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격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그녀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그러나 그 어떤 '페미'보다 여성의 역할 증진에 크게 공헌했다. 유럽의 최강대국 독일의 첫 번째 여성총리가 되었다. 전후 최연소 총리이기도 했다. 4연임에 성공함으로써 최장수 총리까지 등극했다. 2015년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그녀를 선정했다. 근 30년 만의 여성이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앙겔라 메르켈이다. 21세기 첫 4반세기, 가장 빛나는 여성임에 틀림없다.
정치 입문은 1990년이었다. 통일독일의 첫 여성/청년부 장관에 발탁되었다. 1954년생, 서른 여섯이었다. 만사가 호락하지 않았다. 매사가 녹록치 않았다.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서독으로의 흡수통일, 서구식 민주주의에 적응해야했다. 정치판은 압도적으로 남성 천하였다. 게르만의 건장한 장골들이 즐비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인들이 각광받았다. 정치경험이 일천한 그녀가 자신들을 제치고 장관직에 오른 것에 입이 산만큼 튀어나왔다. 마흔도 안 된 여자가 심지어 이혼녀 주제에 아이도 키워보지 못했으면서 여성/청년부가 가당키나 하냐며 뒷담화가 작렬했다. 헬무트 콜 총리의 총애를 시샘하고 질투하는 '콜의 여자'(Kohl's Girl)라는 별명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얼핏 '콜걸'을 연상시키는 고약한 작법이다.
언론 또한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여성 정치인은 유독 외모를 중시했다. 그러나 돌연 등장한 메르켈은 좀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았다. 패선에는 통 문외한이었다. 차림은 소박했고 품행은 소탈했다. 미용실이 아니라 이발소에서 싹둑 깎고 나온 듯 헤어스타일에 수군수군 거렸다. 화장기는 없고 립스틱도 바른 듯 마는 둥, 벙벙한 바지에 뭉툭한 단화를 신고 다녔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구서독 정치인들은 이 괴팍한 동독 촌년의 출현에 혀를 끌끌 찼다. 카메라 기자들은 원숭이 보듯 신기하게 포커스를 맞추었다. 메르켈은 정치면보다는 가십거리로 더 널리 회자되었다. 어지간하긴 했던 모양이다. 콜 총리도 외국 정상들과의 회담만큼은 본인의 부인과 비서를 통하여 메르켈의 치장을 맡겼다고 한다. 메르켈이 제 옷을 입고 나오지 못하도록 신신당부를 한 것이다. 외국 언론까지도 회담 내용이 아니라 메르켈의 외양에 초점을 두게 만들 수는 없었던 노릇이다.
그러나 일만큼은 착실하게 배워갔다. 8년간 묵묵히 행정부에서 실력을 닦은 그녀는 1998년 기민당 사무총장에 등극한다. 독일의 '강남좌파' 슈뢰더가 이끄는 사민당 정권에 맞서 야당 지도자로 부상했다. 2000년 당수 자리를 거머쥐고, 2005년 총리 자리에 오른다. 허나 총리가 되어서도 뒷말이 많았다. 여성 총리를 사시 눈으로 꼬아 보았다. 비전이 부족하네, 카리스마가 없네, 리더십이 모자라네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다른 비전과 다른 카리스마와 다른 리더십을 '기레기'들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남성적인 여성, '철의 여인' 대처처럼 대차지 않았다. '슈퍼우먼' 힐러리처럼 허세로 화려하지도 않았다. 