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리용호 '선전포고', 김정은 들으라고 한 말"

[정세현의 정세토크] "문재인 정부, 북한 퇴로 여는 외교 펼쳐야"

'미치광이 늙다리'와 '리틀 로켓맨'. 영화 제목으로나 어울릴 법한 말들이 현실 속에서, 그것도 한 나라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오가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유치한 막말 퍼레이드'가 한반도를 전례 없는 긴장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25일(현지 시각) 귀국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며 "미국 전략 폭격기들이 설사 우리 영공 계선을 채 넘어서지 않는다고 해도 임의의 시각에 쏘아 떨굴 권리를 포함해 모든 자위적 대응 권리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리용호 외무상의 발언은 미국이나 전 세계를 상대로 이야기한 게 아니다. 김정은 위원장 들으라고 말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 전 장관은 리 외무상이 "'최고 존엄'에 대한 충성심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북한은 최고지도자를 그냥 정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격화시키고 있다. 거기다 대고 '리틀 로켓맨'이다, 오래가지 못한다 등의 말을 하면 김 위원장 밑에 있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여기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라며 "문제는 미국이 이러한 북한의 정치문화를 잘 모른다. 북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 미국이 세우는 전략은 십중팔구는 실패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전 장관은 미국과 북한의 이러한 간극을 메워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은 한국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북한과 미국 사이에 접점이 생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하려면 압박과 제재를 하는 가운데서도 적절한 시점에 협상을 위한 퇴로를 열어 놓아야 한다"며 "이런 이야기를 한국 정부가 미국에 전달해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는 제재와 압박을 통해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가 한국이 아닌, 펜타곤(미 국방부)이나 미국 군산복합체를 위한 외교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며 "한반도 긴장 상황이 오래갈수록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국방비로 돈도 많이 나가고 하는데, 돈은 돈 대로 쓰더라도 국민들의 불안감은 좀 줄여달라는 이야기를 미국에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대통령의 말에 맞장구만 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니다"라며 "트럼프는 겁을 잔뜩 줘서 우리한테 무기를 팔아 먹고 있는데 우리도 협조할 건 협조하되 별도로 길을 찾아야지, 이렇게 고지식하게만 있으면 안된다"고 우려했다.

정 전 장관은 "대통령이든 외교장관이든 제재에는 얼마든지 동참하지만 퇴로를 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미국의 무기는 살 수 있지만, 그건 그거고 대화는 대화니까 퇴로를 열어 달라고 해야 한다"며 문재인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했다.

인터뷰는 25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후에도 북한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대놓고 경고를 하기도 했는데요. 트럼프 대통령 발언의 의도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정세현 : 트럼프 대통령은 긴장된 정세 속에 안보 위기가 고조되면 북핵 문제가 꼬이는 상황에서 가장 불안해할 한국에 무기를 마음 놓고 팔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겁니다. 미국의 비싼 무기를 흥정도 하지 못하게 할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이죠.

앞서 한미 양국은 한국의 미사일 탄두 중량 제한을 늘리는 협의를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걸 공짜로 용인해준 것일까요?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하고 안보를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쯤 쓱 비싼 무기를 들이밀기 위한 의도가 있을 겁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현재의 긴장 국면이 국민들의 전쟁 불안감을 해소할 책임을 지고 있는 남한 대통령에게 무기를 팔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겁니다. 긴장이 높아질수록 남한은 무기를 원하고, 그러면 미국 입장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 되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미국이 어느 정도 무기 장사로 수익을 거두고 나면 얼굴을 싹 바꾸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북한과 대화를 모색할 수 있습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2002년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문제를 제기하면서 긴장 수위를 높였지만 2005년 6자회담을 통해 9.19 공동성명을 채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방코델타아시아(BDA) 제재에 들어가면서 판을 깨고 그 이듬해인 2006년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하니까 다시 북한과 만났습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이 중간에 핸들을 꺾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른바 '성동격서' 적인 전략인데, 이러한 안보 장사에 문재인 정부가 너무 잘 걸려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외형적으로는 미국을 따라가더라도 우리는 나름 교통 정리를 하고 차분한 검토를 거쳐야 합니다.

프레시안 : 상황이 이렇게까지 오다 보니 북한의 다음 행보는 또 다른 군사적 도발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본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사상 최고의 초강경 대응조치 단행을 심중히 고려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유엔총회에 참석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귀국길에 오르기 전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이라면서, "미국 전략 폭격기들이 설사 우리 영공 계선을 채 넘어서지 않는다고 해도 임의의 시각에 쏘아 떨굴 권리를 포함해 모든 자위적 대응 권리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습니다.

정세현 : 북한은 지금 남한 정부하고는 이야기하지 않고 미국과 직접 거래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건데요.

리용호 외무상의 발언은 사실 미국이나 전 세계를 상대로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김정은 위원장 들으라고 말한 겁니다.

