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날짜와 장소까지 잡힌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이 불안정한 상태를 노출하고 있다. 남북 고위급 회담이 북한의 대미(對美) 비난과 대남(對南) 불만 표명으로 취소되고, 북한과 미국 간의 회담도 불투명해질 우려가 생겼다. 원인은 단연코 미국의 대북 적대적 군사행동에 있다.
군사력 위주의 압박정책을 앞세우는 네오콘 세력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일방적 무장해제 모델인 리비아를 거론하면서 대북 압박을 연일 극대화하고 있다. 대북 대화 창구 확보에 노력해온 마이크 폼페오 국무장관과는 전혀 다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척하면서 같은 시나리오를 짜고 움직이는 이른바 '악당 경찰(bad cop)'과 '착한 경찰(good cop)' 역할을 분담하고 있는 형국이다.
'리비아 모델' 발언이 문제가 되자 백악관은 '트럼프 모델'을 내세워 시급히 진화했으나, 여전히 그에 따른 발언과 행동은 없다. 그런데다 평상시보다 공세적 강도를 높인 한미군사합동훈련 '맥스선더(Max Thunder)'는 4.27 남북 정상회담의 성과를 정면으로 위협하고 있다.
판문점 선언, 누가 어긴 것일까?
미국의 대북 군사 압박 전략을 막지 못하고 도리어 합동훈련이라는 방식으로 합력한 한국 정부의 책임도 논란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남북 정상 간 서로 합의한 약속을 어긴 것이다. 이제 막 실무 합의를 하기로 한 순간에,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일체의 적대 행위를 하지 않기로 한 지난 4.27 판문점 선언의 기본 정신과 실천 의지가 중대 기로에 처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호랑이가 산골을 넘던 엄마에게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고 해놓고는 결국 다 뺏고 벗겨서 죽여 버린 우리의 민담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통일부는 북한의 남북 고위급 회담 취소 통보에 대해 "4월 27일 양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 선언'의 근본 정신과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유감"이라고 밝혔다. 이게 맞는 이야기인가.
압박하면 손든다?
<뉴욕타임스>는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북한의 발표를 '위협(threat)'이라고 표현하면서 회담을 제안한 것은 북한이기 때문에 백악관 측은 성사되지 못해도 아쉬울 것 없다고 보도했다. 만일 그렇게 될 경우, 미국은 북한에 대해 "극대화된 압박(maximum pressure)"을 계속 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되면, 오는 23~25일로 예정된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공개 폐기도 불확실해질 수 있다. 또한 폐기한다고 해도 그 의미가 왜소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미 미국 중앙정보국(CIA) 등은 북한이 핵실험장 폐기 이후에도 언제든 핵실험 능력을 복구할 수 있다며 북의 핵실험장 폐기 결정에 대한 의미를 깎아내리고 있다. 회담 일정이 다가올수록 대북 압박 강도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점을 예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남북 정상회담에 앞서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 일부를 다시 주목해본다.(☞ 관련 기사)
"비핵화 논의는 북한의 전면적 무장해제를 의미하지 않으며, 미국의 군사적 압박의 존속과 유지를 뜻하지도 않는다. (중략) 미국이 평화협정에 적극성을 보이지도 않고 관계 정상화의 비전은 내놓지 않은 채 북한의 무장해제를 일방적으로 도모하거나, 핵 선제공격 전략을 계속 유지할 자세를 취한 채 협상에 임한다면 결과는 더 엄중해질 것이다. (중략) 북의 비핵화 못지않게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의 전면 철폐가 핵심이 된다."(4월 25일 자 <한겨레> '[왜냐면] 남북이 함께 북-미 관계 정상화의 다리를 만들자' 중)
미국은 지금 이러한 우려대로 행동하고 있는 중이다.
전쟁국가 미국의 본질은 '팍스 로마나'
미국이 쿠바와 필리핀을 무력 정복한 1898년 이래 제국주의 정책을 접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미국의 대외정책사 분야 권위자인 로이드 가드너(Lloyd Gardner)는 그의 책 <제국 아메리카(Imperial America)>에서 이러한 역사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주의 체제를 집중 해부한 리처드 바넷(Richard Barnet) 역시도 <전쟁의 뿌리(Roots of War)>를 통해 미국 정부의 무력을 통한 제국 확장 전략을 파헤친 바 있다. 사실 전쟁국가로서의 미국의 본질은 미국 연구를 해온 이들에게는 하나의 상식이다.
