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이 기소한 뇌물 298억 원과 비교하면, 공소사실 상당 부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이 사건은 특검이 규정한 사건의 본질과 거리가 있다고 보인다. 정치권력과 뒷거래, 국민 혈세인 공적자금 투입과 같은 전형적 정경유착 등을 이 사건에서 찾을 수 없다. (…)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최고 정치권력자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삼성 그룹의 경영진을 겁박하고, 박 전 대통령의 측근인 최 씨가 그릇된 모성애로 사익을 추구한 것. (…)
피고인으로서는 정유라 승마 지원이 뇌물에 해당한다는 인식을 하면서도 두 사람의 요구를 쉽게 거절하지 못해 수동적으로 뇌물공여로 나아간 것."
1심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풀어준 2심 법원의 판결 내용이다.
정유라 씨에 대한 삼성의 승마 지원에 대해 1심 법원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부도덕한 밀착"이라고 봤었다. 반면, 2심 재판을 진행한 서울고등법원 형사 13부(정형식 부장판사)는 5일 선고 공판에서 정반대 판단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삼성 경영진을 겁박했으므로, 삼성은 수동적으로 뇌물을 줬다는 게다.
2심 법원의 논리라면, 확실히 이 부회장의 죄는 가벼워진다. 요컨대 피해자에 가까워진다. 실제로 구속돼 있던 삼성 전·현직 임원들은 모두 석방됐다. 그렇다면, 이 같은 2심 법원의 논리는 지금 진행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1심 판결의 "부도덕한 밀착 거래"와 2심의 "겁박". 어느 쪽이 죄가 더 큰가? 전자가 더 크다는 설명이 나온다. 박 전 대통령에겐 2심 판결이 1심보다는 낫다는 말이다. 아울러 2심 법원은 1심과 달리, 삼성이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지원한 돈에 대해 뇌물이 아니라고 봤다. 이 역시 박 전 대통령에게 유리한 점이다.
그러나 큰 변수는 아니라는 설명이 우세하다. '박 전 대통령이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라는 사실 자체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일단 2심 법원 역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재용에게 뇌물을 요구"했다고 못 박았다. 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 혐의가 적용된다는 점은 분명히 한 셈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가 삼성 측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공동정범"이라고도 했다. "(박 전 대통령과 최 씨가) 경제공동체가 아니어도 공동정범"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교사범, 방조범 등으로 형이 줄어들 여지가 차단됐다. 박 전 대통령 사건 재판부 역시 이 같은 판결을 무시할 수 없으리라고 여겨진다.
2심 법원은 "대통령이라는 직위의 광범위한 권한에 의하면 삼성그룹의 기업 활동과 대통령 직무는 직·간접적 관계를 맺는다"라고도 했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이 받은 뇌물은 '직무 관련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역시 박 전 대통령 사건 재판에 영향을 준다.
앞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 부회장 측이 주거나 주기로 한 뇌물 액수가 213억 원이라고 봤었다. 이 가운데 이 부회장 측이 실제로 준 돈은 77억8735만 원이라고 봤다. 이어 1심 법원은 실제로 지급된 돈 가운데 차량 구입대금 명목의 돈을 제외한 72억9427만원을 뇌물로 인정했다. 그리고 2심 법원은 뇌물 액수가 36억3484만 원이라고 봤다. 액수는 꾸준히 줄었지만, '뇌물' 꼬리표는 여전하다.
이 부회장에게 적용된 뇌물공여죄와 달리, 박 전 대통령에게 적용된 형법상 뇌물수수죄는 수뢰액이 1억 원 이상이면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재판에서 인정된 뇌물액수만으로도 박 전 대통령은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된다.
한편, 이날 일부 언론은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 사건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하는 자필 탄원서를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박 전 대통령이 다른 측근 사건 재판부에 이런 탄원서를 낸 적은 없다. 유독 이 부회장에 대해서만 선처를 호소한 셈이다. 실제로 이 부회장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왔지만, 박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까지 벗기기엔 무리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이는 정치권력에 비해 경제권력에게 관대했던 사법부의 관행이 여전하다는 설명과도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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