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한국의 '가습기살균제 대책' 문제 삼나?

[안종주의 안전사회] "위험 관리는 심리 문제다"

노벨상 가운데 문학상, 과학상, 평화상 등 다른 상에 견줘 우리나라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기울이는 부문이 경제학상이다. 올해 노벨상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발표된 경제학상 수상자로 '심성회계(mental accounting) 이론'을 제창한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H. 세일러 미국 시카고대 교수가 선정됐다.

세일러 교수는 행동경제학 분야의 대표적 학자로 한국에 온 적이 있으며 2009년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판된 <넛지(Nudge)>의 공동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국내 경제학자들은 물론이고 지식층에게도 제법 알려져 있는 인물이어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기존 경제학의 가정을 부정하고 인간의 실제적인 행동을 연구해 이것이 어떤 경제적인 결과로 발생하는지를 규명하는 경제학의 한 갈래다. 다시 말해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은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비합리적 의사 결정의 원리를 연구하고 규명하는 학문으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경제학의 한 분야다.


세일러 교수의 심성회계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같은 돈이라 할지라도 심리적 요인에 따라 그 돈을 각각 다르게 취급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갑에 10만 원을 넣고 영화관에 가던 중 1만 원을 잃어버린 경우 사람들은 기분은 좀 상했더라도 1만 원짜리 영화표를 구매해 영화를 선택을 한다. 하지만 10만 원 중 이미 1만 원을 투자해 영화표를 예매해둔 상황에서 영화관으로 가다가 그 영화표를 잃어버렸을 때는 똑같이 1만 원의 손실이 발생한 것임에도 이 경우 사람들은 영화표를 재구매하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소비와 경제 행동에 심리적 요인이 큰 영향 끼쳐

소비행동이나 경제행동에서만 심리적 요인이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심리적 요인은 건강과 질병의 행동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1970년대 후반부터 질병이나 건강 행위가 생리적·생물학적 원인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의 질환에 대한 취약성과 그에 대한 반응은 심리적·사회적 요인의 영향도 받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보건심리학(Health Psychology)이다.

심리적 요인이 큰 작용을 하는 또 다른 분야로는 위험 인식을 꼽을 수 있다. 안전과 위험에는 심리적 요인이 매우 중요하다. 안전과 위험을 자연과학적 입장에서만 바라보면 위험소통이나 위험(위기)관리에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요 근래 일어난 각종 재난이나 참사에 대응하면서 시민 또는 소비자들의 심리적 요인을 무시해 문제를 더 키운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사례가 많이 있었다. 조금 멀리는 2008년 미국 수입 쇠고기 광우병 파동이 있었고 가까이는 올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살충제 달걀 파동이 있었다.

위험 관리나 위험소통에서 대중의 심리적 요인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대중이 위험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즉 얼마나 안전해야 안전하다고 받아들이느냐와 어떤 위험은 실제보다 더 위험하게 느끼고 어떤 위험은 실제보다 덜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위험 인식에서 심리적 요인은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위험 인식에서도 심리적 요인과 사건의 역사적 배경이 중요

이를 일찍 간파한 학자가 미국의 피터 샌드만(Peter Sandman)이다. 그는 위험인식에서 대중의 분노가 결정적 구실을 한다고 주장하면서 '위험(risk)=유해요인(hazard)+분노(outrage)'란 공식으로 대표되는 위험의 분노이론을 만들어냈다. 다시 말해 재난이나 위험 사건이 생겼을 때 정부나 기업의 소통 실패나 사실 은폐 등으로 대중이 일단 분노하면 그 어떤 설득 노력과 정보 전달로도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위험인식에 관여하는 요인은 20개 가까이 된다. 이 가운데 자발성 등 심리적 요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사건의 역사성도 위험인식에 영향을 주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난, 생활화학물질제품에 의한 참사 성격을 지닌 가습기살균제 집단 사망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엄청난 두려움으로 각인돼 가습기살균제 또는 그 성분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를 친다. 자라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게 마련이다. 가습기살균제는 적어도 한국인에겐 그렇다.

최근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 한국 정부에 '가습기 살균제 사태'로 한국에서는 치약, 화장품 등에 보존료로도 사용이 금지된 화학물질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시엠아이티)과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엠아이티)의 규제를 완화해 적어도 보존제로서는 사용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살균제 성분 보존료 사용 완화토록 압력 넣는 미국

미국은 지난 3월 세계무역기구 본부에서 열린 '무역기술장벽(TBT) 위원회' 정례회의에서 한국 정부의 시엠아이티·엠아이티 전면금지에 대해 "사용자에게 아무 위험이 없는 상황까지도 포함해 불필요한 제한을 두기보다 일부 유해제품에 있어 이들 물질의 사용을 제한하는 등 위해성에 근거를 둔 규제를 설계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부는 지난해 12월30일 가습기살균제 참사 후속 대책으로 모든 스프레이형 제품과 모든 제형의 방향제에 시엠아이티·엠아이티 사용을 금지한 바 있다. 미국은 한국의 이런 화학물질 규제 강화 정책에 대해 딴죽을 걸고 있는 것이다.

살균 작용을 하는 시엠아이티·엠아이티는 우리나라와 달리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치약, 화장품·헤어제품·방향제 등의 보존제로 널리 쓰이고 있다. 시엠아이티·엠아이티를 포함한 가습기살균제 성분이 호흡기로 들어가는 용도로 사용하다 참사를 겪은 우리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이러한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이들 물질에 대한 관련 규제가 없었고 지금도 없다.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한국에서 아무런 제제 없이 오랫동안 제조·판매된 것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생각하는 미국으로서는 이들 성분을 사용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극히 낮은 화장품, 헤어제품, 치약 등에 쓰는 것까지 금지하는 것은 과도하며 비과학적이라고 여길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은 자라(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보지 않았고 우리는 자라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너희들이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알아"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를 허용한 적이 없는, 그래서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당한 적이 없는 미국이 과학적 위해성 평가를 기초로 한 규제 운운하는 것은 위험 인식 내지는 위험 관리에서 심리적 요인과 위험 사건의 역사적 배경을 도외시한 처사이다. 가습기살균제 성분 화학물질 때문에 엄청난 아픔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피해자와 그 가족, 그리고 그들의 이웃인 대한민국 국민의 심정을 미국 정부는 보듬지 못한 것이다.

위험은 결코 과학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위험 인식에서 심리적 요인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것을 가장 일찍부터 연구하고 강조해온 폴 슬로빅(Paul Slovic)과 같은 위험 인식 전문가들이 가장 많이 포진하고 있는 국가가 미국이다. 위험 인식에서 심리적 요인과 역사적 배경 등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것을 미국 정부가 모를 리 없다.

미국이 아무리 자유무역과 무역장벽 철폐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비극을 겪은 국가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은 염치없는 몰상식한 행위이다. 우리 정부 당국자는 한-미 에프티에이(FTA) 재협상 과정에서 이런 근거와 논리로 미국에 맞서야 할 것이다. '안전과 위험은 심리다'라는 사실을 일찍이 가장 먼저 강조해온 나라가 미국이라는 것과 함께 협상테이블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사자성어를 인용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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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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