누구처럼 치장에만 골몰한 것도 아니다. 제 자리에서 제 시간에 주어진 일을 제대로 수행해 나갔을 뿐이다. 자신을 도드라지게 하는데 관심이 적었다. 여성임을 표 나게 앞세우지도 않았다. 적대적 정치로 각을 세우기보다는 포용적 정치로 원을 그렸다. 연달아 소연정과 대연정을 이룸으로써 그녀를 껌처럼 씹던 세력들이 도리어 소수파로 궁지에 몰렸다.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연합뉴스
메르켈의 리더십이 가장 돋보이는 지점은 동/서 여성의 화해를 일군데 있다. 애당초 서독 여성들도 메르켈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68혁명의 세례를 받은 페미니스트들은 탈국가주의, 탈민족주의로 내달렸다. 기성의 정치를 전면 부정했다. 국가는 곧 가부장제의 총화였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사적 영역을 정치의 최전선으로 삼았다. 국가도 민족도 가족도 여성의 적이라고 했다. 국가로부터 독립하고 가족으로부터 자립하라고 했다. 그렇다고 국경을 초월한 자매애를 발휘한 것도 아니다. 동독 여성들을 따뜻하게 포옹해주지 않았다. 도리어 냉담했다. 의붓자매처럼 대했다. 자꾸 가르치려 들었다. 의식이 떨어지고 수준이 모자라고 스타일이 촌스러운 '제3세계' 여성 대하듯 했다. '가부장적 국가'의 복지정책에 의존하여 살아온 동독 여성들의 타성을 나무라고 훈계했다. 동독 여성들은 억울했다. 순식간에 통일이 됨으로써 국가로부터 제공되던 고용과 혜택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사는 게 더욱 곤궁해졌다. 박탈감이 몹시 컸다. 나이도 젊고 교육 수준이 높은 동독 여성도 서독에 가면 무시 받기 일쑤였다. 단순 일용직을 전전하거나 서독의 농촌 노총각들과 결혼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무엇보다 서독 여성들과의 시각차, 감수성 차이가 서러움을 배가시켰다. 모성에 대하여, 정체성의 정치에 대하여, 국가의 보조에 대하여 딴 소리를 했다. 남성들보다 더 아득한 벽을 느꼈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동/서독 여성들 사이에는 감정의 담벼락이 솟아났다.
메르켈은 '동독을 고향으로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대개 딱 그 문장까지만 인용한다. 그러나 그 다음 진술도 중요하다. '그럼에도 동독이 부여해주는 혜택이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동독을 일방으로 깐 것이 아니다. 그녀는 동독에서 촉망받는 물리학자였다. 서독보다 동독에서 여성 과학자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동독 여성들은 매우 진취적이었다. 9할이나 직장을 다녔다. 서독과는 달리 전업주부가 매우 드물었다. 사회주의적 남녀평등 정책의 소산이다. 자연스레 고용 증대와 출산 증가를 위한 여성 친화적 정책이 발달했다. 동독 여성은 평균 19~23세 사이 처음 출산했다. 30대가 되기 전에 둘째를 낳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9할이 엄마가 되었다. 반면 서독은 68혁명 이래 결혼 비율이 6할 이하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만혼이 많아졌다. 응당 아이도 적게 낳았다. 여성과 모성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모성에서 해방된 여성이 늘어났다.
