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시골집 울타리 안에 100평 남짓 텃밭이 있던 터라 갖가지 잎채소, 열매채소는 물론 김장채소, 양념채소, 고춧가루, 기름 등도 거의 자급을 했다. 마을 앞 너른 논과 방죽을 지나 언덕을 넘으면 너 마지기 우리 논이 나왔다. 논둑에는 콩이 심어지고, 위 논과 아래 논 사이 밭에도 몇 가지 곡식이 심겼다. 여름 땡볕 콩밭 사이에서 자란 '콩밭 짓거리'는 연하고 시원한 열무김치가 되었다. 이런저런 농사짓는 어른들 곁에서 놀던 기억을 더듬어 나의 텃밭에도 이런저런 일들을 해보곤 한다.
주말농장 다섯 평 농사를 짓는 도시농부들은 직접 수확한 신선한 채소들로 풍성한 식탁을 차리는 행복감으로 한철을 보낸다. 쌈 채소 수확이 많은 때는 누구 말마따나 애벌레처럼 '초록색 응가'를 할 것만 같다. 식탁이 그린벨트가 되어간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있는 건 우리 식탁에서 가장 중요한 밥에 대한 것이다. 텃밭 농사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쌀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문득 떠오른 어릴 적 기억, 동네 앞 논과 방죽을 지나 언덕이 나오기 전 밭에 있던 벼의 모습. 우리 할머니 말씀으로는 '산두나락'이었다. 한 달에 한 번쯤 있던 제사나 명절 때 멥쌀과 섞어 떡을 했던 찹쌀이 되는 벼이다. 불투명한 하얀색에 길쭉한 모양의 쌀알이 기억난다. 이 찹쌀로만 시루떡을 찌면 찰기가 너무 과해 김이 오르기가 어려워 잘 익지 않기 때문에 멥쌀을 섞어 떡을 했었다. 찹쌀 특유의 끝 맛이 약간은 쌉싸름한 감이 남았던 것도 같다.
날이 가물면 잎이 배배 꼬이기도 했던 그 밭벼를 주말농장 2년 차 때 알음알음 씨앗을 구해 한 평 남짓 심어보았다. 밭벼였지만, 논벼 모내기해 놓은 것처럼 심겼던 모습을 떠올려 스무 알 정도씩 한 구멍에 넣어 심었다. 4월 곡우 날에 심어 풀을 한두 번 매었고, 10월 한로 즈음에 낫질을 해볼 수 있었다. 제법 실하게 알이 차 고개를 숙여 보기가 좋다. 메뚜기도 찾아와 벼 잎이랑 배춧잎도 맛나게 먹는다. 손바닥만 한 '벼 밭'이지만, 올 건 다 오나 보다. 벼 밭을 지나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밭에서도 벼가 자라냐?"며 신기해하고, 구부정한 허리에 머리 하얀 할아버지가 밭벼 씨앗 나눔을 예약하기도 한다. 텃밭에 놀러 온 어린이집 아이들은 황금색으로 익은 밭벼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홀태도 뭐도 필요 없이 나무때기로 이삭 하나씩 쓱쓱 훑어내기 몇 번으로 탈곡을 마칠 수 있는 양. 도정을 하려면 절구질을 해야 할 판이라 말려두고 여기저기 종자 나눔을 할 뿐 찰진 떡을 해 먹지는 못했으나, '나는 이런 것도 기른다'는 으쓱함이 있었고 길게 남은 볏짚으로 배추를 묶어주고 겨울 동안 마늘을 덮어줄 수 있었다.
'밥 한 그릇'의 아쉬움을 달래는 도시농부의 벼농사
겨울 농사로 밀과 보리를 짓고 밭벼를 짓고, 축제 이벤트를 위해 논 상자에 토종 벼 모내기를 하는 도시농사는 여전히 '밥 한 그릇'의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던 차에 다랑이 논 60평에 논농사 지을 기회가 왔다. 논농사를 배우고 함께 지을 동네 사람들을 모으니 열이 모였다. 농활에서 몇 번 논에 발 담가본 것이 논농사 경험의 전부인 '논 공동체'였다. 그나마 우리 논에서 아홉 식구 1년 식량이 나왔던 '자급농' 집안 출신인 내가 논가에서 놀던 가락이 있을 뿐이다. 실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농사짓는 어른들 옆에서 놀기만 한 기억으로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쉽다'며 1년에 다섯 번만 논에 가면 된다고 사람들을 꼬드겼다.
