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의 뜻, 동방을 지배하라!

[유라시아 견문] 블라디보스토크 : 동아시아와 동유라시아

1. 러시아와 아시아

흑토가 적토를 지나 황토로 바뀌었다. 곧게 뻗은 자작나무 사이로 굽이굽이 소나무가 늠름하다. 가지 끝에는 사뿐히 까치 한 쌍이 앉았다. 모스크바로부터 9288km를 달렸다. 166시간이 흘렀다. 망망대해가 눈에 든다. 대양은 대호와 대하와 또 다르다. 시베리아에는 세계 10대 강 가운데 4개 강이 흐른다. 가장 작은 강이 아무르라는데, '러시아의 어머니 강' 볼가 강에 견주면 1.5배나 크다. 그럼에도 대륙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펼쳐지는 바다의 쾌감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더구나 저 바다가 바로 동해렷다! 애틋한 감흥마저 솟는다. 깍아지른 해안 절벽도 내가 나고 자란 나라의 동해안을 닮았다. 6박 7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른 것이다. 7월의 첫날, 어슴푸레 새벽이었다.


러시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언덕 위의 도시이다. 구릉 사이로 태양이 떠오른다. 곳곳에 계단을 만들어 두었다. 오르내리 막 산책만으로도 힐업과 힙업이 된다. 케이블카를 타고 독수리 전망대에 올라 시내를 조감하면 천혜의 항구임이 단박에 확인된다.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의 돌출된 해안선을 따라 군항과 상항과 도심이 촘촘히 형성되었다. '러시아의 샌프란시스코'라고들 한다. 루스키 섬을 잇는 교각을 보면 언뜻 샌프란시스코가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금 러시아사에 입각하여 빗대자면 이스탄불에 흡사하다. 해협의 생긴 꼴부터가 이스탄불의 금각만을 닮았다. '동방의 보스포루스'가 더 적당하다. 러시아인이 동경하는 동방정교의 성소, 콘스탄티노플을 떠올렸을 것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와 아시아를 엮는다. 해양공원에는 태국부터 인도네시아까지 아시아 국가 이름을 새겼다. 부산부터 오사카, 상하이까지 자매 도시의 이름을 딴 조형물도 만들었다.


Airbnb로 숙소를 구했다. 역대 급, 가장 흡족한 집이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했다. 거실과 발코니 사이 통유리를 설치했다. 동해를 홍해로 물들이는 황혼이 황홀하다. 주인 안드레이부터 이력이 독특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토박이 엔지니어였다. 1970~80년대 북조선부터 베트남과 캄보디아까지 기술을 전수하러 다녔단다. 원산과 나짱과 시하눅빌에서 살았던 적도 있다. 부인은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출신이다. 소련 시절 극동연방대학에서 공부하다 남편을 만나 정착했다. 당시에는 한 나라였으나 1991년 두 나라가 되었다. 고등학생인 딸은 중국어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단골 카페 Kafema에서 한자 '그리기'에 여념이 없다. whatsapp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면 종종 중국어로 인사를 건네 왔다.

Italki로 연을 맺은 유진과는 카톡으로 대화했다. 역시 블라디보스토크 토박이, 해양 생물학자였다. 모스크바에서도 잠시 근무했지만 바다가 그리워 돌아왔단다. 이웃나라 말을 배우는 것이 취미이다. 공자학원에서 2년간 중국어 학습을 마치고, 막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경주부터 전주까지 옛 도시들을 탐방하겠단다. 1주일에 한 번씩 차이나타운에서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가르쳤다. 시베리아 유목생활을 거두고 정착생활에 진입했던 8월과 9월에는 정규 어학 수업도 들으려고 했다. 방학 기간이라 1:1 수업을 신청해야 한다. 시내에 있는 푸시킨 센터를 찾았더니 담당자 이름이 올가 응우옌(Nguyen)이다. 아버지가 하노이 출신이란다. 1980년대 블라디보스토크에 유학 왔다가 대학에 자리를 얻은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와 도이모이의 공진화, 극동연방대학의 베트남학과 교수가 되었다.