메르켈은 서독화가 만능이 아니라고 여겼다. 동독화를 추진한다. 가정과 직장의 조화를 꾀했다. 직장에서도 성공하고 아내이자 엄마로서도 만족해야 여성의 삶도 행복하다. 개인적 성취와 가족의 화목이 물과 기름이 아닐 것이다. 육아와 탁아를 공진화시킨다. 아이를 가족에게만 맡겨두지 않는다. 마을과 사회와 기업과 국가가 함께 키운다. 상징적인 조치가 2013년 최초의 여성 국방부 장관 임명이었다. 폰데어라이엔(Ursula von der Leyen)은 의사 출신으로 7남매의 엄마였다. 그녀가 진두지휘하는 국방개혁 아래 군대에도 보육원이 설치되었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육아를 병행하여 가정도 지키는 획기적인 방안을 강구한 것이다. 군부와 군대마저 가족친화적인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군인도 인간으로서 대우해주고 있는 것이다. 구동독 여성들에게는 왕년의 혜택을 되돌려 준 셈이다. 구서독 여성들에게는 통일이 선사하는 수혜를 제공해준 것이다. 메르켈 집권 아래 다방면으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더욱 활발해졌다. 국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여성들의 행복한 삶을 보조해주는 것이다. 이런 실질적인 성과를 거둠으로써 동/서 여성 간 마음의 분단체제도 녹아나고 있다. 메르켈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페미니스트들도 더 이상 빽빽거리고 땍땍거리지 않는다. 날카롭고 뾰족하기보다는 끌어안고 품어낸 것이다. 어머니 메르켈(Mutti Merkel)을 통하여 부드럽고 너그러워졌다. 남성들에게도 육아 휴직을 의무화하는 정책을 통하여 '가부장적 국가'를 수단으로 삼아 양성이 상생하는 사회개혁의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외모로 지적질하던 기레기들도 대폭 줄어들었다. 도리어 미덕으로 칭송되고 있다. 올림머리 하느라 허송세월하지 않는다. 머리 손질 할 시간에 책을 읽고 정책 보고서를 훑는다. 겉모습은 소박하고 단출할지언정, 내면은 내실로 꽉 차있다. 속 빈 강정이 아니다. 요란한 빈 수레가 아니다. 인내와 헌신과 조율과 포용과 배려와 공감으로 인격을 더욱 높고 깊게 다져낸 것이다. 훌륭한 여성 총리로 인하여 독일 언론의 수준마저 덩달아 올라갔다. 여성 정치인도 이제는 품성으로 평가받는다. 남녀를 가르지 않고 정치인의 자질을 평가하는 잣대가 달라진 것이다. 유능하다고 싸가지가 없으면 곤란하다. 어질어야 한다. 품행이 방정하고, 기품이 서려야 한다. 기어이 페미니즘의 문법마저 고쳐 쓰게 되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인격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지도자의 품격이란 이런 것이다. 가치관을 바꾸어낸다.
▲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이병한
2. 유라시아 : 동방정책 2.0 정치 초년병 시절 메르켈의 옷차림을 히피에 빗대고는 했다. 히피가 여피가 되어간 서독과는 달리 여전히 히피 그대로 박제된 것처럼 간주된 것이다. 그러나 애당초 68혁명의 경험부터 전혀 달랐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것이 1961년이다. 1968년이면 14살, 메르켈은 서방세계와 멀찍했다. 동구와 훨씬 가까웠다. 동구의 68혁명 '프라하의 봄'이 진압되고 있을 때, 메르켈 가족은 체코에서 휴가 중이었다. 서독 또래들이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할 때, 그녀는 반대편으로 유라시아의 사회주의 형제국을 돌아다녔다. 비틀즈 앨범을 처음 구입한 장소 또한 모스크바였다. 학창시절 러시아어 대회에서 1등을 해서 상품으로 소련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스크바만 다녀온 것도 아니다. 소련의 남부지역, 오늘의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도 구경했다. 배낭여행으로 동유럽의 비잔티움세계, 동로마세계와 이슬람세계와 일찍이 조우했던 것이다.
물리학만 러시아어로 공부한 것이 아니다. 러시아 문학 애호가이다. 톨스토이를 사랑하고 안톤 체홉을 사모한다. 러시아 역사에도 조예가 깊다.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 러시아제국의 최장수 여제 예카테리나이다. 그녀의 집무실 탁자 위에도 자그마한 예카테리나 초상화를 두고 있다. 예카테리나는 폴란드 출신이었다. 15세에 정교회 세례를 받고 표트르 대제의 손자와 결혼한다. 독일어와 러시아에 능통했던 여제는 오늘의 폴란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까지 손에 넣어 러시아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서유럽의 농부들과 탄부들, 상인들의 러시아 이주도 적극 꾀했다. '볼가 독일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정착을 유도한 것이 예카테리나이다. 서유럽 출신 이민자들의 문화와 언어, 종교를 포용함으로써 명실상부 '제국'에 값하는 국가로 성장시킨 것이다. 그 예카테리나가 살던 마을이 스테틴(Stettin)이다. 흥미롭게도 메르켈이 살던 템플린(Templin)에서 불과 80km 떨어진 이웃도시다. 메르켈의 어머니 또한 독일과 러시아 사이, 폴란드 출신이었다. 자연스레 메르켈은 슬라브계 국가들의 복잡다단한 역사에 대해서 해밝은 편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 등에 친숙하다.
