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옷 입은 남자 없는 교과서, 성 역할 고착화한다"

[격월간 민들레] 자기답게 살아가는 힘, 젠더 교육

성 인지적 관점에서 보는 교과서

제가 교실에서 아이들과 성평등 수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작년에 있었던 강남역 살인 사건이었습니다. 그전에도 한국사회에서 여자들이 죽고, 다치는 사건은 많았지만, 이 사건이 제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건 오로지 '여자라서' 당한 일이었다는 거였죠. 성별 자체를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럼 여성으로서 나는,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싶었죠. 그러려면 사회를 바꿔야 하고 환경을 바꿔야 하니까 인터넷 커뮤니티 '인디스쿨'에 성평등 수업 연구를 같이할 교사를 모집한다고 글을 올렸어요. 그랬더니, 댓글이 백몇 개가 달린 겁니다. 깜짝 놀랐죠. 성평등 수업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교사도 있었고, 요즘 세상에 무슨 성차별이 있다고 그러느냐 하는 반응도 있었어요. 필요성에 동의하는 몇 명이 모여 '초등성평등연구회'를 만들었고, 지금은 열두 명의 교사가 수업 개발도 하고 적용도 해보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나누었던 몇 가지 사례들을 일상에서도 해보실 수 있게 소개해드리고, 성교육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습니다.

저는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을 가지고 아이들과 성평등 수업을 합니다. 아주 재미있어해요. 이 그림에서 성별을 한 번 구분해보겠습니다.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일까요? 옷을 벗겨보진 않았지만 우리는 머리 모양, 옷, 신발, 이런 것들을 통해 성별을 판단해요. '성기 모양이 다르고 유전자적으로 뭐가 다르다' 하는 생물학적 특성들도 있지만, 여자 혹은 남자는 이러저러한 모습이라고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약속된 것이 있죠. 조금 어려운 말로 '사회적인 성'이라고 하는데요. 그게 바로 '젠더(gender)'입니다.

그런데 젠더라는 게 사실 고정된 개념은 아니에요. 중세시대 사람들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면, 치마 입은 아이가 여자라고 딱 대답을 못 했을 거예요. 그 시대에는 남자도 치마를 입었고, 여자가 다리를 내놓고 다니면 안 되는 문화가 있었잖아요. 중세 이전에는 분홍색이 붉은 피, 용기를 상징하는 남자의 색이라는 인식도 있었죠. 이처럼 젠더라는 것은 사회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계속 바뀔 수 있는 개념입니다.

ⓒgoogle.com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를 보면 여자, 남자 두 아이가 미로를 따라가면서 감도 따고 도토리도 줍고 하는 그림이 나옵니다. 이 그림을 '성 인지적 관점'으로 다시 살펴볼까요?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평등을 겪지 않도록 유불리를 따져보는 걸 성 인지적 관점이라고 하는데요. 이 관점으로 보면, 남자아이는 열매 줍기에 적절한 바구니를 들고 있는데 여자아이는 핸드백을 들고 있어요. 모험을 떠나는데, 구두 신고 치마 입고 있고요.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교과서에서도 이런 옷차림이 나오니 아이들은 모방을 합니다. 특히 1, 2학년 때는 무언가를 마구 흡수하는 시기라서 교과서에 나온 거면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교과서는 아이들에게 굉장한 권위를 가진 책이에요.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교과서에 나오는 여자아이들은 모두 다 머리에 뭔가를 하나씩 달고 있어요. 실제로는 머리가 짧은 여자아이도 있잖아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아기용 헤어밴드(머리띠)예요. 아기는 헤어도 없는데, 왜 헤어밴드를 해야 하냐고 했더니 제 친구가 말하기를 "남자애인 줄 알면 기분 나쁘잖아" 하더라고요. 여자아이를 남자아이인 줄 알면 왜 기분이 나쁜가요?

여자들은 안경에 대한 고정관념도 있어요. 한 여자아이가 눈이 나쁜데도 안경을 안 쓰는 거예요. 알고 보니, 아빠가 아이한테 "에이, 여자애는 안경 쓰면 미모 망치는데" 하고 툭 던진 거예요. 제가 여쭤보니, 아빠는 기억도 못 하는데 아이는 마음 깊이 담아둔 거죠. 교사들도 마찬가지예요. 평소에는 머리 묶고 안경 쓰고 지내다가 학부모 공개 수업할 때는 갑자기 하이힐 신고 원피스 입고 안경 벗고 렌즈를 낀단 말이죠. 그러면 아이 입장에서는 안경을 쓰는 여성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죠. 선생님도 중요한 자리에서는 안경을 벗고, 텔레비전에서도 안경 낀 여자는 잘 안 나오니까요. 물론 교과서에서도 안경 쓴 여자아이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좋아하는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예요. <뽀로로>, <타요>, <로보카 폴리>, <코코몽>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면 주인공이 전부 남자예요. 색깔도 한번 보세요. '뽀로로'도 파랑, '폴리'도 파랑이고, 주인공 친구로 나오는 여자 캐릭터들은 주로 연분홍, 노랑, 보라예요. 아무리 교과서를 뒤져봐도 분홍색 옷을 입은 남자는 없어요. 물론 어찌 보면, 이런 건 작은 부분이지만 아이가 살아가면서 다양한 색을 좋아할 수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요? 더 넓은 세상을 만나는 거잖아요. 저는 보호자가, 나라가, 공교육이 해야 하는 역할이 아이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교과서가 성역할을 고착화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는 걸 알 수 있죠.

