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베트남 "용서한다고 학살을 잊는 건 아니다"

[기고] 베트남 혁명투사 국민작가 반레 인터뷰

베트남, '세계 제1의 초강대국'인 미국을 이긴 '작은 거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베트남은 중국과 함께 사회주의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를 과감하게 추진하며 동남아시아의 경제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 베트남전 참전으로 경제 발전의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으며 최근 한국 기업이 대대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특히 오는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수교 25주년을 맞아 베트남을 국빈 방문한다. 이런 가운데,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양민학살에 대해 문 대통령이 사과할 것인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베트남 평화재단은 3월 초 한국군에 의한 '하미 양민학살 50주년 추모'를 위한 평화기행을 진행했다. 정년 퇴임 기념으로 이번 기행에 참여한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평화기행 참배단과 베트남 국민작가 반레와 가진 집단 면담의 주요 내용을 전해왔다.


작가 반레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베트남전 소년병으로 참전한 '불굴의 전사'로, 인터뷰는 베트남 전문가인 한베 평화재단의 구수정 박사 통역으로 이루어졌다.

(☞ 바로 가기 : 한베평화재단 베트남 평화기행 참배단의 '하미학살 50주기 위령제')

▲ 베트남 국민작가 반레(오른쪽)과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왼쪽). ⓒ한베평화재단

- 요즘 근황이 어떻습니까?

"나는 요즘 복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두 딸이 번역가가 됐는데, 첫째 딸은 영어를 하지만 둘째 딸은 한국어를 배워서 최근 은희경 소설가의 <새의 선물>을 번역·출판했습니다. 나는 구세대이지만, 신세대인 딸들이 한국 등 외국 문물을 소개하니 기쁩니다."

- 한국 독자들을 위해 소개를 해 주십시오.

"한국에도 번역된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하재홍 옮김, 실천문화사 펴냄)의 작가 반레지만 본명은 레치 투이입니다. 소설 이외에 시도 쓰고 베트남국립영화제작소 소속 감독으로 구정 대공세를 다룬 다큐멘터리 <1968년 봄> 등도 만들었습니다.

저는 민빈이라는 북부 변방 출신으로 고등학교 3학년 때 베트남민족해방전쟁에 자원입대했습니다. 이들 소년병 300명으로 '영광의 301대대'를 만들었는데, 북베트남에서 남베트남으로 침투하는 '호찌민 루트'에 투입되어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1967년 남으로 출발했는데, 1973년 전쟁이 끝나자 300명 중 5명만 살아남았습니다.

나는 시인이 꿈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소년병으로 같이 생활한 절친의 꿈이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도 항상 시집을 가지고 다니며 시를 읽었습니다. 낮에는 시를 읽을 시간이 없고 밤에는 빚이 없어 시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밤에 미군이 폭격 전에 쏘아 올리는 조명탄이 터지면 시집을 들고 나가 시를 읽던 친구였는데, 결국 폭격에 죽었습니다. 이루지 못한 그의 꿈을 대신 이루어 주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고, 그의 이름이 '반레'라 그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 성장 과정은 어떠셨나요?

"북베트남에서 자랐으니, 이데올로기 교육이 강했습니다. '인간은 타인을 돕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존재한다'는 식으로 배웠습니다. 호찌민 장학생으로 유학 갈 기회가 있었지만, 머릿속은 '민족 해방'으로 가득 차 있어 포기했습니다. 소년병으로 항상 세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미국을 이기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살고 싶다.' 구정 대공세로 하루에 36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들 중 95퍼센트는 농민의 자식이었습니다. 나는 이들을 대신해 살아남았으니, 전쟁 이후의 삶은 여분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가르친 손호철이라고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 고등학생이었다면 대략 17살이었을 것 같은데, 1950년생입니까?

"아닙니다. 1949년생입니다."