그 혜안을 유감없이 선보인 것이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이다. 그저 러시아를 제재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과 러시아의 중재 역할을 맡는다. 러시아는 세계관이 전혀 다른 나라라며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한다고 오바마를 설득한 이가 메르켈이다. 러시아는 서방의 규칙을 일방으로 따르는 나라가 아니다,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데 러시아를 끌어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메르켈이다. 잠도 거르며 푸틴과 밤샘토론, 끝장토론을 펼친 끝에 민스크합의를 도출해 낸 이 또한 메르켈이었다. 푸틴 또한 동독 경험이 있다. 드레스덴의 최정예 KGB 요원 출신이다. 독일어가 유창하다. 메르켈은 러시아어로, 푸틴은 독일어로, 서로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최악의 대결국면으로 치닫지 않은 저지선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하여 메르켈은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제재에 동참하면서도 2015년 러시아 승전일 70주년 행사에 참여했던 유일한 서방의 수장이기도 했다. 러시아의 승전일이란 곧 나치독일의 패배를 상징하는 날이기도 하다. 바로 그 날 메르켈은 모스크바에 있었다.
구소련 국가 그루지아와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반대에 앞장서고 있는 인물 또한 메르켈이다. NATO가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유발자라는데 푸틴과 메르켈은 인식을 같이 한다. 오히려 러시아보다 미국에 더 역정을 내는 편이다. 오바마 시절에는 개인 핸드폰까지 도청당한 사건으로 울그락 불그락 했다. 감시국가 동독 출신인 그녀를 미국의 NSA가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 차분한 성품에도 격분을 감추지 못했다. 올해 G20에서는 아예 트럼프를 면전에 대고 유럽은 더 이상 미국에 의존하지 않아야 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미국과는 대서양을 격절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강물을 나누어 쓰는 이웃사촌이다. 전직 독일 총리들과는 달리 유럽의 중추가 독일과 프랑스라는 생각도 덜하다. 서유라시아의 쌍두마차로 독일과 러시아를 꼽는다. 다시금 그녀가 동독 출신임을 명심하자. 프랑스보다 소련이 훨씬 익숙했다. 슬금슬금 유럽의 축을 대서양연합에서 유라시아연합으로 이동시킨다.
돌아보면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Ostpolitik)부터가 이미 동/서독을 넘는 발상이었다. 단순한 민족통일 정책이 아니다. 동/서구의 통합을 전망했다. 안보(defence)와 평화(detente) 간 균형을 취하는 유럽의 새 질서 재건에 요체는 당시에도 소련이었다. 모스크바와의 관계 개선이야말로 유럽 안보의 핵심이었다. 20세기 최악의 육박전 당사자가 바로 독일과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1971년 빌리 브란트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함께 수영한 이가 소련공산당 총서기 브레즈네프이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 또한 소련의 암묵적인 인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독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처럼, 1989년 6월 중국의 천안문 사태처럼, 탱크로 진압해버릴 수 있는 무력이 너끈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도리어 축복해주었다. 동/서독 통일이 고르바초프가 제안했던 '유럽 공동의 집' 건설에도 이로울 것이라 여겼다. 1990년 7월 콜과 고르바초프는 흑해를 거닐며 독일의 통일과 유럽의 통합을 논의했다. 정장을 벗고 편안한 가디건 차림으로 사진도 찍었다.