저는 이따금 아이들하고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동화책을 꺼내 주인공 성별만 확인하고 집어넣는 놀이를 해요. 예전에 조카와 서점에서 이 놀이를 했는데, 80권 가까운 책 중에 여자 주인공이 16명이었어요. 그나마 16명이 나올 수 있었던 건 그 당시 한창 <겨울왕국>이 유행해서 엘사 시리즈물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주인공이 되어 스토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은 남자들만 해요. 감정 이입이란 건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능력이죠. 근데 남자아이들 경우에는 (여자 주인공을 쉽게 접할 수 없으니까) 이입을 연습해보려고 해도 모델이 없는 거예요.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이끄는 이야기를 즐길 수 없는 아이로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학교에서 많은 아이들을 만나면서 제가 느낀 것은, 타고나는 성차도 있겠지만 성에 대한 역할이나 고정관념은 많은 부분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을 익히기까지

초등성평등연구회에서 초등학교 2학년 120명을 대상으로 몇 가지 설문조사를 했는데요. '남자가 자꾸 울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질문에 대해서도 많은 여자 친구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1, 2학년 때 남자애들이 여자애들한테 꽤 많이 맞아요. 그 시기엔 여자애들 발육이 더 빠르거든요. 달리기에서도 여자애들이 이기는 경우도 많고요. 그런데 남자아이가 여자애한테 맞아도 말을 못 해요.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남자는 맞으면 안 된다, 부끄러운 거다.' 아들이 여자애한테 맞고 왔다고 말하면 부모들은 뭐라고 합니까. "너 태권도 배워야겠다"라고 해요. 태권도라도 배워서 더 남자다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딸이 맞고 왔다고 "태권도 배워라. 주짓수 배워라" 하는 부모님이 계실까요?

운동을 잘하고 신체적인 능력이 뛰어난 여자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놀림감이 됩니다. 초등학교 5학년들이 발야구를 하는데, 몇몇 여자애들이 남자애들보다 잘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남자애들이 "아, 형님!" 하면서 놀립니다. 어떤 여자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만, 어떤 아이는 움츠러들어서 다음부터 공차는 걸 제대로 안 해요. 제가 성평등 교육을 하면서 기대하는 게 있었습니다. 이건 자기 표현하고도 관련이 있는데요. 시대가 바뀌었다지만, 여자아이들이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면 '나대는' '여성스럽지 못한' 이미지가 분명히 있거든요. 여자아이들이 조금 더 나대길 바라면서 일부러 제가 먼저 오버를 많이 해요. '윤도현밴드'의 <나는 나비> 같은 노래를 부를 때 제가 머리를 흔들고 기타 치는 시늉하면 남자애들이 나와서 드럼 치는 흉내도 내고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학기 초에는 여자아이들은 아무도 나오지 않다가 학기 말이 되니까 조금씩 몸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굉장히 기뻤죠. 야생마처럼 활달한 게 어린이들의 본질인데, 그걸 사실 억누르면서 지내왔던 거죠. 여자, 남자 양쪽이 모두 활발해지는 바람에 제가 교실에서 더 힘들어지긴 했지만 기쁜 경험이었죠.

저는 교사지만 아이들과 한 공동체에 속해 있는 여성이기도 하잖아요. 이전에는 외모 평가를 끊임없이 당했어요. "선생님, 오늘 머리 예뻐요." "립스틱 색깔이 예뻐요." 끝없이 상대의 외모를 평가하는 무의식적인 말들이 어떤 의미인지 아이들과 얘기 나눠 보면, 그런 경험 때문에 아이들도 불편했던 적이 분명히 있거든요. 자매 중에 누구는 예쁘다고 칭찬을 들었는데, 옆에 있는 자기는 불편했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외모 평가는 불편한 거라는 걸 인식하고 나니까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그다음부터는 학급에서 제가 어떻게 입고 다니든, 다리털을 내놓고 다니든, 노브라로 다니든 아무도 그런 얘기를 안 하는 거예요. 그게 되게 좋더라고요.