지역 신문에서 흥미로운 소식을 접했다. 국영 로씨야 방송 블라디보스토크 지국에서 동북 3성 1억 2천만을 대상으로 중국어 방송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터뷰 겸 방송국 담당자를 만났다. 아나운서 이름이 또 독특하다. 키릴문자로 표기되었는데, 발음이 영 어렵다. 중국어를 러시아로 음차한 것이란다. 중러 혼혈이었다. 아버지가 중국인이고 어머니가 러시아인이다. 아버지는 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무역업을 하신다. 개혁개방과 페레스트로이카의 합작이 맺어준 백년가약이다.

러시아 견문 6개월을 마무리 지어가던 10월 초, 피트니스 클럽에 못 보던 부부가 등장했다. 사이클링 클래스 마다 옆자리에서 나란히 달린다. 사이가 무척 좋아 보였다. 눈인사만 나누다 말을 텄더니 막 한국에서 왔단다. 서울에서 6년을 근무했다는 것이다. 내가 한국을 떠난 2011년부터 서울을 지켜주었다. 마침 집이 광화문, 주말마다 촛불항쟁도 구경했단다. '엄지 척' 선거용 제스추어도 보여주었다. 계동사옥과 똑같은 꼴로 만든 현대호텔의 한식당 '해금강'에서 저녁을 대접받았다. 남편 안톤은 15년차 현대상선의 중견 직원이었다.

▲ 연해주와 면한 동해. ⓒ이병한


2. 동구의 충격

본디 해삼위(海參崴)라 불리던 곳이다. 대청제국 시절 작은 어촌이었다. 1860년 러시아제국과 대청제국 간 베이징조약을 체결한다. 불평등조약이었다. 연해주가 러시아의 땅이 된다. 아편전쟁 이후 난징조약과도 달랐다. 상하이 등 5개 연안도시를 개항하고 홍콩을 할양하는 정도에 그쳤다. 서구 제국이 점(點)을 얻었다면, 동구 제국은 면을 차지하고 선을 다시 그린 것이다. 아무르강-우수리강-투먼강으로 이어지는 새 국경이 설정되었다.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치이다. 중국이 만주 동쪽 바다로 나아가는 출구를 잃었다. 졸지에 조선은 두만강을 경계로 두 개의 제국과 접하게 되었다. 전례가 없던 사태였다. 동방정교를 믿고 키릴문자를 쓰는 동로마제국의 후신이 동북아의 일원이 된 것이다. 중국에서도 조선에서도, 그리고 일본에서도 '동구의 충격'이라 함직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서둘러 에조치를 '홋카이도'로 정복한 까닭이다. '한반도 주변 4강'이라는 표현이 정립되는 순간이었다.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특필해야 할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서구의 충격'만 도드라지는 역사 인식의 적폐가 만연하다.

▲ 네르친스크. ⓒ이병한

1860년 베이징조약은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뒤집은 것이다. 북에는 표토르 대제가 등장하고, 남에는 강희제가 군림하던 때이다. 여전히 대청제국이 러시아제국을 능가했던 시절이다. 1727년 카흐타 조약으로 국경무역을 허여해주었다. 러시아의 모피와 중국의 차를 교환한다. 바이칼과 볼가 강을 지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찻길이 흘렀다. 특히 홍차를 사랑했다. 설탕을 듬뿍 넣어 추위를 달랬다. 캬흐타에는 중국어 통역학교도 세워진다. 200여년 만에 그 남북 간 위상이 역전된 것이다. 중원에서는 내란(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고, 남방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침입했지만, 북방의 러시아처럼 압도적이지는 못했다. 20세기 말 홍콩과 마카오는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상하이는 아편전쟁 이전의 세계로 반전하는 21세기 신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오로지 연해주만이 19세기와 변함없이 러시아의 강역이다.

