

"존경하는 우리 법원의 형사단독판사님께. 법원장입니다. 휴가는 잘 다녀오셨나요. () 정치적인 냄새가 나는 사건에서, 순수한 사람은 담당 판사밖에 없습니다. 피고인과 시민단체, 정부와 정치권, 언론 등 모든 부문이 재판의 결론은 물론 진행 과정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할 태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법원의 권위가 어떻고 해봐야 귀나 기울이겠습니까. 답답한 심정에서 조금 무리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법원장 드림." (밑줄 강조는 필자)

2008년 8월 14일 당시 신영철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 '무제'라는 제목 아래, '정치적 사건에 대해 보편적 결론을 도출해 달라'는 취지로 담당 판사들에게 보낸 메일이다(<기울어진 저울 : 대법원 개혁과 좌절의 역사> 202~203쪽. (이춘재, 김남일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법원장이 위 메일을 보낸 2008년 8월은, 이명박 정부 출범 첫 해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문제로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 인파의 촛불집회가 벌어졌던 시기다. 이후 집회의 열기가 수그러들 즈음, 수사기관은 기다렸다는 듯 주요 집회 참가자들을 상대로 교통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를 남발하였고, 그에 따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도 관련 형사 사건들이 다수 쌓여가던 때이기도 했다(☞관련 기사 : 광화문 촛불에서 MB의 그림자를 보다).

대법관 승진을 위한 서울중앙지법원장의 재판 개입


▲<기울어진 저울>. ⓒ한겨레출판
신 법원장으로서는 사건이 가장 많이 배당된 서울중앙지법에서 '엉뚱한' 판결이 나와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새 정권 출범 후 권력 핵심에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책의 저자들은 촛불집회 참가자들 사건을 일부 보수 성향의 재판부에 몰아주어 그들에게 유죄가 선고되도록 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법원장의 의도가 있었다고 추측한다(<기울어진 저울> 196쪽).

'이대로 무사히 고비를 넘기면 대법원 입성에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는 법원장은 그 후 어떻게 되었나? 그의 바람대로 신 법원장은 이듬해 1월 이용훈 대법원장에 의해 대법관에 임명 제청되었다. 대법관으로의 '승진'을 그렇게 갈망했던 그의 뜻을 드디어 이룬 것이다.

대법원은 제청 즈음 친절하게도 보도자료를 통해 천거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신영철 피제청자는 법조계 내에서 법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겸비한 법관의 전형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재판의 독립에 대한 강한 신념과 따뜻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재판과 행정업무를 처리함으로써 주위의 신망이 두텁다."

아이러니하다.

2018년 5월, 10년 전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장에 의해 촉발된 '재판 개입 이메일 스캔들'은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어떤 것으로, 이제는 더 많은 수의 엘리트 법관들이 개입한 사법 스캔들로 재등장했다.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지난 주말 발표한 조사보고서의 내용은, 법원을 신뢰하던 자의 바람을 무참하게 무너뜨리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조사보고서의 내용을 보도하는 언론을 보면서 정말이지 참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법률 해석에 관한 최후 심판자인 대법원이, 법치주의의 수호자인 그 법관들이 어떻게 이렇게 타락할 수 있단 말인가.

조사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법원의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법원행정처 소속 법관들 일부가 지난 정권에서 재판을 행정권력과 거래의 대상으로 보았고, 실제 뒷거래를 시도하려 했던 정황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법원행정처 사법 스캔들에 대한 하나의 해석


사건의 추이를 보건대, 박근혜 정권 아래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벌였던 희대의 재판 거래 스캔들은 법원 아닌 외부의 수사기관에 의해 관련자들이 조사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온갖 논평과 주장이 난무하는 와중에, 사법부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과 관련한 말들을 보태어 무엇 하겠는가.

다만, 변호사로서 이 사건을 잠시 떨어져 바라보면 대법원이 그렇게 원했던 '상고법원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졌나'라는 의문에 빠지게 된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대법원이 2015년경 상고법원을 중점 입법 과제로 추진하고 있을 당시, 변호사단체나 시민단체 등 주변 이해관계자들은 상고법원 도입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기존 대법관 증원을 더 선호하고 있었다. 결국, 2016년 5월 19대 국회의 마지막 회기가 끝나자 상고법원 법안은 자동 폐기되었고, 엘리트 법관들의 기대도 좌절되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폐기될 법률이었는데, 법관들이 왜 그렇게 상고법원을 추진했을까?

