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문재인 정부에 놓은 '이중의 덫'

[정욱식 칼럼] 트럼프에게 한국은 현금 지급기?

'핵 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법은 없고, 전면적인 군비증강을 선언한 자리였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총평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본 것이다. 먼저 실패한 북핵 접근을 되풀이하고 말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정착시키기로 했다"고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저는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고 진지한 대화에 나설 때까지 최대한의 제재와 압박을 가해 나간다는 기존의 전략을 재확인했다"며 조건 없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달성해야 할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 중단 및 비핵화 의지 표명을 대화의 전제 조건으로 삼았다.

특히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체제의 구축 이야기는 지금은 이야기할 단계가 아닌 것 같다"며, "지금은 (북한의 도발을 중단시키고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제재와 압박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본다"고 했다.

한미 양국이 평화체제에 대한 능동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북핵 해결의 전기를 마련하기보다는, "언젠가 국면이 전환"될 때까지 최대한의 대북 압박과 제재에 치중하겠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2009년 이후 이명박·박근혜-오바마 정부가 추구해왔던 '선(先) 핵포기론' 및 '전략적 인내'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들이다.

하지만 북한은 이 시기에 핵과 미사일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강했다. 한미 양국이 이전보다 대북 압박과 제재, 그리고 무력시위가 크게 강화시켜 북한을 궁지로 몰고 있지만, 궁지에 몰린 북한이 무릎 꿇고 나올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 지난 7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 이후 기자회견을 가진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청와대

이처럼 실패한 외교가 재연되고 있는 반면에, 군비증강의 수준은 이전보다 훨씬 높아지고 있다. 문재인-트럼프 대통령이 천명한 것은 북한에 대한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와 인근 지역으로의 순환 배치 확대·강화 △ 한국의 자체 방위력 증강을 위한 협력을 전례 없는 수준으로 추진 △ 한국의 미사일 탄두 중량 제한 완전 해제 △ 한국의 최첨단 군사정찰 자산 획득과 개발을 위한 협의 개시 등에 합의했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와 백악관이 11월 8일 발표한 '공동언론발표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눈에 띄는 대목은 트럼프가 "점증하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핵과 재래식 전력 등 미국의 모든 범주의 군사력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음을 강조했다"는 부분이다.

통상적으로 미국의 안보 공약은 "확장 억제"라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표현으로 언급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핵 사용 준비'를 공식적·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이는 핵무기 사용 금지를 촉구해온 인류사회의 염원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북핵 상황의 악화 및 유사시 핵전쟁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성을 배가시킨다는 점에서 지극히 유감스러운 것이다.

또한 "문 대통령은 2022년까지 국방예산을 상당한 규모로 증액하고자 하는 계획을 공유했으며, 이는 F-35A 합동타격전투기, KF-16 전투기 성능개량, 패트리어트 PAC-3 성능개량, AH-64 아파치 대형공격헬기, 글로벌호크 고고도 정찰용 무인기, 이지스 전투체계 등 지난 정부에서 합의한 대로 주요 미국산 프로그램을 구매하는 데 사용될 한국의 예산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내용도 담겼다.

또한 트럼프는 "한국의 첨단 정찰체계를 포함한 최첨단 군사자산 획득과 개발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는 현행 GDP 대비 2.6% 수준인 국방비를 임기 내에 2.9%까지 올린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는데,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미국산 무기 도입으로 지출될 것임을 예고해준다.

결국 한국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마저도 '트럼프의, 트럼프에 의한, 트럼프를 위한 정상회담'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번 정상회담 내용을 미국에서 열렸던 1차 정상회담과 비교해보면, 기존 입장이 되풀이되었거나 더 강경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선 트럼프 특유의 '말폭탄'이 나오지 않은 것을 성과로 치부하지만, 트럼프가 한국에 와서 "화염과 분노", "북한 완전 파괴"와 같은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할 것이라곤 애초부터 생각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국회 연설에서 남한에 대한 덕담과 북한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으면서 장삿속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방한 기간 내내 무기 판매 증진을 위해 북한을 '꽃놀이패'로 삼고 남한을 '현금자동지급기(ATM)'로 삼겠다는 의사를 여지없이 과시했다. 이게 미국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면서 말이다.

문재인 정부마저 관성적인 친미주의와 공미형 친미주의에 사로잡혀 한미동맹 자체를 목적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는 한미동맹을 '돈벌이'와 '일자리 창출'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한국의 미래가 한미동맹과 북핵이라는 '이중의 덫'에 갇히지 않을까 극히 우려되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 주민들의 고단한 삶이 더 고달파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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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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