▲ 캬흐타. ⓒ이병한

7월 2일이 '블라디보스토크의 날'이다. 도시 이름부터 의미심장하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이다. 북위 43도, 키릴문자로 새겨진 지구본을 서쪽으로 굴리면 코카서스 산맥의 블라디카프카스(Владикавка́з)에 가닿는다. 코카서스를 지배하라, 흑해의 군사와 통상의 거점이 되는 도시이다. 블라디보스토크와 블라디카프카스, 공히 러시아제국의 최남단에 위치하는 도시들이다. 흑해와 동해가 공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사와 아시아사가 러시아를 통하여 연동하기 시작했다. 발칸반도와 크림반도의 운명이 요동반도와 한반도와 직결되었다. 동아시아가 동유라시아로 진화하는 밀레니엄적 분수령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일약 세계도시로 도약한다. 자유항구로 구미의 선박들이 몰려들었다. 1879년 입항 통계를 보면 러시아 선박 5척, 독일 13척, 영국 12척, 미국 9척, 덴마크 2척, 스웨덴 2척 등이다. 전신선도 조기에 깔린다. 1867년에 이미 시베리아를 관통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부터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통신체계를 구축했다. 블라디에서는 다시 나가사키와 상하이, 홍콩을 잇는 해저 전선이 이어졌다.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두 개의 전신망을 확보한 것이다. 인도양에도 닿았다. 지중해와 홍해를 지나 인도양을 통과한 러시아 선박들이 남중국해와 동중국해를 거쳐 동해를 타고 올랐다. 흑해에서 청해까지, 러시아의 바닷길을 개척한 것이다. 1869 수에즈 운하 개통부터 1917년 러시아 혁명까지 근 반세기 동안 러시아사에 유례없던 '남해항로'의 전성기가 열린 것이다.

바닷길이 안정적이지는 못했다. 해상교통을 장악한 것은 대영제국이었다. 그레이트 게임, 영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대륙제국 러시아가 유리한 쪽은 육로였다. 그래서 시베리아 횡단철도 위원회를 발족시킨다. 육로와 해로의 겸장, 러시아판 '일대일로'였다. 그 19세기의 일대와 일로가 만나는 곳이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청일전쟁은 또 한 번의 분기점이 된다.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자, 러시아의 지리적 발상 또한 더욱 확장되었다. 연해주 다음으로 요동반도와 한반도 진출을 적극 모색한다. 대련 항을 개발하고 대한제국을 품어 안았다(아관파천). 특히 동해안과 남해안을 주시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한반도 종단철도로 연결시키려고 했다. 원산을 지나 부산으로, 거제도까지 이으려고 했다. 거제도를 '러시아의 홍콩'으로 만든다는 계획도 입안한다.

응당 일본과 충돌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여기서 패함으로써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러시아의 동아시아 구상은 수포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다시 기회가 열린다. 적군과 백군의 시베리아 내전은 소련과 일본 사이 '제2차 러일전쟁'으로 변질되었다.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를 '해방'시킨 소련은 두만강을 넘어 원산까지 내려갈 참이었다. 당시 못다 이룬 작전을 완수한 것이 1945년이다. 평양을 '해방'시키고 반도의 북쪽에 소련의 위성국을 세운 것이다. 반세기의 숙원을 끝내 달성했다. 1860년 '동구의 충격'으로부터 한 세기가 못되는 시점이었다. 북조선 엘리트들은 러시아어를 제1외국어로 배웠다. 동로마세계의 후예와 서로마세계의 후신이 38선을 사이로 길항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 1899년 10월 21일 블라디에서는 동양학원 개교식이 성대하게 거행된다. 동시베리아에 들어선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청일전쟁 직후에 개설되었음이 눈에 띈다. 1896년 블라디 최초의 중국어 어학원이 생겨났다. 지역 신문에는 사설학원으로 충분치 못하다는 사설과 논설이 연달아 실렸다. 한층 본격적인 동양어 교육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럽인과 아시아인이 반반씩 살아가는 도시였다. 1878년 인구 통계를 보면 러시아인을 포함한 유럽인이 4952명, 아시아인이 3441명이었다. 말 그대로 유라시아 국제도시였다. 한창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건설되는 와중이기도 했다. 당시 노선은 현재와 달리 만주를 통과하는 직선으로 달렸다. 신속한 건설과 원활한 경영을 위해서라도 동양어에 능통한 인재가 절실했다.

4년제 대학이었다. 신입생으로 1년을 나면 2학년부터 전공을 나누었다. 중국어-일본어, 중국어-조선어, 중국어-만주어, 중국어-몽골어 네 학과를 설치했다. 중국어는 4년 내내 필수과목이었고, 일본어와 조선어 등은 2년차부터 선택과목이었다. 공통 교양과목으로는 동아시아의 지리와 민족, 현대(19세기)사 등이 개설되었다. 러시아인 교수가 이론 수업을 맡고, 외국인 강사들은 실용 수업을 담당했다. 첫해 입학한 31명 신입생 가운데 2년차에 진급한 이는 18명이었다. 중국어-일본어가 6명, 중국어-조선어가 5명, 중국어-만주어가 4명, 중국어-몽골어가 3명이었다. 어학연수도 보냈다. 일본은 하코다테, 조선은 원산, 중국은 칭따오였다. 공히 항구도시, 바닷길로 블라디와 긴밀했던 곳이다.