대법원 혹은 법원행정처와 그 구성원 법관들은 각각의 입장에서 상고법원에 자기 욕망을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상고법원은 조직적 차원에서, 그리고 법관 개인적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먼저, 조직적으로 대법원은, 상고법원이 도입됨으로써 최고법원으로서의 지위를 더 확고히 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우리 헌법은 '최고 법원'으로서의 법원을, 법률을 해석·적용하는 대법원과 헌법을 해석하는 헌법재판소로 이원화하고 있는데, 1987년 헌법 개정 이후 헌법재판소가 날이 갈수록 그 위상과 정책 기능을 제고하였으나, 대법원은 상대적으로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권리구제와 관련한 '작은 재판'을 담당하며 외관상 왜소해진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당장 두 번에 걸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이나 행정수도 이전 법률 위헌사건에서 주인공은 헌재였다).

대법관마다 매년 3000~4000 건을 심리해야 하는 업무 부담을 완화하고 헌법재판소처럼 '빛나 보이는' 사건 만을 담당하고 싶은 조직적 욕심이 대법원에는 분명히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대법관 수를 증원시키는 방안에 대해서는 전원합의체의 구성과 심리가 어렵다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웠으나, 실상 대법관을 증원시키면 대법원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다시 말해 상고법원은 대법원의 조직적 권위를 높이 세우는 일환으로 추진되었고, 조직의 승진을 위한 욕망이 진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상고법원의 또 다른 한 가지 의미는 바로 엘리트 법관들의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한다. 이미 고등법원 부장판사 자리는 늘리기 어렵고 점점 더 많은 승진 후보자들이 발생하는 가운데 한정된 자리를 두고 법관들 사이의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예컨대, 법원에는 과거 동기 중 4:1의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비율이, 10:1로 악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고등법원 위에 상고법원에서 재판을 담당할 '상고법원 법관' 승진 자리를 입법을 통해 대거 생산해낸다면, 치열한 승진 경쟁을 획기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법원행정처 사법 스캔들이 대법원의 정책 법원으로의 격상이라는 조직적 욕망과 함께, 이것을 추진하는 법원행정처 엘리트 법관들의 개인적 승진에 대한 집합적 의지가 동시에 작동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이유이다.

실제 특별조사단의 이번 3차 보고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하위 문서들의 존재는, 법원행정처 소속 '부하' 법관들이 단순히 대법원장 또는 행정처장 등의 지시에 단순히 순응하기보다 적극적이거나 자발적으로 직접 업무 수행에 나섰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같은 차원에서, 비단 법원행정처에 속하지 않더라도 법원 내 어떤 법관들은 조직적, 개인적 열망의 발현으로 상고법원의 도입에 적극 찬성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물론, 재판 거래의 형태를 알게 되면 이것을 지지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현 시점에서 밝혀진 사실은, 많은 잠재적인 '신영철 법원장'들이 저 엘리트 법관의 요람 법원행정처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 법관 승진제도를 없애자


결국, '승진'이 문제다. 시민들은 어려운 시험에 통과하여 헌법과 법률로 지위를 보장받는 법관들이 그렇게 승진에 목매는 현상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법원 역시 우리 사회 안에서 구성된 것이고, 인정 투쟁과 위계 서열이 강조되는 한국적 조직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희대의 스캔들로 기록될 이번 사건에 대해, 사법행정권 남용을 방지할 대책을 세우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나아가, 보다 근본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법관의 승진 욕구와 동기를 어떻게 제어하고 법원 조직을 디자인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봐야 할 것이다.

특히, 대내외적으로 신영철 대법관이나 양승태 대법원장이 똑같이 사법부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을 외쳤다는 의아한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그들은 법원 조직에 유리한 경우, 자신의 승진에 도움 되는 경우에 한하여 사법과 재판의 독립을 외쳤다.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하는 재판이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번 법원행정처의 법관들 역시 재판을 거래의 수단으로 보는 점에서 그 관점이 동일하다고 평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엘리트로 불리던 법관들의 재판에 대한 일관된 태도는, 법원 내부의 승진 시스템이 훌륭한 법관을 선발하는 장치로서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멀리 대법원까지 갈 필요 없이 현실의 법관들이 '마지막 승진' 자리로 여기는 고등법원 부장 판사 승진 제도를 없애는 것은 어떤가. 지방법원 부장판사 직에서 승진하여 가는 그 차관급 '고등 부장' 자리를 없앤다는 것이다. 1심 법관은 고등 부장들의 빨간 펜이 무서워 소신껏 재판하지 못하고, 좋은 인사 평정을 받기 위해 공적·사적으로 그들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지금 법원의 현실 아닌가. 그렇게 순치된 법관들만이 20여 년의 세월을 견뎌 고등 부장 자리를 꿰차고 법원장 보직과 대법관 자리를 위해 다시 승진 경쟁을 펼치는 것이 법원의 풍경이라면, 이것부터 바꿔보는 것은 어떤가.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관 인사의 핵심 문제로 계속 지적돼 온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를 폐지할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그 방향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며, 대법원장의 후속 조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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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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