이런 수업을 꾸준히 하다 보면, 아이들 사이에 변화가 관찰됩니다. 일단 남학생, 여학생들이 나눠서 놀지 않아요. 아이들 머릿속에는 남자 놀이, 여자 놀이가 은연중에 구분이 되어 있던 모양인데, 통념적인 압박도 있었을 거라고 봐요. 제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분명, 경찰 놀이하는 남자아이들 사이에 끼고 싶다고 낄 수 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개인 취향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통념에 얽매여서 그런 거죠. 그런데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학급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인 교사가 계속 이야기를 하니까 구분이 좀 덜해진 게 있지 않나 생각해요.

최근 서울시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여학생들의 신체활동 지원 프로그램이 있어요. 여학생들 대상으로 스포츠팀을 멘토링한다고 해요. 일부러라도 여자아이들의 동기를 끌어내고, 반대로 남자아이들한테 감수성적인 부분을 많이 끌어내 주자는 거죠. 보호자들도 가정에서 이 균형을 맞춰주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자아이들의 남자다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저는 '군대 이야기'로 경험했어요. 3학년쯤 되면 남자아이들이 군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요. 3학년부터 진로 관련 내용을 배우면서, 10년 뒤의 자신에게 편지 쓰기를 해요. 3학년이면 10살이잖아요. 10년 뒤면 20살이에요. 한 아이가 "쌤, 10년 뒤면 나 군대 가야 하는데요. 그럼 군인 아저씨한테 편지 써요?" 하는 겁니다. 제가 군대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줬더니, 남자아이들이 무서워했습니다. 처음 보는 반응이었죠. "군대 가면 총을 들어야 해요? 폭탄을 진짜 던져야 해요? 폭탄 던졌는데 다람쥐 있으면 어떡해요?" 그런 걸 걱정하더라고요. 그러던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면 군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집니다. 남자라면 가야 하는 곳이라며 '사나이', '의리' 이런 말을 하죠.

남자다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사실은 학교와 보호자, 그리고 미디어가 하는 역할이 굉장히 크다는 걸 느꼈습니다. 영화도 그렇고, 교과서에도 전쟁사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전쟁사에서 영웅으로 다뤄지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두려움 없이 죽는 존재들입니다. 그게 남자인 거죠. 그래서 아이들은 '군대를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평화교육이라는 게, 거창해 보이지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쟁이 끔찍한 것이라는 사실, 전쟁을 두려워하는 건 건강한 일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많이 바뀝니다. 고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저는 '군인권센터'에 가요. 진정한 남자가 되려고 군대 가서 힘들어도 버텨야 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건 항의하고 바꿔나가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려주면서 제도가 잘못됐으면, 순응만 하지 말고 고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는 이야기들을 해줍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이 용기를 얻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이런 걸 전혀 모르고 자라난다면, '두려움을 들키는 게 두려워서 숨기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을까요? 살다 보면 무겁고 불행한 일도 얼마나 많아요. 아이들한테 이걸 두려워해도 된다는 걸 알려주고, 두려울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연결해서 알려주는 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고나는 성이란 것이 정말 있느냐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이 해야 할 일이에요. 제가 질문하고 싶은 건 성차(性差)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대체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거죠.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을까