리 외무상이 이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 지도부에 대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공언함으로써 끝내 선전포고를 했다"고 말했는데, 소위 말하는 '최고 존엄'에 대한 충성심을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미국은 대통령의 이야기도 국무 또는 국방 장관이 뒤집을 수 있습니다. 그게 꼭 의견이 달라서라기 보다는 치고 빠지는 식으로 여론의 향배를 관찰하려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고요.

▲ 유엔총회 참석 차 미국 뉴욕을 방문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25일(현지 시각) 귀국 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런데 북한은 이게 불가능합니다. 최고지도자를 그냥 정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격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대고 '리틀 로켓맨'이다, 오래가지 못한다 등의 말을 하면 김 위원장 밑에 있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여기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죠. 리 외무상 입장에서도 미국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본인이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굳이 기자회견까지 자청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미국이 이러한 북한의 정치문화를 잘 모른다는 겁니다. 북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 미국이 세우는 전략은 십중팔구는 실패하는 결과가 나오죠. 상대가 미국의 스타일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상에 따라 전략을 달리 세워야 합니다.

프레시안 :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최고의 압박과 제재만이 대화를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전략폭격기인 B-1B 랜서가 출격해서 북한에 대한 압박을 전개하면서도 외교적 해법이나 대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미국은 결국 북한이 무릎을 꿇는 모양새를 보이면서 대화 테이블로 나오길 원한다는 것 아닐까요?

정세현 :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의 공산주의 국가들을 무릎 꿇게 만들 수 있다는 오판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실패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베트남 전쟁입니다. 베트남에 융단폭격을 가했지만 결국 공산화를 막지 못했죠.

북한은 큰 나라를 상대로 한 외교에서 베트남과 유사한 양상을 보입니다. 민족주의적이면서 상당히 저항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북한은 근대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기를 펴고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더 적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부분에 대한 이해가 없습니다. 세계 초강대국으로 불리던 미국이 을의 입장을 알 리가 없죠. 그런 상황에서 나온 전략은 적중할 수도,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압박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서 북한을 밀어붙이다가 북한의 핵 실험으로 뒤통수를 맞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경우 결국 협상으로 돌아섰습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경우도 결국 제네바 합의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집권했을 때 북핵 상황은 안정적으로 관리됐습니다. 한국 정부가 바로 이러한 점을 미국의 트럼프 정부에게 이야기하면서 전략을 바꾸도록 일깨워줘야 합니다.

프레시안 : 북한이 지난 8월 공언한 대로 괌 인근에 미사일을 발사할 가능성도 있을까요? 실제 실행하면 사실상 미국과 전쟁으로 돌입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데요.

정세현 :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이 괌의 영해가 아니라 공해상에 떨어지면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라고 간주하기에 애매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직접적인 대응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이 이런 틈을 노릴 수도 있죠.

프레시안 :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북한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 일괄 제재)은 북한의 태도를 바꾸는데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정세현 : 세컨더리 보이콧은 결국 미국과 중국의 싸움인데 중국이 미국에 굴복해 주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미국이 세컨더리 보이콧을 발동해서 중국 경제가 얼마나 타격을 받을지도 의문입니다.

중국은 정치적인 문제는 정치적으로 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 미국이 세컨더리 보이콧을 발동한다고 해도 결국 이를 스스로 거둬들일 수밖에 없는 다른 카드를 내밀 겁니다.

▲ 지난 2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본인 명의의 성명을 발표했다. ⓒ노동신문

프레시안 :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오는 10월 당 대회가 끝나고 나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정세현 : 국내정치가 정리되면 밖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죠. 그런데 아무리 시진핑이라고 해도 지난 5년 동안 형성됐던 중국과 북한 관계에 대한 입장을 갑자기 바꿔서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고 나오려는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또 북한이 중국에 대한 신뢰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경계심이 많죠. 북중관계를 한미관계와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상은 좀 다릅니다.

프레시안 : 한편 일본 <교도통신>에서 지난해 1월 북한이 4차 핵실험을 실시한 뒤 미국과 비공식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핵무기 보유로 억지력을 작용시키는 '상호 확증 파괴'(MAD) 관계를 양측 간에 확립해서 대등한 관계를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요. 미국이 이걸 거부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정세현 : 북한은 그전에도 앞으로 '핵 군축 협상'을 해야 한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6자회담도 핵 보유국끼리만, 그러니까 자기들과 미국‧중국‧러시아 이렇게 만나자고 한 적도 있죠.

그런데 북한의 이러한 입장은 협상장에 들어가기 전에 협상의 대가를 크게 받으려는 일종의 '강탈적' 요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놓고 서서히 몸값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조정해가는 것이죠.

연설과 행동이 너무 다른 문재인 대통령

프레시안 : 북한과 미국의 말 폭탄이 이어지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적 해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적인 해결을 추동하기 위한 행동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데요.

유엔총회 연설에서도 평화를 강조했지만 사드를 배치하고 미사일 탄두 중량을 늘리고 미국 폭격기의 한반도 진출을 미국과 '긴밀히' 상의하고 있습니다. 이걸로 평화적인 북핵 해결이 가능할까요?