이 같은 미국을 상대로 '평화 외교'를 시도한다는 것은 절대 간단치 않다. 평화는 이들에게 상대를 굴복시키고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를 확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로마의 평화, 즉 '팍스 로마나(Pas Romana)'이다. 아니면, 평화는 이들에게 전쟁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안보국가-대기업 동맹체제(National Security State Corporate Complex)'에 대한 위협을 뜻한다. 폴 니츠가 1950년에 작성한 냉전 전략 지침서인 국가안보문건 'NSC-68'도 이런 동맹체제의 소산이었다. 따라서 상대를 완전 무장 해제시키고 이를 통해 국가 해체에 이르는 길을 확보할 수 있다면, 미국은 그걸 선택할 가능성이 언제나 높다. 이것이 약소국에 대한 제국의 외교 정책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마이클 패런티(Michael Parneti)는 책 <국가살해(To Kill a Nation)>를 통해 민간인 학살은 물론이고 정치와 경제 체제를 모조리 미국의 요구에 맞게 해체해버린 1992년 보스니아 전쟁 과정을 고발하고 있다. 이후 이라크, 리비아에 이 방식이 그대로 이어진 것은 물론이다. 국제문제 탐사보도에 뛰어난 역량을 보이는 언론인 윌리엄 블럼(William Blum)이나 존 필저(John Pilger) 등이 명확히 규정했듯이 '불량 국가(rogue state)'는 다름 아닌 미국이다. 평화를 파괴하는 최강의 군사력을 영원히 독점하려는 나라 미국은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국가폭력을 옹호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다.
북한에 대한 일방적 무장해제, 항복 문서 조인인가?
미국은 북한을 일방적으로 무장 해제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밀어붙이거나 아니면 회담이 불가능하다는 구실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럽다. 아니라면 평화 협정과 외교 관계 수립을 통해 상호 군사적 적대 체제를 완전하게 청산하는 구상을 내놓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비핵화의 대가를 민간 투자 허용이라는 방식의, 자신들을 위한 시장 확보 전략을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외교 관계의 정상화는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항복 문서에 조인하면 이후 필요한 조처를 취해주겠다는 식이다. 어떤 주권 국가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를 풀기 위한 수단이 매우 제한적인 문재인 정부는 입장이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판문점 선언을 명분으로 한미군사합동훈련 맥스선더 실시를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 이후에 검토하겠다거나 전략 자산 무기까지 포함된 방식은 피했어야 한다. 북한의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한 상황을 자초한 셈이다. 잘 나가던 흐름에 뼈아픈 일격이다. 그러니 대세에 지장이 없다는 식으로 넘어갈 것이 아니라, 깊이 짚고 돌아봐야 한다.
맥스선더가 '연례적이고 방어적'이라는 해명했지만, 상대가 북한이라는 한미동맹의 기본을 주목하면 이런 자세는 설득력이 없다. 적대 행위 개념에 기초한 군사훈련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의 적대 행위 중지가 답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단호하게 판문점 선언의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줄수록 양양이라고 바로 이때다'라며 냅다 덤벼들어 상대를 무릎 꿇게 하려는 제국의 전략은 위험천만하다. 일체의 적대 행위를 중지하기로 했으면 중지해야 한다.
"남과 북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하였다."
판문점 선언 2항의 1번 조항이다. 빼도 박도 못 하게 명확한 내용이자 문장이다.
한미합동군사훈련은 우리가 할 이유가 없다고 하면 못하는 것이다. 동맹의 한 축이 수락하지 않는 합동훈련은 없다. 이를 실행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주권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북한의 비핵화 조처에 병렬적으로 배치되는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의 종료, 거기서 해답을 찾으면 된다.
적대 관계 소멸이 아닌 평화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미국이 북한 해체 전략을 시도하는 순간, 우리에게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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