그래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토종 벼 종자 몇 알을 얻어와 공동체 농사를 지어 토종 벼 증식을 해오는 선배 도시농부의 논농사 과정을 함께한다는 전제가 있었던 것이다. 60여 종이 넘는 토종 쌀 나락을 하나하나 늘어놓고 종별로 섞이는 것을 주의하며, 낱알의 껍질을 벗겨 '속 쌀'의 모양과 색깔 등을 살펴보는 것으로 농사는 시작되었다. 우리말을 새롭게 배우는 듯 흥미로운 이름과 저마다의 특성, 역사를 배우며 소금물에 종자를 고르고, 더운물에 소독하는 일로 하루를 보내고, 진달래꽃 구경을 하며 다랑이 논에 규산질비료를 뿌려주었다.
우리는 집에 돌아가지만, 논 주인이자 종자 주인인 선배 농부는 농막에서 일주일 쪽잠을 자며 볍씨에 물 갈아주기를 매일 한다. 도깨비 뿔 같은 앙증맞은 볍씨의 '촉'이 나왔으니, 모판에 뿌릴 차례다. 논에 못자리를 만들어 싹 틔운 볍씨를 뿌리면 끝이었던 내 예전 기억과는 달리, 플라스틱 모판에 수도용 상토를 넣고 볍씨를 뿌린 후 논 못자리에 모판을 올리는 방식이다. 모를 고르게 키우려면, 모판에 앉혀지는 상토의 높이가 일정해야 한다. 몇 년의 경험을 가진 선배농부도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꽤나 걸리는 일이라 하여, 즉석에서 나무판자를 잘라 나름의 도구를 만들었다. 모판의 상토 높이를 '평등'하게 해주므로, 이름하여 '평등이'. 모판에 상토를 대략 여유 있게 채우고 '평등이'로 쓱싹 긁어주면 상토 높이가 일정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될 것을 몇 년을 어렵게 했다며 선배 농부도 쾌재를 부른다. 나름 뿌듯하여 어깨가 으쓱하는 순간이다.
'평등'하게 채워진 상토에 조심스레 물을 적시고 싹이 나온 볍씨를 고르게 뿌린다. 엄마가 시루떡에 고물을 고르게 얹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한 곳에 모여 배지도 않고 너무 듬성하지 않게 고루 뿌려진 볍씨를 이번에는 얇은 나무판자로 지그시 눌러준다. 이 판자의 이름은 '누름이'로 했다. 상토에 볍씨가 안정되게 자리 잡도록 도와주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상토를 살짝 뿌려준다. 그냥 두어도 알아서들 뿌리 내릴 테지만 한 번이라도 더 손길과 정성을 들이는 마음이 읽힌다. 모판 만드는 기계는 아니지만 모인 이들 모두 일사불란하게 손발을 움직이니 300개 가까운 모판이 만들어졌다.
써레질과 손모내기로 토종 벼를 심다
종류별로 모판에 이름을 쓰고 하우스 안에서 2~3일 안정을 취한 후 못자리로 옮겨 한 달 정도 키우면 논에 모를 낼 수 있다. 그동안 논을 갈고 물을 채우고 논바닥을 나란히 해놓아야 한다. 논 갈아줄 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계를 들이기도 뭐한 다랑이 논. 도시농부 열이서 찰진 논바닥을 인 쟁기로 삽으로 쇠스랑으로 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종일 물을 채워 고무래로 써레질을 하고 묵직한 각목으로 논바닥을 나란히 다듬었다. "한우, 먹으면 안 되겠다", "석유랑 기계는 꼭 필요한 것이여!", "진짜 다들 미쳤지…"라며 아우성이었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과정을 오롯이 우리의 힘으로 해내는 것에 대한 뿌듯함, '나, 이런 논농사도 지어 봤어'라는 자긍심이 이만큼 올라오는 얼굴들이다.(그래도 두 번은 안 한다고….)
드디어 모내기 날. 잔디를 키우던 모래를 산더미만큼 퍼내고 새로 만든 2000평 선배 농부의 논에 토종 벼 손모내기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토종 벼 이름이 쓰인 깃발도 준비한다. 모내는 법을 배우고 모춤을 별러주는 모쟁이, 못줄을 대주는 줄잡이 등 역할을 정해 논으로 들어간다. 처음 논으로 만든 곳이라 역시나 딱딱하고 거친 논에 손끝이 얼얼하도록 모를 꽂는다. 그에 비하면 우리 다랑이 논은 정말 복 받은 논이다. 찰지고 보드라운 흙 안으로 살포시 꽂히는 모가 예쁘게도 줄을 섰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모를 심어보는 누구도 식은 죽 먹기로 10분 만에 60평 모내기를 마칠 만큼 다랑이 논의 흙은 고왔다.