즉 소련의 축하 속에 독일이 통일된 것이다. 소련군은 동독에서 명예로운 철군을 단행했고, 독일은 대규모 원조와 투자로 화답했다. 독일과 소련 사이 전장으로 참혹했던 폴란드, 헝가리, 체코, 유고 등과도 협력하는 청사진도 제출되었다. 1991년 소련의 예기치 않는 붕괴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유럽의 '다른 탈냉전'을 목도했을지 모른다. 동유럽의 일방적인 서유럽화, 즉 1989년 체제의 '이행'과는 다른 모습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동구와 서구가 공진화했을 수도 있다. 소련의 몰락과 미국 모델의 세계화(=역사의 종언)과는 일선을 긋는 독/소 합작의 유로피안 드림이 만개했을지 모른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미국식 세계화의 종언에 따라 다시금 그때 그 시절, '가지 못한 길'의 기회가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2005년 적시에 집권한 이가 바로 메르켈이다. 때가 맞았다. 동독 출신의 여성이 때를 꿰찼다. 천지인(天地人) 삼재가 딱딱딱 들어맞았다.
애당초 유럽은 미국과 냉전 경험부터 다르다. 매카시즘이 몰아쳤던 신대륙과 달리 구대륙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상당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서도 공산당이 적지 않는 지지를 얻었다. 지금도 파리에는 '스탈린그라드'라는 지하철 역명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냉전기에도 경제적으로 일정하게 연계가 되어 있었다. 동서독 통일의 밑자락에도 소련과 서독 간의 가스가 깔려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들어선 1960년대에도 서독은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송유관 건설에 협력했던 것이다. 그 송유관의 이름이 퍽이나 상징적이다. 드루지바(дру́жба), 러시아어로 우정을 의미한다.
▲ 베를린 장벽.ⓒ이병한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에 메르켈이 휴가지에서 읽은 책은 러시아의 경제학자 니콜라이 콘트라예프의 저서였다. '콘트라예프 주기율표'로 유명한 바로 그 학자이다. 2014년 60세 생일, 환갑잔치에는 역사학자 위르겐 오스터함멜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다. 주제는 19세기 유럽과 아시아의 상호인식, 내 식대로 고쳐 말하면 '유라시아의 상호인식'이었다. 왜 19세기였을까? 동/서 사이에,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비대칭적 상호인식이 형성된 시점이다. 이른바 대분기이다. 그 200년의 세월이 저물어 간다. 비로소 양자 간에 대등하게 서로를 만나는 대반전의 21세기가 펼쳐진다. 과연 독일은 동진(東進)하고 있다. 아시아와 부쩍 가까워지고 있다. 메르켈이 지난 3번의 총리 임기 동안 가장 많이 방문한 국가가 중국이다. 독일의 4차 산업혁명 정책, 인더스트리 4.0의 합작 파트너도 중국이다. 머지않아 베이징에서 출발한 고속철이 베를린까지 가닿는 시대가 열린다. 올 7월 함부르크에 열린 G20 회의 또한 상징적이었다. 세계무역의 양대 축으로 독일과 중국이 등극했다. 더 이상 미국이 아니다. 트럼프는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고 있다. 아메리카 퍼스트, 미국 고립주의를 실천한다. G20에서 19:1, 홀로 고립되었다. 그 동진하는 독일과 서진하는 중국을 좌/우로 끼고 있는 나라가 러시아이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러시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북방에서 내려 보면 러시아의 왼편에 아시아가, 오른편에 유럽이 자리한다. 러시아를 통하여 유라시아 대통합은 화룡정점을 찍는다. 2010년 푸틴이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대유라시아 연합 구상을 처음 밝힌 장소 또한 베를린이었다. 베를린과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상호진화. 동방정책(Ostpolitik)은 계속되고 있다. 업그레이드되고 업데이트 되고 있다. 3. 유라비아 : 제국 2.0 2017년 총선에서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이 약진했다. 기민당의 지지율은 꽤나 떨어졌다. 메르켈의 난민 정책이 한몫 했다고 한다. 분명 그런 면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비판의 화살을 잘못 겨누어서는 곤란하다. 유권자가 모자라고 덜떨어진 것이다. 유권자의 판단을 곧이곧대로 존중하는 게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 결과가 곧 정의도 아니다. 제발 비굴하게 아부하고 얄팍하게 아첨하지 말자. 지도자는 지지자의 마름이고 몸종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지지자를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20세기의 나치즘 또한 비판하기 힘들어진다. 히틀러 또한 대중민주주의의 소산으로 등장했다. 나는 메르켈의 판단이 틀렸다고 보지 않는다. 옳았다. 훌륭했다. 근사했다. 섹시했다. 100만이 넘는 난민을 수용했던 도덕적인 결단을 쌍수 들고 지지한다. 시리아 난민을 보듬고 지중해의 보트피플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면서 독일은 여타 유럽국가와 전혀 격이 다른 나라가 되었다. '책임대국'에 값한다. 8% 지지도 떨어진 것에 벌벌 떨 것도 없다. 향후 80년, 21세의 기초를 닦고 기틀을 놓았다.
