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조미 대결의 승리"는 북한이 미국과 전쟁을 해서 승리하거나 주한미군을 몰아내고 한반도를 공산화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65년째 이어져오고 있는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70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북미 간의 완전한 정치적·경제적 관계의 정상화를 의미한다. 관건은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및 북미 수교 사이의 '선순환적 케미'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있다.
그런데 판문점 선언에는 '신의 한 수'가 등장했고 "디테일 속의 악마들"을 물리칠 수 있는 '천사들'이 담겼다.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신의 한 수'는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합의한 부분을 가리킨다.
이게 '신의 한 수'인 까닭은 이렇다. 북한이 핵무장을 추구하면서 내세운 핵심적인 논리가 바로 "조선반도는 교전 상태"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북한 정상이 정전체제를 가리켜 "비정상적인"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올해에" 종전과 평화협정을 추진키로 합의했다. 북핵이 정전체제라는 비정상적인 토양에서 자라왔던 만큼, 토양 자체를 정상적인 평화체제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또한 북한은 "교전 상태"라는 이유로 초기 핵신고 대상에서 핵무기는 제외한 바 있었고, 검증도 "최종 단계"로 미뤘었다. 그런데 "올해에" 종전과 평화협정을 추진키로 함으로써, 비핵화로 가는 길목에 도사리고 있는 "디테일 속의 악마들"을 사전에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종전과 평화협정이 빨라질수록 비핵화에도 속도가 붙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이 북미 정상회담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는 의미는 바로 이들 지점에서 추출할 수 있다. 다만 미국과의 협의 과정에서 과제는 남아 있다.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의 관계를 명확히 해둬야 한다. 종전 선언이 평화협정의 예비단계인지, 아니면 동일한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올해에"라는 부사가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 모두를 염두에 둔 것인지에 대한 후속 논의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종전과 평화협정은 북한에 일방적으로 베푸는 시혜나 보상이 아니라 공동의 안전과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미국에 주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김정은의 용단 배경은?
그렇다면 '천사들'은 무엇일까? 기존 문법에 따르면 종전과 평화협정으로 가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다. 정전협정이 협상 개시부터 체결까지 무려 2년 이상이 걸렸고, 정전체제가 65년 동안 이어져오면서 이 기간 동안 켜켜이 쌓인 난제들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올해에"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 그리고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3자 또는 4자 회담을 개최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의구심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런데 판문점 선언에는 이러한 의구심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는 합의들이 담겼다. 전문 첫머리에 담긴 '부전(不戰)의 약속'에서부터, 2조 한반도 군사적 긴장 완화에 담긴 "일체의 적대행위 전면 중단" 및 "비무장지대의 실직적인 평화지대"와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의 평화수역" 만들기, 그리고 3조에 담긴 "불가침 합의" 및 "단계적 군축 실현"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합의 내용만 놓고 볼 때에는 '남북 평화협정'에 근접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종전과 평화협정의 당사자는 남북한만이 아니다. 미국은 핵심 당사국이고 중국의 참여도 필요하다. 그래서 판문점 선언에는 남북한이 합의할 수 있는 내용을 먼저 담고 한미·북미 정상회담과 3자 또는 4자 회담을 통해 대미를 장식하자는 취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행간도 읽을 수 있다. 평화협정 협상의 난제 가운데 하나는 북방한계선(NLL) 문제였다. "해상분계선"으로 간주하는 남측과 이를 "유령선"이라고 주장했던 남북한의 오랜 갈등과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문점 선언에는 '북방한계선'이 명시되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방한계선의 존재를 인정한 셈이다. 이는 평화협정 협상 시 불거질 뻔한 "디테일 속의 악마"를 사전에 제거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평화협정 협상 시 최대 쟁점은 뭐니 뭐니 해도 주한미군 문제로 간주되었다. '평화협정→주한미군 철수→한반도 적화통일'로 이어지는 아전인수식 3단 논법은 국내외 보수 진영이 평화협정을 반대해온 핵심적인 사유였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과거에 여러 차례 주한미군을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비쳐도 소용었었다.
그런데 김정은은 여러 경로를 통해 주한미군을 양해할 수 있다는 뜻을 전달했다. 비핵화의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각론들과 변화무쌍한 국내외 정치 환경을 고려할 때,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에는 앞으로도 험난한 길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속도전"에 나서자고 의기투합했다.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에 응하기로 한 만큼, 이러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살려야 한다고 다짐했다.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하고 사실상 북방한계선을 인정하며 주한미군을 용인하겠다는 김정은의 용단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재작년부터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을 맞이하는 2018년 7월 27일경에 당사국들 정상이 만나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고 항구적인 평화를 선포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염원하고 또한 주문했었다. 그런데 꿈같은 일이 성큼 다가서고 있다. 그 꿈이 실현되는 날, 북한이 '명예로운 비핵화'를 천명하는 날도 성큼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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