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 설명서', 얼마나 이해하시나요?

[서리풀 논평] 문자 해독에서 문해력으로

한글이 우수한 문자라느니 세종대왕이 어쨌느니 하는 '의례'를 차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런 종류는 텔레비전의 습관성 특집 프로그램으로 충분할 것이다.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 인종, 말, 문자, 전통과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하면,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힌다고 믿지만, 막상 그 문자가 제 기능을 하는가도 썩 미덥지 못하다. 그 기능이란 개인적 또는 사회적 삶을 편리하게 하는 것으로, 문자를 읽고 쓰고 셈하는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문해(文解, literacy)'라고 하는데, 그 기능이 충분치 않은 상태를 '비문해'라고 부른다(과거에는 '문맹'이라 했다). 문해와 비문해라는 말이 영 어색하지만, 다들 그렇게 쓰니 따르자.

한글이 그렇게 쉽다면 한국 사회에서 비문해는 아무 문제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보통 교육이 확대되면서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비문해는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 조사를 보면, 2014년 현재 성인 인구의 6.4%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읽고, 쓰고, 셈하기가 불가능'(수준 1)하다(☞바로 가기).

이른바 '기능적 비문해'까지 치면 수가 엄청나다. 수준 1의 비문해에 '기본적인 읽고, 쓰고, 셈하기를 할 수 있지만 일상생활 활용에 미흡'하거나(수준 2) '복잡한 일상생활 문제 해결을 하기는 어려운' 수준(수준 3)까지 합하면 비문해율은 성인 인구의 28.6%에 이른다. 네 명에 한 명 꼴로 문자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기능적 비문해율(문맹률)은 외국과 비교해도 높은 편이다. 2000년대 초반 통계로는 세계 최하위권이다. 최근에는 비교할 통계가 없어 확언할 수 없지만,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할 근거도 별로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조사에 따르면 '의약품 설명서' 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의 비율은 38%로 나타나 OECD 회원국 20개 중 19위로 최하위권이었다." (☞관련 기사 : 글자 알아도 글 못 읽는 아이러니…'문맹률 제로' 신화 깨야)

실제는 통계 이상으로 나쁠지도 모른다. 앞서 인용한 2014년 국가평생교육진흥원 조사를 비롯하여 대부분 문해 조사는 '일상생활'에 초점을 맞춘다. 건강과 보건 쪽의 문항을 보면, '약 복용법의 이해', '약 복용량 측정', '암 검진 대상자 표 이해', '병원 진료 시간표 이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조사 결과대로 한국 사람 71%는 의약품 설명서를 읽고 별문제 없이 따라 할 수 있을까? 다음은 주위에 있는 흔한 의약품 설명서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약국에서 그냥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이니, 이 설명서는 비전문가가 보라고 쓴 것.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다음 질환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분비기능이 항진된 급·만성 호흡기 장애: 급만성기관지염, 호흡장애(천식, 기침)를 수반한 기관지염, 비인두염, 후두기관염."


"상호작용: 항생물질, 기관지확장제, 천식치료제, 폐결핵치료제와 병용투여할 수 있습니다."


"임부에 대한 투여: 기형발생은 없으나 임부 또는 임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부인에 투여할 경우에는 신중히 투여하십시오."

보건이나 의약품이 특별히 전문적이어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정치 분야를 보자. 앞서 인용한 비문해율 조사에는 '부재자 신고 공지문 이해'라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정도를 이해한다고 현실의 정치적 '기능'에 문제가 없을까?

공고문을 보고 부재자 신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보다 더 기본적일 수도 있는)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비례대표'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자신할 수 없다. 다음 문구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가 설명한 비례대표 부분에서 따온 곳이다.

"전국을 단위로 하며 지역구선거에서 5석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정당과 비례대표선거에서 유효투표총수의 3/100 이상을 득표한 정당에 대하여 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에서 얻은 득표비율에 따라 각 정당이 제출한 명부순으로 당선인을 결정하는 정당별 득표비례구속명부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의원정수 47)" (☞바로 가기)

성인 71%가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부재자 신고와 선거제도 이해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앞쪽이 개인행동에 대한 것이라면, 뒤쪽은 집합적이고 사회적이다. 어느 쪽이 앞선다고 할 수 없으나, 한쪽만 가지고는 개인 기능도 온전할 수 없다.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문해력 조사의 대부분 문항은 개인의 일상생활에 대한 것으로, '사회적인 것'은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 기능적 문해라 하지만, 권리와 의무 주체로서 사회구성원 또는 시민으로서의 기능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개인이 자기 생활에 활용하는 데는 약 복용법이나 약 복용량 측정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겠지만, 사회적으로는 '항생제 처방률'이나 건강보험의 '약제 급여' 같은 말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사전투표제도'를 이해하고 때맞추어 투표장을 찾아 투표하는 것과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개헌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고 찬성 또는 반대 의견을 표시하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그리고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강조하면, 기능적 문해력에서도 한 걸음 더 나가 '사회적 문해력(social literacy)'을 목표로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권리와 책임을 이해하고 지역사회와 정치 공동체에 이바지하려면, 시민교육, 그리고 그에 속하는 한 가지 요소로서의 정치 문해력이 필수적이다(☞바로 가기). 여기서 정치 문해력은 정치에 대한 지식, 기술, 가치를 갖추는 것을 가리킨다.

어디 정치뿐일까? 경제, 문화, 노동, 건강 등을 바꾸어 넣어도 뜻이 그대로 통한다. 현상을 넘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공통 원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 보건부가 건강 문해력을 함양하기 위해 제시한 일곱 가지 목표는 다음과 같다(바로 가기).


1. 정확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실천할 수 있는 건강과 안전 정보 개발과 보급
2. 보건의료체계 변화를 통한 건강정보, 커뮤니케이션, 의사결정, 의료 서비스 접근성 개선
3. 어린이에서 대학 수준에 걸친 교육과정에 정확하고 표준적이며 적절한 건강과 과학 정보 반영
4. 지역에 맞는 성인 교육과 건강정보 제공 지원
5. 협력체계 구축, 지침 개발, 정책 변화
6. 건강 문해력을 높이기 위한 기초연구와 개발, 실행, 평가
7. 근거에 기반 건강 문해력 증진 프로그램의 확산과 적용.

문해력을 개발하고 키우는 과제는 개인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다. 교육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개인 능력과 역량, 학습을 강조하기보다 정보의 투명성과 접근성, 그리고 체계와 정책을 중시한다(심지어 미국조차!). 건강 문해력이라면, 개인에게 의학용어를 교육하는 것에 앞서 약품사용 설명서를 바꾸는 것이 먼저다. 정치 문해력 향상을 위한 시민교육 또한 개인의 노력이라기보다는 체계나 제도에 가깝다.

또 한 가지, 문해력 또한 현상이든 상황을 바꾸려는 노력이든 불평등이 작동한다. 문해력을 함양하는 시민교육을 강조하지만, 그 시민은 하나가 아니다. 소득 수준으로, 교육으로, 젠더로, 장애 여부로, 때로는 이주민인가 아닌가로 나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다. 체계든 개인이든, 필요가 가장 큰 쪽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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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민건강연구소는 "모두가 건강한 사회"를 지향하는 건강과 보건의료 분야의 싱크탱크이자, 진보적 연구자와 활동가를 배출하는 비영리독립연구기관입니다. <프레시안>은 시민건강연구소가 발표하는 '시민건강논평'과 '서리풀 연구通'을 동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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