당시 그녀의 발언이 흥미롭다. 본인도 피난민 출신이라고 했다. 동구에서 서구로 건너온 이방인이었다. 유럽으로 밀려오는 아랍 난민들을 보면서 1989년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이민 물결을 연상한 것이다. 1500만의 동독인이 6000만 서독인의 체제와 문화에 적응해가며 살아가는 경험 역시 간단치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소수자로서의 체험을 안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프레임을 전환시킨다. '난민 문제'나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아니다. '독일 문제'이다. 독일이 얼마나 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나라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가 문제이다. 남 탓이 아니라 제 탓을 하자고 한다. 정말로 관건인 것은 독일을 '나라다운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남들도 가고 싶은 나라, 타자도 살고 싶은 나라, 외국인도 머물고 싶은 나라가 되는 것이다. 과연 메르켈 아래서 독일은 난민대국을 넘어 개방제국으로 변모하고 있다. 민족문화를 고집하던 20세기의 독일제국이 아니라 '환대의 문화'로서 다문명세계를 포용하는 21세기형 제국이 되고 있다. 유럽/아랍, 기독교/이슬람의 대연정을 도모하는 유라비아형 제국이 되어간다.
지난 세기 이민 국가는 주로 앵글로색슨 국가들이었다. 미국과 캐나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꼽을 수 있다. 현재 독일은 이미 한해 이민자 숫자로 미국 다음가는 나라로 변신했다. 인구의 2할이 나라 밖에서 왔다. 더 이상 게르만 민족만의 나라가 아니다. 다민족국가이다. 독일인이라 함은 더 이상 인종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제국의 문화인이다. 고로 이슬람 또한 독일의 세 번째 종교로서 넉넉하게 수긍해주고 있다. 이웃나라 프랑스처럼 '세속주의 근본주의', 여성의 히잡을 벗겨내려고 국가의 공권력을 동원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무슬림이 히잡을 벗어야 한다는 법률을 폐기시킨 것도 2015년이다. 난민의 자녀들도 거리낌 없이 공교육을 받음으로써 미래의 독일인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준 것이다. 무릇 힘없는 약자와 소수자부터 먼저 보살피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하여 베를린은 더 이상 독일의 수도, 유럽의 중심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서유라시아, 유라비아의 제도(帝都)에 값한다. 지난날 로마 같은, 제2로마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같은 위대한 도시가 되어간다.
훗날 역사가들은 메르켈을 '독일의 예카테리나'로 비유할지 모르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가테리나 또한 코카서스를 품어냈다. 흑해의 이슬람세계를 끌어안음으로써 러시아를 명실상부 제국으로 비상시켰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 출신의 첫 총리가 탄생하기까지 16년이 걸렸다. 앞으로 16년 후 2033년, 모로코와 터키와 시리아에서 독일로 이주한 사람 가운데 총리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과연 무슬림 총리가 등장하는 날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진정 '다른 백년'에 값하는 풍경일 것이다. 2017년 유럽 견문,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이미 2등 국가였다. 프랑스도 더 이상 1류 라고 하기 힘들다. 하건만 독일만은 여전하다. 21세기를 이끌고 간다. 유럽과 유라시아와 유라비아의 상호진화, 새 천년의 시대정신(Zeitgeist)을 구현하고 있다.