- 그렇군요. 나는 1952년생이고, 여기 한국의 대표 역사학자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1948년생입니다. 세 사람이 비슷한 세대로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서 교수와 나는 한국에서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한 박정희 정권에 대항해 데모도 하고 고문도 당하고 감옥도 갔지만, 당신이 겪은 고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청춘의 모든 것을 조국의 해방을 위해, 베트남을 위해 다 바쳤습니다. 이제 인생을 돌아볼 칠순이 가까운 나이가 되었는데, 통일된, 해방된 현재의 베트남을 보면서 당신이 당신의 청춘을 바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반레 지음, 하재홍 엮음, 실천문학사 펴냄) ⓒ실천문학사
"나는 프랑스의 식민지화와 미국의 침입에 의해 부서졌던 나의 조국이 이제는 충분히 다시 아름다워졌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전쟁으로 부서졌던 나의 아름다운 조국을 이제 되찾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의 조국이 이제 충분하게 부유해지고 부자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나는 나의 청춘을 조국의 해방에 바친 것이 자랑스럽고 보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열매가 다수 민중에게 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과실이 소수 상층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실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평범하고 가난한 농민들의 아들과 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해방과 경제 발전의 과실에서 소외됐습니다. 만일, 정말 만일, 이 같은 추세가 개선되지 않고 계속된다면, 베트남의 해방을 위해 바친 나의 청춘은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안타깝지만 의미심장한 이야기네요.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니,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우선, 다시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어떠한 선택을 할 것 인가하는 자문입니다. 그 끔찍한 경험을 하고서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자원입대해 소년병이 돼서 조국의 해방에 내 청춘을 바쳤을까를 자주 생각합니다.

둘째로, 그 아름다운 사회주의가 왜 같은 사회주의와 싸워야 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자본주의·제국주의 국가인 미국과의 전쟁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회주의였던 캄보디아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전쟁을 해야 했다는 것은 너무도 충격적이고, 지금도 너무 괴로운 사실입니다. 물론 이는 미국과 중국의 음모라고 생각합니다만.

셋째, 내가 온몸을 던져 싸웠던, 내가 나의 청춘을 바쳤던, 그리고 많은 친구들의 목숨을 앗아간 그 이념(사회주의)는 아직도 존재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결국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아파하다가 천착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문제입니다. 저는 한때 사회주의의 세계 혁명을 꿈꾸던 투사였습니다. 한때는 '인간 해방', '노동 해방'의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피가 펄펄 끓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름이 무엇이든, 사회주의고 자본주의고 그 외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의 얼굴'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맞습니다. 괴테의 표현대로,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푸른 것은 생명의 나무입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푸른 것은 생명의 나무"라니, 정말 공감되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문인 등 과거 사회주의 친구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만나면, "너희들 미국과 그렇게 수많은 피를 흘리고 싸우더니 이제 와서는 키스를 하고 난리를 피우느냐?"고 놀립니다. 한 루마니아 친구는 "우리는 우리가 원해도 미국이 공장을 안 짓는데, 너희는 그렇게 원수처럼 서로 싸우더니 미국 공장 짓겠다고 소동이냐?"라며 뭐라고 합니다.

나는 역사를 바꿔낸다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미국의 예비역 중장을 만났는데, "너희들 우리를 죽기 살기로 몰아내더니, 기껏 한다는 것이 자본주의냐? 너의 청춘을 비롯해 그동안 너희가 흘린 피와 희생이 무의미하지 않으냐?"고 비아냥거리더라고요. 비수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그 장군에게 대답했습니다. "맞다. 우리가 거대한 역사를 거스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호찌민 선생님이 베트남 독립을 선포했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베트남을 인정했더라면, 우리도, 미국도 이렇게 피 흘릴 이유가 없었다. 우리 희생의 무의미성을 비아냥거리지만, 역사 속 희생의 무의미성은 너희가 시작한 것이다." 사실 베트남 해방 전쟁은 이념의 문제라기보다는 침략과 민족 해방, 그리고 민족적 자존심의 문제였습니다.

- 한국군의 학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하지만,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 정부도, 베트남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결국 많은 문제들이 그렇지만, 시민사회가 강해져 국가를 압박할 때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언제 정부가 먼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모든 것은 여러분과 같은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최근 베트남에서는 학생들의 급식이 엉망인 것이 문제가 되어 '고기 있는 급식'이라는 것이 화두가 되고 있는데 이 역시 한 기자가 쓴 고발 기사라는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이번에 한국군에 의한 학살 희생자 유가족들과 피해자들을 만났는데, 대부분은 '이제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같은 용서가 진심이라고 생각합니까?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용서했을 것입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역사와 인간을 구별할 줄 압니다. 역사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한다고 학살을 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베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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