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민간 보험사에 진료정보를 팔았다고 뭇매를 맞았다(☞관련 기사 : 정춘숙 "심평원, 6000만 명 진료자료 민간보험사에 넘겨", "심평원, 민간보험사에 건강정보 팔아넘긴 건 국민 배신행위").
"'표본 데이터셋'을 1건당 30만 원의 수수료를 받고 총 52건(누적 6420만 명분) 제공"했다는 것이 핵심. "'학술연구용 이외의 정책, 영리 목적으로 사용 불가하다'는 서약서를 받았지만, 민간보험사가 '당사 위험률 개발'과 같은 영리 목적으로 자료를 활용하겠다고 신청해도" 자료를 주었다는 것이다.
학술연구용 자료만 줄 수 있다는 규정을 위반한 사고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2016년 8월부터는 "정책, 영리 목적으로 사용이 불가하다"는 이용서약서 조항을 삭제했다니, 규정 위반이 아니라 아예 작정하고 그러기로 했던 모양이다.
이 한 가지 일을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심평원이 민간보험사에 건강정보 빅데이터를 팔아넘겨 보험사 이윤창출의 조력자 역할을 하고, 국민의 건강정보 보호에 대한 책임을 방기"했다는 시민단체의 비판이 옳다.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그리고 이 일이 전부인가 하는 점이다. 원인이 구조적이면, 비슷한 일은 이번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고 심평원만 이런 것도 아닐 터. 결론부터 말하면, 심평원이 혼자서 뜬금없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배후는 심평원의 감독기관인 보건복지부를 훌쩍 넘는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운동 등을 통해 가입자의 건강 상태가 좋아진 만큼 보험료 할인 등의 혜택을 주는 건강 증진 보험상품 설계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 보험사는 가입자가 건강관리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주기적으로 측정하고 이를 검증해 정해진 기준을 충족하면 보험사는 약속한 혜택을 줄 수 있다. (…) 가입자가 실제 이런 노력을 했는지, 그리고 이 노력으로 건강이 좋아졌는지는 스마트워치와 같은 웨어러블(wearable) 기기 또는 가입자가 제출한 신체검사 결과 등을 통해 확인한다." (☞관련 기사 : 하루 1만보씩 걸으면 보험료 덜 낸다)
바로 며칠 전 발표한 정부 방침이다. 민간보험사가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축적하는 것으로 치면, 심평원 진료정보는 그야말로 ‘새 발의 피’ 수준이다. 웨어러블까지 동원하겠다니, 치료 정보가 아니라 걷고 먹고 담배 피우는 것까지 고스란히 노출될 지경이다.
정부(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가 국민들이 내는 민간보험료가 너무 많다고 마음이 아파 이랬을까? 그럴 리 없다. 한 경제 신문 기사가 정부의 본심이 누구의 무슨 이해를 대변하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관련 기사 : 하루 1만보씩 걸으면 보험료 덜 낸다).
"일찌감치 헬스케어 보험서비스가 활성화된 해외 시장을 따라잡으려면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다. 한 생명보험사 관계자는 '의료계 반발을 누그러뜨리고 의료법을 고쳐 보험사가 할 수 있는 헬스케어 서비스 범위를 넓히는 보완책이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일의 본질에서는 심평원과 금융위원회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사실 개인정보와 진료정보로 '돈벌이'를 하겠다는 발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언뜻 보면 민간보다 정부가 더 적극적이었으니, 뭐라도 하라고 압박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제4차 산업혁명, 차세대 성장 동력, 창조경제,…. 명분과 이유는 다양하다.
"건강보험 빅데이터 활용한 창업 아이디어 공모전" (2017년 2월, ☞바로 가기)
"방대한 보건의료 빅데이터 공개 신약 개발, 교육·창업 적극 지원" (2017년 6월, ☞바로 가기)
"새정부 출범, 빅데이터 산업 활성화 체계적 추진 - 통계청·과기정통부·행안부 민관 합동 빅데이터 TF 제3차 회의 개최" (2017년 8월, ☞바로 가기)
계속 등장하는 빅데이터는 최근 두드러진 유행에 불과하다. 돈이 되는 것이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면, 무엇이라도 상품으로 만들고 팔 작정을 한 지 오래되었다. 여느 사람들이 경제와 성장을 내재화하고 있으니 국가는 한편 따르고 한편 부추긴다. 정부가 달라졌다고, 정당이 다르다고, '성장 물신주의'를 신봉하는 정도가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다. 때만 되면 되살아나니 행정부와 관료가 청부를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관련 기사 : 국민의당 - 바른정당 규제철폐 손 잡는다).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지난 17일 '전국 14개 시도별 전략산업과 혁신기술을 키우기 위해 규제프리존법을 하루빨리 통과시켜야 하며 서비스발전법을 도입해 서비스 분야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 더불어민주당도 이 점을 인식하고 정권 출범 후부터 규제프리존법과 서비스발전법을 전향적으로 보고 있다. (…) 민주당 원내지도부가 '수정안'을 추진할 것을 천명한 만큼 보건의료 부문을 제외한 법안이 추진될 가능성도 있다."
돈벌이를 위해 건강과 안전, 환경을 내팽개치는 것으로는 개인정보 유출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지방과 지역의 경제를 위해 그런다지만,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근거도 희박하다. 그 많던 '경제자유구역'은 다 어떻게 하고 또 규제프리존인가? 다음에는 또 무슨 창의적인 말을 들고나올 것인가?
우리도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경제가 좋아지며 삶의 질이 더 나아지기를 희망한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비롯한 과학과 기술은, 그리고 경제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물적 토대다. 원시와 전근대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니 그래서 더 중요하다. 경제는 사람과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어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금 가난과 결핍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삶이 좋아지는 것이어야 가치가 있다.
지금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성장의 논리는 어떤가? 의료계에서는 '왓슨'을 비롯한 인공지능(AI)이 대유행이라지만, 그것이 환자에게, 그들의 고통을 줄이는 데에, 더 많은 환자가 진보한 의학기술의 혜택을 누리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일언반구도 없다. '부가가치' '해외시장' '성공' '상용화' '벤처'가 앞설 뿐이다(☞관련 기사 : 인공지능에 쏠리는 대형병원들의 시선). 누구를 위한 과학기술이고 경제성장인가?
국가와 정부가 '모든 것의 시장화·경제화·상업화'를 선도하는 것이 이 시대의 암울한 특징이다. 제4차 산업혁명을 앞세워 공공 빅데이터 '시장'을 만들려는 것은 최근 드러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보건 분야만 하더라도 신약 개발, 임상시험, 인공지능, 의료관광, 정밀의료 등 정부가 앞장서 끊이지 않고 시장을 창출하고 개척하며 확장한다. 다시 말하지만, 시장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지며 확대된다. 그 주체는 민간이 아니라 국가다!
새삼스럽다. 모든 것을 시장화·경제화·상업화하면 일부는 부를 축적하겠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더 비싼 약과 기계를 쓰고, 더 비싼 진료비를 물며, 더 많은 민간보험에 가입해야 할지 모른다. 이젠 물릴 지경이 된 말, '불평등'은 더 심해질 것이다.
심평원의 '일탈'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면, 진료정보를 사고파는 것을 문제 삼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진료정보나 빅데이터만 그런 것이 아니며, 심평원이나 보건 관련 공기관의 범위도 훌쩍 넘어선다. 정말 문제 삼을 대상은? 모든 것을 시장화·경제화·상업화하는 국가와 정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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