러시아 동양학의 중심도 이동했다. 본디 이슬람문명과 접한 카잔대학이 으뜸이었다. 1854년 이후 제국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이 더 유명해진다. 19세기 후반에 이미 산스크리트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투르크어, 타타르어, 중국어, 만주어, 몽골어, 헤브라이어, 아르메니아어, 그루지아어 강좌들이 개설되었다. 1860년 연해주를 얻고 블라디를 건설함으로써 아시아학의 또 다른 거점을 확보한 것이다. 그 동양학원의 후신이 오늘날 극동연방대학이다. 세계 최초로 한국학 단과대학도 들어섰다. 21세기 러시아의 중국학, 한국학, 일본학, 베트남학 등을 선도하는 아시아 연구의 허브이다. 이곳에서 근무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더랬다.


▲ 블라디보스토크. ⓒ이병한

3. 발해길(Balhae Road)

조선인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된 것도 1860년대이다. 러시아와 조선이 수교를 맺은 1884년부터 훨씬 이른 시점이다. 가뭄과 가난으로부터 탈주했다. 변방의 함경도 사람들이 많았다. 본디 여진족의 후예들이 살던 곳, 함경도-연해주의 모피길, 해삼길이 작동했다. '신한촌'은 대한제국 이후에 들어선 마을이다. 그 전에는 개척리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다. 내가 운동하러 다니던 피트니스 클럽 언저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곳에 해조신문사와 대동공보사 등이 자리했다. 시일야방성대곡의 장지연부터 의병장 유인석까지 개척리를 근거지로 삼았다. 헬조선에서 빠져나온 유민(流民)들이 먼저 길을 트고, 망국을 애달파하는 의사(義士)들이 그 뒤를 이은 것이다.


글만 써서는 아니 되는 시절이었다. 한 손에는 붓, 다른 손에는 총을 들었다. 유민들과 의사들이 합작하여 의병(義兵)들이 섰다. 블라디로부터 250km, 이틀을 자전거로 달리면 의병들의 거점, 크라시키노(Кра́скино)에 이른다. 조선인들은 연추라고 불렀다. 두만강을 사이로 조선을 접하고 있는 하산(Хаса́н)이 지척이다. 하산 역에서는 북조선으로 가는 기차표도 구할 수 있다. 중국의 훈춘과도 불과 2~3km 떨어져 있다. 이 삼국의 국경도시 골든트라이앵글에서 손가락을 자른 이가 안중근이다. 단지동맹으로써 굽히지 않은 절개를 몸에다 새겼다. 국내 진격에 실패한 안중근은 블라디로 돌아와 사격 연습에 전념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하여 권총을 품고 하얼빈을 향하는 열차에 오른 것도 블라디였다.


▲ 하산 역. ⓒ이병한

신문을 발행하고 의병을 양성하는 것 모두 비용이 필요하다. 자금이 없으면 무장투쟁도 문화투쟁도 불가능한 일이다. 거부 최재형이 희사(喜捨)했다. 함경도 노비 출신이었다. 러시아인의 양자가 되어 정교회에 입문하고 고등교육도 받았다. 무엇보다 원양어선을 타고 러시아의 '남해항로'를 통하여 전 세계를 구경한다. 보는 것도 힘이다. 무역 왕이 되어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이미 러시아인이었으되,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신채호와 이광수가 글을 썼던 <권업신문>의 발행인이 최재형이었다. 안중근이 사격 연습을 했던 장소도 최재형이 마련해주었다. 연해주가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의로운 사업가 최재형의 공이 결정적이었다. 막후이고 배후였다.