초등성평등연구회에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밤늦게 돌아다니면 여자는 남자보다 위험하다'는 질문에 남녀 대부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밤늦게 돌아다녀서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피해자한테 책임을 묻는 겁니다. 제가 "어떤 여자아이가 밤에 혼자 길을 가다가 안 좋은 일을 당했다면 누구의 잘못이냐?"고 물었다가 아이들의 답을 듣고 당황했습니다. 전원이 "여자아이 잘못"이라고 했어요. "왜냐?"고 물어봤더니, 아마도 어른들이 아이들 귀에 못이 박이도록 했을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를 안 했어요." "밤늦게 다니면 안 되잖아요." "친구랑 같이 다녔어야 했는데 혼자 다닌 게 잘못이에요." "왜 위험한 골목길로 갔대요?" "편의점에 숨어야 되는데 안 숨었어요"라고 얘기하더라고요. 아이들은 확고했습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 안 했어. 그러니까 여자 잘못이야.'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폭행은 막을 수 없습니다. 피해자가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오직 가해자가 사라져야만 막을 수가 있어요. 받아들이기 싫지만, 이게 진실입니다. 그러면 사실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내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인 거죠.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가르쳐야 할 건 피해자한테 '이거 지켜, 저거 지켜'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피해를 당한 아이들에게 많이 생기는 일인데요. 가해자가 그저 가해만 하지 않습니다. 피해 아이에게 "너 어두운 밤에 혼자 다니다 나한테 끌려온 거 알지?"라는 협박을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도 생각하죠. '나는 아빠 엄마가 말한 이거 다 지켰나?' 스스로를 검열합니다. 괜히 이런 일 당했다고 말했다가 "왜 어두운 밤에 혼자 돌아다녀! 그러게 미니스커트 절대 입지 말라고 했지!" 이런 얘기 들을 것을 걱정합니다. 대체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게 뭘까요? 우리가 제일 먼저 가르쳤어야 했던 건 성폭행은 바로 가해자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다는 사실인데, 정작 그걸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중요한 건 사건이 벌어졌을 때 아이가 이런 말을 해도 혼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이게 누구 잘못인지를 알아야 하죠.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아이들은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유모차 끌고 가다 보면 아기가 귀여우니까 사람들이 예쁘다고 쓰다듬고 하잖아요. 아이가 아직 어리고 말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싫을 수 있거든요. 아이가 자기 몸에 대해 존중받아본 경험이 별로 없는데, 낯설고 무섭고 협박당하는 상황에서 의사를 존중해달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건 편안한 상황에서 많이 연습해야 위급할 때도 나올 수 있는 겁니다. 내 몸에 대한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고, 그걸 침해하려는 사람이 이상한 거라는 얘기를 듣고, 어른의 말에 반하는 표현을 했을 때도 그것을 인정받는 경험. 외국 같은 경우에는 이미 이런 식으로 수업을 하고 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한국의 성교육은 내 몸에 대한 의사 표현보다는 일단 '섹스를 하지 않는다'를 기본 전제로 하고 가르칩니다. 외국에서는 섹스 잘하는 방법을 공교육에서 가르쳐줘야 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에요. 독일 같은 경우는 아예 체위를 가르치기도 해요. 첫 경험을 상상해보는 수업도 하고요. 남녀의 첫 성관계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이 많이 삐뚤어져 있어요. 남자애들 같은 경우에는 지배, 정복이라고 생각하고, 여자애들은 뭔가 빼앗기고 약탈당했다고 생각하죠. 성이라는 게 빼앗기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학교에서 이야기해줘야 해요. 아이들의 첫 성관계 연령은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는데 해서는 안 된다고만 가르치면, 아이들 입장에서는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집니다.

▲ 성 인지적 관점으로 교과서 그림을 살펴보는 강연 참가자들. ⓒ민들레

아이의 첫 경험을 상상하세요

또한 '가해자가 되지 않기'를 가르치는 것도 핵심적인 교육 중 하나입니다. 성범죄를 저지르는 건 무섭고 끔찍한 정신병자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성범죄, 성폭력, 성희롱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아주 평범한 사람들 아닙니까? 아이들 사이에서 '이놈' '저놈'은 친구들끼리도 쓸 수 있고, 교사들도 쓸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이년' '저년'은 얘기가 달라지죠. 누구를 여자로 부르는 거 자체가 굉장히 낮춰 부르는 게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의식하고 쓰는 말은 아니에요. 그럼 그걸 누군가는 의식적으로 계속 질문을 해줘야 하는 거죠. 그런 역할을 공교육에서 해줘야 하는데 현재로선 미미하죠. '악플'에 대응하는 '선플 달기 운동' 같은 뒤떨어진 교육을 하고 있잖아요.

아이가 야한 동영상(야동)이나 음란물 등에 빠져 있다고 걱정하시는 보호자들도 많으시죠. 대체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싶으실 거예요. 그런데 아이가 성적인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면 사실 그럴 수 있는 일이거든요. 섹스에 관심 가질 나이잖아요. 그걸 인정하는 게 시작인 거 같아요. 그다음으로는, 사실 보호자도 공부해야 할 게 많을 거예요. 피임 등 구체적으로 공부해본 적 별로 없잖아요. 걱정만 하실 게 아니라, 아이의 첫 경험을 먼저 상상해보는 것도 중요한 거 같아요. 언젠간 아이가 처음으로 성관계를 하는 날이 올 거잖아요? 좀 껄끄럽겠지만, 그날이 어떤 풍경이었으면 좋겠는지 한번 생각해보는 게 필요한 거 같아요.

아이의 첫 경험이 음침한 모텔이나 노래방 같은 곳이기를 바라는 분은 없을 거예요. 안전하고 깨끗한 집에서, 피임 도구도 잘 갖추고 야동에서 본 대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지고 서로 다치지 않게, 몸과 마음이 모두 즐거운 상태이기를 다들 바라시겠죠. 물론 그게 성인 이후이길 대부분 바라시겠지만, 사실 보호자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죠. 그렇게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어떤 부분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거예요.

아이들 성 문제로 걱정이 많지만, 제대로 된 성교육을 공교육에서 꼭 해야 합니다. 교사 양성 과정에도 여성학이 기본적으로 포함되고, 제가 따로 연구하지 않아도 제대로 된 성교육이 교육과정 안에 적절하게 들어와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성과 평등에 대해 배우며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윗글은 지난 9월 20일 <격월간 민들레>와 '하자센터'가 공동 주최한 강의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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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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