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ICBM은 "북한이 미국의 개입을 저지하고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기 위한 용도"라며 '존재론적 위협'으로 거론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북한은 핵탄두 장착 ICBM 보유를 향한 폭주를 멈추기로 했다. 이미 문재인 정부 특사단을 통해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를 유예키로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4월 21일에는 노동당 '결정서'를 통해 이를 대내외적으로 공식화했다. 이러한 입장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공화국 북부 핵 시험장(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논리는 "핵무기 병기화를 믿음직하게 실현하였다"는, 즉 "국가 핵무력 건설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가 필요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보적인 핵보유국인 북한이 핵무력 건설을 완성했다는 것은 자화자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세계 최강의 핵보유국인 미국조차도 30년간 1조 2000억 달러를 투입해 핵무기 현대화에 나서고 있고, 핵무기의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핵실험도 할 수 있다며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이 핵무력 건설을 완성했다고? 실상은 이렇게 주장하면서 국면을 전환하고 싶어하는 데에 있다. 국면 전환의 핵심은 '결정서'에도 나온 것처럼 병진노선의 또 하나의 축인 "경제건설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 있다.
물론 북한이 비핵화 용단을 내렸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다. 이는 앞으로 협상을 통해 확인하고 또한 유도해야 할 몫이다. 그렇지만 북한이 자발적으로, 또한 아무런 조건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핵실험과 ICBM 시험 발사 중단을 선언한 것은 그 자체로도 중대한 진전이다. 그 이유는 앞서 소개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ICBM의 핵심 기술은 재진입에 있다. 이 능력을 확보·입증하기 위해서는 10차례 이상의 시험발사가 필요하다. 그런데 북한은 시험 발사를 통해 재진입 기술을 명확히 입증하지 않은 상황에서 멈추기로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작년 초에 북한의 ICBM 보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었는데,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그러자 국내 일각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의 골대를 또다시 옮기고 있다. 북한이 ICBM은 포기하면서 한국과 일본을 사정거리 안에 두고 있는 단거리와 중거리 핵미사일 포기하지 않으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같은 입으로 "미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는 것이 최악"이라고 주장했던 것이 불과 얼마전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북한이 사실상 ICBM의 꿈을 접겠다는 것은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도 해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북한은 여러 경로를 통해 비핵화의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우리에게 최상의 시나리오는 한반도 비핵화 달성에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중대한 진전이 이뤄지고 있는데 최악의 시나리오를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찬물을 끼얹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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