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운전석'은 없다...'공동 운전석'이다

[이충렬의 정권+교체] 벽에 부딪힌 '중재 외교'

1. 벽에 부딪힌 '중재외교'

대한민국의 중재외교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까이고 무시당했다.

북·미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취소된 근본이유는 비핵화와 체제보장이라는 빅딜에 양국이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주선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대한민국은 공개적으로 '중재인'으로서의 역할을 부정당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향후의 상황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왜 이런 사태가 생겼는지 그 원인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판문점 선언이 나왔을 때 남한의 주가는 상종가를 쳤다. 주변 4강대국이 남한의 일거수 일투족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문대통령이 보낸 특사단에 트럼프 대통령이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극적인 방식으로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담을 수락하는 순간 대한민국의 중재외교는 절정에 도달했다.

전세계가 깜짝 놀랐고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환호했다. 냉전보수적 분위기가 강한 남한에서 87%로 대통령의 지지도가 치솟기도 했다. 불과 한달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되었기에 한 달만에 이런 위상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2. 북한은 왜?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국정원과 통전부 사이의 최고위급 채널이 작동하고 있다고 알려져있다. 그런데 5월 16일 오전 1시 북한은 돌연 남북고위급회담의 연기를 공개적으로 알려왔다. 회담 시작 불과 10시간을 앞두고서였다.

북한은 두가지 이유를 들었다. 맥스선더 훈련에 통상적인 수준을 벗어난 전략자산이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F-22렙터기 8대와 B52 폭격기가 참가할 것으로 보도된 상태였다. 그리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폄하한 태영호 망명자의 발언을 문제삼았다.

남북관계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외부인도 비로소 눈치챘다. 그리고 북한은 이어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장면을 취재할 방북취재단에 대해 '잘못을 저지른 남한을 혼내는'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었다. 정상적인 입국절차를 거부하고 폐기 전날 남한 당국의 직항기를 통해 '뒷구멍'으로 현장에 들여보내 주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밑에 사람들이 기고만장하면 언제라도 나에게 이야기하면 된다'고 하면서 설치된 정상간의 핫라인은 시험통화하는 모습은 보았지만 실제 통화는 이제나 저제나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번 사태에 한정해 볼 때 남한은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다고 본다. 판문점선언에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적대행위를 일체 중지하기로 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또한 상호체제에 대한 인정과 존중은 재론할 필요가 없는 기본 정신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예년 수준을 뛰어넘는 한미연합훈련을 남한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수용하였고, 태영호는 국회라는 공식장소에서 김정은위원장과 북한체제에 저주와 인신공격에 가까운 맹공을 퍼부었다. 태영호가 국정원의 관리 대상이라는 점이 북한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판문점선언이라는 역사적 전환점(터닝포인트)을 직접 만들어낸 사람들이 그 이후 달라진 상황에 걸맞는 상황관리를 하지 못하고 왜 북한에 빌미를 제공했을까?

3. 미국은 왜?

5월 22일 문재인 대통령 일행은 1박4일이라는 초강행군을 마다않고 워싱턴을 방문하였다. 목적은 오로지 위태위태한 싱가포르 회담을 열리게 하는 것이었다.

방문 결과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최상의 칭찬을 들었다. 그리고 싱가포르회담은 99.9% 열린다고 참모진이 장담하였다.

그런데 웬걸. 이틀이 지나지 않아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적개심과 분노를 이유로 취소를 발표했다. 물론 북미가 전면 군사대결로 곧장 치닫을 가능성은 적다. 오히려 막판 밀당일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과정에서 초기에 위력을 발휘한 한국의 중재외교가 사라진 것이다. 아니 노골적으로 무시당했다.

방미 직전 참모들은 '이번 방미의 핵심은 문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배석자없는 30분의 단독회담'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싱가포르 회담을 성공시킬 관건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뉘앙스였다.

하지만 당일 분위기는 참담했다. 단독회담에 들어가기 전 의례적인 모두발언이 기자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리고 곧 비공개회담에 들어가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되었다. 기자들의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답변하면서 기자회견장으로 바뀌었다. 무려 30분이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나중에는 한국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답변을 트럼프 대통령이 통역할 필요가 없다고 자르는 장면까지 나왔다. 그리고 어느듯 예정된 단독회담시간이 끝나는 시간이 되자 쫒기듯이 메인메뉴인 단독회담이 21분간 진행되었다 한다.

21분이라니, 통역을 감안하면 실회담 시간은 10분이었을 것이고, 한 사람이 5분정도 말했다는 뜻 아닌가. 그 정도 짧은 시간에 어떻게 북미정상회담의 핵심 이슈를 조율할 수 있었을까?

엄청난 외교적 결례이고 무례이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냉정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한국측에서 정상회담의 백미로 보았던 '배석자 없는 단독 회담'을 트럼프 대통령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장면을 이용해 김정은 위원장에게 직접 텔레비전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한국에는 '더 이상 중재자 역할 안해도 된다. 북한과 직접 소통하겠다'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했다.

북한과 남한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이라는 대승적 목표에 동의하고 긴밀하게 소통할 때 한국의 중재외교는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과 삐걱거리면 미국이 남한을 중재자로 삼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남북정상이 핫라인으로라도 통화해서 절충안에 합의해 가지고 미국에 갔다면 말이 되었을 것이다.

판문점 선언이후 한반도는 남북한의 '공동운전 시대'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남한이 단독으로 '운전석'을 독점해서 밀고나갈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라는 점을 미국과 북한이 맛보기로 보여주었다.

4. 전략과 팀웍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문대통령의 언급대로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은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 이 목표를 앞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의 문제도 살펴볼 필요도 있다.

작년 5월 인수위 없이 정부출범할 때 이 정도의 혁명적 상황변화를 염두에 두고 외교안보팀을 짠 것은 아니었다. 인선 시 가장 크게 신경 쓴 것은 남북정상회담을 가능케 할 팀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국정원장과 통일부 장관이 그런 케이스였을 것이다. 그리고 보수층 무마, 또는 여성 배려 등의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1년간 모두의 예측을 훨씬 뛰어넘는 정세변화가 발생했다. 국내적인 촛불혁명 못지않게 외치에서도 혁명적 변화가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셈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팀에 '김대중정부의 임동원 장관'이나 '닉슨 행정부의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같은 총괄리더십이 안 보인다는 말을 하는 전문가가 있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에서는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목표에 집중했기 때문에 국정원과 통일부 차원에서 대응이 가능했다.

그러나 비핵화와 평화체제 전환은 국정원과 통일부의 실무적 능력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즉 외교안보 전략에 대한 총체적인 안목과 집행능력을 갖추고 이를 뒷받침할 팀워크가 필요하다.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의 취소라는 돌발악재를 만나, 다시 한번 우리 내부의 시스템과 역량을 점검하고 전략과 집행력을 다듬어야 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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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렬

『박정희 김대중 김일성의 한반도 삼국지』(2015년, 레디앙) 저자. 1957년 출생. 유신시절 민주주의 운동에 평생 헌신할 것을 맹세, 민주화운동·노동운동·정당활동에 참여하고, 김대중·노무현정부에서 미관말직을 지냈다. 2012년 대선이후 당대에 대한 기대를 접고 강화도에 귀촌, 언젠가 이 땅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역사가 꽃피는 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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