소련이 들어서면서 블라디는 닫힌 도시가 되었다. 남겨진 조선인들은 귀화하여 '고려인'이 되었다. 1930년대 중반 연해주의 고려인 인구는 20만에 이른다. 2000만 겨레의 100분지 1에 달하는 규모였다. 만주국까지 들어선 마당에 예외적인 숨통이었다. 그러나 난세의 비극을 빗겨가지 못했다. 소련과 일본 간 긴장이 고조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이 결정적이다. 만추리아와 몽골리아와 시베리아가 온통 전장이 되었다. 연해주의 중국인과 고려인들은 잠재적 스파이가 될 수 있었다. 대숙청이 단행되고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다. 연해주만 해도 한반도와 닮았다. 버드나무가 자라고 진달래가 핀다. 아무르 호랑이가 남쪽으로 내려가 백두산 호랑이가 된다. 땅도 물도 낯선 이역만리로 추방된 것이다. 특히나 동해를 끼고 살았던 함경도 사람들에게 내륙은 갑갑했을 것이다. 불똥은 동양학원까지 튀었다. 동양학자들마저 싸잡아 '인민의 적'으로 몰았다. 할힌골 전투/노모한 전쟁이 일어난 1939년 여름, 학교도 폐쇄된다. 블라디는 오로지 슬라브인들만의 도시가 되었다. 냉전기 태평양 함대가 진주하는 군사기지로 삼엄했다. 외국인은 물론이요 소련 내 외부인마저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조선인이 '고려인'으로 전환되어가는 중간 기착지 크라스키노에는 천 년 전 발해의 성토가 남아있다. 혁명광장 근방에 자리한 프리모리에 박물관에도 석불을 비롯한 발해의 유물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돌궐 문자도 눈에 띈다. 발해 시절 이미 투르크 문화가 유입된 것이다. 극동연방대학에는 발해연구소까지 만들었다. 발해부터 요나라, 금나라, 몽골과 청나라까지 북방제국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한다. 시베리아의 샤머니즘과 히말라야의 부디즘과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이슬람이 융합하고 혼종되던 북방의 연결망을 주목한다. 발해의 남부에는 고구려의 후예와 말갈이 어울렸다. 서부에는 몽골과 거란, 위구르와 투르크가 자리했다. 북동부에는 사할린과 홋카이도에 이르는 아이누가 왕래했다. 오늘날 중국의 동북 3성과 몽골과 러시아의 연해주와 북조선과 일본의 홋카이도를 아우르는 초원길과 바닷길이 작동했다. 그 천년의 '발해길'을 따라서 유민과 의병과 고려인의 파란만장한 백년이 흘렀던 것이다. 체코에서 건너온 흑맥주 코젤 다크를 홀짝이며, 백 년 전 의병장 유인석의 격문을 회감했다.

"천하의 도의를 다시 일으켜 하늘의 태양이 다시 밝도록 하여야 합니다. 한 나라만이 아니라 천하 만세에 전할 수 있는 공이요, 업적이 될 것입니다."

4. 사통팔달(四通八達)

새 천년, 새 천하를 모의하는 동방경제포럼이 열렸다. 9월의 행사이다. 긴 겨울과 짧은 여름사이, 북방의 가을은 특별하다. 그래서 유독 9월에 행사들이 많다. 태평양 영화제와 아무르 호랑이 축제와 극동 음악 페스티벌이 동시에 열린다. 으뜸은 역시나 동방경제포럼이다. 극동개발에 전심전력하는 푸틴의 회심의 기획이다. 도쿄에서는 2시간이 걸린다. 베이징에서도 2시간이 걸린다. 서울에서는 2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모스크바에서는 8시간이나 걸린다. 문재인 대통령보다 아베 신조 총리보다 푸틴이 더 먼 길을 날아왔다. 포럼 장소가 극동연방대학이다. 2012년 APEC 회담 장소로 만든 곳을 대학 캠퍼스로 활용한다. 도서관이 바다로 이어지는 대학 캠퍼스는 유일하지 싶다. 기숙사도 훌륭하다. 각국 정상들이 묵는 고급 호텔을 학생들이 사용한다.

▲ 아무르 호랑이의 날 축제. ⓒ이병한

그 극동연방대학을 10개로 늘리기로 했다. 하바롭스크 등 연해주 주요 도시마다 연방대학을 세운다는 계획이다. 언뜻 캘리포니아의 주립대학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극동 인구 증대를 위한 특단의 정책이다. 10개 연방대학을 만듦으로써 청년들의 인구 이동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우주기지 또한 건설되고 있다. 변방을 학술과 과학의 중심으로 탈바꿈시킨다. 땅도 무상으로 분배하고 있다. 극동으로 이주하는 이들에게는 5년간 토지를 임대한다.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고 공장을 세우고 회사를 만들고 도시를 형성하는데 일조하면 5년 후 소유권을 부여한다. 현재 극동인구는 600만을 조금 넘는다. 블라디 인구는 60만이다. 2040년까지 블라디는 인구 100만 도시, 극동은 1200만에 이르는 것이 목표이다. 러시아 인구의 1할에 육박한다. 장차 블라디보스토크를 동쪽의 수도로 삼겠다는 말이 빈 소리가 아닌 것이다.