그렇게 모내기를 마치고 논에서 가장 가까운 멤버가 때때로 논에 물을 대고 시기에 맞춰 쌀겨로 거름을 주고, 논바닥을 긁어 풀을 뽑고, 낫으로 논둑의 풀을 베었다. 이른 아침 만난 벼꽃을 보고 반가워도 하고 색색으로 익어가는 벼를 보며 제법 잘 되었다고 기뻐도 한다. 작은 다랑이 논에 여섯 종의 토종 벼만으로도 그 풍광은 좋아 보였다. 하물며 우리 논에서 내려다보이는 2천 평 새 논에 출렁이는 토종 벼 60여 종의 물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멋졌다. 이 새 논도 수년이 지나면 흙이 고와지고 고와져 보드라운 논흙으로 거듭나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밭과 도시로 바뀌며 사라져가는 황금빛 논
우리 다랑이 논의 벼들을 수확 시기에 맞춰 두 차례 낫으로 벼 베기를 했다. 묶어세워놓은 볏단이 참 예쁘다고도 하고, 논바닥에 떨어진 낟알을 주우며 "쌀 한 톨도 버리면 안 되겠다" 고도 한다. 그러고 "다시는 논농사 안 짓는다"는 말도 덧붙이며 웃는다. 종류별로 말려놓은 볏단을 풀어 홀태로 훑어 말리고, 손으로 까락을 비벼내고, 바람으로 알곡을 걸러내어 도정기에 넣어 쏟아지는 '우리가 지은 쌀'을 드디어 한 봉지 얻었다. 고이고이 밥을 지어먹으니, 이는 세상에 없는 밥맛이란다. 1년 논농사를 돌아보며 함께 지어먹은 울긋불긋한 토종현미밥은 입안 가득 고소함과 단맛을 선사한다. 다른 사람은 순 '뻥'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참말로 맛난 '밥 한 그릇'을 맛보았다.(그래도 다시는 논농사 안 한단다.)
정말로 논농사는 다시 안 할 줄 알았다. 그래도 봄이 되니, 다시 하기로 한다. 이번엔 논 가느라 소가 되지 않으려 겨울 동안 논농사 짓는 농부님들을 만났다. 6만 평 파주 논농사 단지에서 농사짓는 한 영농법인 농부님들의 논 200평에 토종 벼를 심어보겠노라고, 그리고 도시 사람들이 '우리 논'이라고 할 만큼의 논에서 수확한 쌀을 먹어보겠노라고 제안했다. 도시농부와 전업농부가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채고 일을 도모했다. 25개 토종 모판을 만들어 광활한 농부님들의 못자리 한쪽에 슬쩍 밀어 넣으려 했건만 전용 못자리 하우스를 만들어 주시고는 우리보다 더 신경을 많이 써주시는 고마움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모낼 논을 마련하고, 농사짓다 쉴 수 있는 그늘이 되라고 수세미, 조롱박도 심어 주셨다. 도시농부학교 수강생들과 200평 논에 채 한 시간도 안 걸려 모내기를 마쳤다. 우리가 심은 토종 벼 중 파주에서 길렀다는 '가위찰'이라는 벼가 있다 하니 농부님도 신기해하신다. 갯벌 같은 논에 앉아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도 마냥 신났었다.
탁 트인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초록의 논가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초록색 벼들 사이로 청개구리가 뛰고 머리 하얀 백로, 하늘을 날아가는 왜가리, 논에서 운다는 뜸부기도 사는 곳에서 우리가 먹을 쌀을 짓고 있다. 논바닥의 풀을 긁고 쌀겨를 뿌리고 논둑의 풀을 낫으로 베며, 전희식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꽃 중에 가장 예쁜 꽃, 밥꽃(벼꽃)을 지금 직접 본다. 초록이 투명한 아기 메뚜기들이 벼 사이에서 뛰놀고 잠자리들이 논 옆의 밭과 논을 넘나들며 날아다닌다. 이제 곧 가을바람과 함께 농부들의 황금 들녘이 출렁일 게다. 그 가운데 보일 듯 말 듯 한 도시농부들의 토종 벼에도 작은 일렁임이 있을 게다. 그 일렁임이 도시 사람과 농부들의 마음에도 전해져 황금 들녘이 더 많이 알록달록해지기를 기대해본다. 한편으로는 점차 밭으로 도시로 변해가는 논을 생각하면 마음 한가운데가 저려오는 아픔이 느껴진다. 우리 식구 1년 먹을 쌀을 짓는 논을 오래도록 남기는 일에 이제는 도시 사람이 애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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