▲브라덴부르크(Brandenburg) 개선문. ⓒ이병한
4. 재생 : 에너지 전환 메르켈은 여성/청년부 다음으로는 환경부 장관을 역임했다. 당시에도 탈이 많았다. 동독의 물리학자 출신 장관과 68혁명 이래 서독의 생태주의자들 사이 옥신각신했다. 메르켈은 본인의 전공 분야이기도 한 핵발전소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서독의 68세대 특유의 반핵 정서가 덜했다. 핵발전소와 핵무기와 NATO를 등치시켰던 서독의 사회운동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과학과 환경의 조화를 학습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 반대파들과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해 가는 협상력을 키울 수도 있었다. 결정적인 전환은 유라시아의 최동단 일본 열도에서 비롯되었다. 2011년 3월 11일, 대지진과 쓰나미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를 초래하였다. 물리학자 출신의 국가 수장으로서 만일(萬一)을,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감하게 녹색당의 주장을 전격 수용한다. 원전 마피아의 기득권을 뚫고 핵발전소 전면 폐쇄를 결단했다. 역설적으로 3.11 사태에 가장 창조적으로 대응한 나라가 독일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생태 근본주의로 기운 것도 아니다. 친환경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는다. 동/서 균형 발전론까지 겸장했다. 기후 친화적 녹색기술 발전의 근거지로 구동독을 자리매김한 것이다. 재생에너지 산업의 허브로 동부를 발전시키고 있다. 옛 공해산업 공단을 청정산업기지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서독처럼 덜 발전하고 덜 도시화된 지역이 도리어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신경제의 거점으로 바이콘 벨리(Biocon Valley)를 조성한다. 생태적인 마을 만들기, 21세기의 새마을운동이다. 서독의 자본주의적 신도시, 동독의 사회주의적 혁명도시가 아니다. 옛 마을을 창조적으로 되살려내는 것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산다. 천지인이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도 과학자 출신이라는 점이 일조했다. 학습능력이 탁월하다. 교정능력이 빼어나다. 이데올로그가 아니다. 이념에 치우진 사고를 하지 않는다. 좌/우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사회주의자도 여성주의자도 생태주의자도 아니다. 선명하기보다는 유연하다. 투쟁적이기보다는 포용적이다. 선명하고자 한다면 학자가 될 것이고, 투쟁적이고자 한다면 사회운동을 하면 그만이다. 정치는 정교하고 정밀하며 실용적인 분야이다. 혁명이 약속하는 장미 빛 희망을 발설하기보다는 철두철미 회색 현실을 직시한다. 정보와 자료에 바탕하여 차근차근 다른 시스템을 구축해가야 한다. 일거에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이 수백만, 수천만, 수억이 모여 사는 국가의 버릇(=체제)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급격한 변화는 더 큰 후유증을 야기한다. 시행착오를 통한 실사구시가 유일한 해법이다. 느긋하게 지긋하게 꾸준하게 안단테로 개혁을 추진한다. 무리하기보다는 순리를 따른다.