러시아 내부의 인구 이동으로 그치지 않는다. 대외 개방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도시이다. 100년 전 자유항구의 위상을 되찾았다. 1992년 이후 지명부터 대거 바뀐다. 중앙대로의 이름은 레닌스카야에서 스베토란스카야로 바뀌었다. 35번가에는 1885년 세워진 굼 백화점 건물이 중후하다. 47번가의 태평양 함대 본부는 극동 국가문서관으로 바뀌었다.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나라의 숫자가 가장 많은 도시이다. 도착비자로 절차를 간소화한 나라 역시 가장 많다. 외국인들에 대한 세금 혜택 우대가 가장 좋은 도시이기도 하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진출한 기업에 비하면 1/4 수준의 절세 효과를 제공한다. 특히 중국, 일본, 한국, 몽골, 베트남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호의적이다.

▲ 동방경제포럼. ⓒ이병한

동방경제포럼의 공식 언어 또한 러시아어-영어-중국어-일본어-한국어-베트남어로 설정되었다. 국경을 접한 북조선 또한 외면하지 않는다. 나진과 원산에서 출항한 만경봉호가 블라디를 수시로 드나든다. 동방경제포럼에도 엄연한 일국이자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기실 극동연방대학 캠퍼스 건설 노동자의 5할 이상이 북조선 사람들이기도 했다. 150년 전 탈조선의 물꼬를 텄던 함경도-연해주 연결망이 북조선의 개혁개방을 선도하는 활로와 출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블라디는 한국인, 북조선인, 고려인, 조선족 등 1민족 4국민이 어울려 살아가는 미래형 도시가 되었다.

▲ 블라디보스토크 마라톤 대회. ⓒ이병한

블라디보스토크 국제 마라톤 대회도 있다. 북쪽의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는 아름다운 코스를 자랑한다. 내륙에서 살아가는 동시베리아 주민들과 중국의 동북 3성 사람들이 많이 참여한다. 한국에서는 서울과 강릉, 부산의 마라톤 클럽이 참가했다. 일본에서는 삿포로와 하코다테 등 홋카이도의 마라톤 클럽들이 참여했다. 동/러시아인과 동/아시아인이 절반씩 섞여서 달린 셈이다. 나도 뛰었다. 러시아를 떠나기 전 피날레 격이었다. 유라시아 견문 3년 차, 세 번째 마라톤이다. 베트남의 다낭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블라디에서도 뛰어본 것이다. 그러나 언덕과 구릉이 많은 도시, 난코스이다. 하프만 뛰었는데도 평지를 완주하는 것과는 난이도가 다르다. 골인 지점을 2km 앞에 두고 다리가 풀려버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다시피 하여 겨우 매듭을 지었다. 그렇게 러시아 생활 6개월을 마쳤다. 그렇게 30대의 마지막 해가 저물었다.

6월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경제포럼과 9월의 블라디보스토크 경제포럼을 모두 구경했다. 양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러시아/유라시아의 형세가 확연히 들어온다. 21세기의 국시(國是), 신유라시아주의가 허언이 아니라 실체임을 확인한다. 동과 서로 참가한 이들의 생긴 꼴은 다르다. 서유라시아에서는 서러시아인과 유럽인이 어울린다. 동유라시아에서는 동러시아인과 아시아인이 회합한다. 그럼에도 공통의 화두가 하나 있었다. 북극항로 개척이다. 지구 위 마지막 '지리상의 발견'이 될 북극항로에 유럽인과 러시아인과 아시아인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유럽과 아시아가, 서유라시아와 동유라시아가 북극해를 통해 만나게 된다. 19세기 인도양을 경유하던 남해항로와는 전혀 다른 바닷길이 열리고 있다. 장차 블라디보스토크는 대륙을 동/서로 잇는 철도는 물론이요, 남/북의 바다를 잇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허브가 될 것이다. 그 북해로 가는 길목에 북해도가 자리한다. 연해주(淵海州)에서 북해도(北海道)로 건너간다.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동해 너머 홋카이도로 이동한다.

▲ 블라디보스토크.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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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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