▲ 포츠담 플라자, 유럽의 금융 중심가. ⓒ이병한
5. 부활 : 기독교 민주주의 '하느님, 저를 도와주세요.' 2005년 메르켈이 헌법에 선서하면서, 마지막에 나지막이 보탠 말이다. 그녀는 동독에서 무척 드문 기독교도였다. 1989년 당시 동독 인구의 불과 3%에 그쳤다. 사회주의 경험 반세기도 되지 않아 프로테스탄트의 거점이었던 동독지역이 무신론 사회로 바뀐 것이다. 가히 '혁명'에 준하는 변화였다. 물리학자가 정치가로 변신한 계기에도 정당이 아니라 성당이 있었다. 1989년 동독의 종교 활동가들의 모임(Demokratischer Aufbruch)에 참여한다. 다시금 동유럽 민주화의 근저가 좌/우 투쟁이 아니라 성/속의 길항이었음을 확인케 되는 대목이다. 그곳에서 신학자들과 독일의 장래에 대하여 토론했다. 헌법 개정과 생태 재생, 유럽 평화 등을 추구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해체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원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예수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소망했다.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무렵에는 이미 만 명이 넘는 회원을 확보한다.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정치에 입문했기에 메르켈은 세속주의적 사회민주당이 아니라 기독교민주당과 결합해 갔던 것이다.
사는 모습도 딱 개신교도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살아간다.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몸에 배였다. 검소한 생활과 정직한 직업윤리를 체현하고 있다. 근면하고 성실하다. '낙타처럼 일한다'는 표현마저 있다. 평소 다섯 시간을 채 자지 않는다고 한다. 사저에서의 생활은 철저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흡사 수도원의 수도사처럼 고요하게 휴식한다. 기도하고 명상한다. 방전하지 않고 발산하지 않고 충전하고 수렴한다. 가정은 그녀가 공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에너지의 저수지이다. 빵을 굽는 소소한 행복을 충분히 음미한다. 과학자로서의 이성과 종교인으로서의 영성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다. 감성지능과 영성지능이 빼어나다.
▲ 메르켈의 아버지가 목사로 있었던 템플린 교회. ⓒ이병한
그래서 부국강병이 시대정신이었던 20세기의 선도자형 지도자가 아니다. 성경의 목자에 더 가깝다. 앞에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지켜보며 따라간다. 낙오자가 없도록 보살피면서 전체적으로는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는 유능한 목자이다. 동독의 목사의 딸이 독일의 목자가 된 것이다. 서독의 민주주의에 맞추어 자신을 바꾼 것이 아니다. 대중에 영합하지 않고 추수하지 않는다. 여론 편승이 만능이 아니다. 정치를 예능으로, 선거를 광고로 강등시키지도 않는다. 시끌벅적한 선거에 익숙한 이들은 독일 총선이 심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는 의미를 추구하는 영역이지 재미를 쫓는 분야가 아니다. 자신의 신조를 고수함으로써 기어이 정당을 바꾸고 나라까지 바꾸어 낸 것이다. 사는 대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생각한 바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리더십 아래 기독교 민주당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동구식 여성 정책을 도입함으로써 젠더 감수성을 크게 증진시켰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을 선도함으로써 녹색당의 의제를 끌어안았다. 난민/이민 및 시민권 등 전통적으로 사민당이 강했던 진보적인 이슈까지도 아우르게 되었다. 베를린의 목자, 메르켈로 말미암아 독일은 경제대국일 뿐 아니라 젠더감수성도 빼어나고 다문명세계를 포용하는 우아한 책임대국으로 성숙해가고 있다. 독일의 부력(富力)은 이미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다. 독일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만큼 족하다. 여기에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까지 갖추었다. 이제 누구도 20세기의 강박처럼 '독일인'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독일인에 새겨졌던 주홍글씨를 지워내고 자괴감을 털어내었다. 재차 독일인임을 자부하고 자긍하게 되었다. 과거를 극복하고 치유해낸 것이다. 기꺼이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그 근저에 기독교 민주주의가 있다.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만 있던 것이 아니다. 오늘의 독일을 일군 정당,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당은 기독교민주연합이다. 기민당은 그저 보수정당이 아니다. 20세기의 잣대 좌/우로 단정 지을 수가 없다.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결합, 고전문명과 현대정치의 융합이다. 의회와 교회가 공진화한다. 정당과 성당이 상호진화한다. 고금(古今)합작과 성속(聖俗)합작의 모델이다. 이제야 기민당의 역사를 천착해볼 필요를 느꼈다. 베를린에 한 주 더 머물기로 한다.
이병한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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