정세현 :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핵을 가지면서 문제를 일으킨 북한과 문제 해결의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 사이에 접점이 생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되려면 압박과 제재를 하는 가운데서도 적절한 시점에 협상을 위한 퇴로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국 정부가 미국에 전달해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는 제재와 압박을 통해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독일 쾨르버 재단의 초청 연설에서 남북 적대 행위 중단을 위한 군사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 회담을 제안했습니다. 또 21일(현지 시각) 유엔총회 연설에서는 "전쟁을 겪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의 대통령인 나에게 평화는 삶의 소명이자 역사적 책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한반도 평화 정착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만, 최근 문재인 정부가 하고 있는 조치들을 보면 말과 행동이 불일치한 것 같습니다. 문 대통령이 연설에서만 자유롭게 말하고 정작 공식적인 부문, 예를 들면 NSC나 한미, 한미일 정상회담 등 공식적인 부문에서는 미국과 똑같은 반응을 내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일련의 조치들이 북한에 어떤 메시지가 될 것인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남한이 이렇게 나오면 안 그래도 남한과 별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과 직통으로 협상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힐 수밖에 없습니다.

프레시안 : 남한 정부가 비공식적인 방식을 취하더라도 북핵 문제 해결 방안을 미국에 제안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가 지난 6월에 북한이 핵과 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를 포함한 한-미 연합군사훈련 규모 축소를 미국과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힌 것과 같은 복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정세현 : 지금 문재인 정부에는 김대중 정부 시절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과 같은 전략가가 없습니다. '큰 그림'을 보면서 현 상황을 돌파할 전략을 만들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 와중에 보수 여론을 의식하면서 안보를 무기 도입과 동일시하고 있는 양태까지 보이고 있는데요. 안보를 튼튼히 하는 토대 위에서 남북 간 화해 협력을 시도하겠다는 나름의 '큰 그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퇴로는 열어 둬야 하는데 그마저도 없어 보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잇는 '민주정부 3기'를 만들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는 민심을 등에 업고 당선됐습니다. 그런데 대북 문제의 정책적인 측면을 보면 보수 정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야당의 비판이 있더라도 소신 정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소문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안보는 튼튼히 하면서 한미 공조, 물론 해야죠. 그러나 '피스 키핑'에만 올인하지 말고 '피스 메이킹'을 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숨통, 퇴로는 열어 둬야 합니다.

▲ 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 위치한 유엔본부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청와대

프레시안 : 문재인 정부는 전술핵 배치 반대하고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 인도적 지원을 추진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책 방향을 충분히 드러냈다고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정세현 : 대통령 본인의 이념이나 정체성과 관련한 정책은 10% 정도만 이행하고 나머지 90%는 보수 정부와 같다면 그건 선거 때 내세웠던 정체성과 달라진 것 아닙니까? 핵잠수함 도입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던데 이건 정말 한반도 상황을 고려했을 때 불필요한 자산입니다.

미국처럼 작전 반경이 전 세계라서 장거리로 잠행을 할 필요가 있으면 몰라도 작전 반경이 좁은 한국 상황에 핵잠수함 가져다 놓고 대잠 능력을 키우겠다고요? 북한은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장비를 운용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확히 그 반대로 가겠다는 겁니다.

북쪽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가 '정책'이 있다면 자기들에게는 '대책'이 있다는 것이죠. 마치 핵잠수함 도입이 안보를 튼튼히 하는 행위인 것처럼, 핵잠수함을 도입하면 북한에 대한 대잠 능력이 확고하게 커지니까 안심해도 된다는 식으로 국민들을 현혹시키면 안됩니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북핵 개발 의도의 90%는 대남 적화통일을 위한 것이고 나머지 10% 정도가 체제 보장을 위해 미국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군인으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국방부 장관은 국무위원입니다. 아직도 그런 식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상황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일뿐만 아니라 국무위원의 자질에도 부합하지 않는 겁니다.

프레시안 : 이렇게 되면 안그래도 북핵 문제에서 주도권이 없는 한국 정부가 사실상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정세현 : 북한이 먼저 굴복하고 미국에 대화하자고 할 리도 없고, 이건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갈 데까지 가고 나서 핸들을 틀겠죠. 그런데 그런 기간 동안에 우리 국민들이 받을 고통이나 불안은 적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북한이 대화에 못 이기는 척하고 나올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미국에 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문재인 정부는 한국이 아닌, 펜타곤(미 국방부)이나 미국 군산복합체를 위한 외교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대통령이든 외교장관이든 제재에는 얼마든지 동참하지만 퇴로를 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무기는 살 수 있지만, 그건 그거고 대화는 대화니까 퇴로를 열어 달라고 해야 합니다.

한반도 긴장 상황이 오래갈수록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국방비로 돈도 많이 나가고 하는데, 돈은 돈 대로 쓰더라도 국민들의 불안감은 좀 줄여달라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미국이 말폭탄이라도 좀 줄여주면 북한도 거기에 대해 일정한 반응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한국과 중국이 북한을 대화에 끌어낼 수 있도록 일정한 역할을 해볼 수 있다고 미국을 설득해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말에 맞장구만 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트럼프는 겁을 잔뜩 줘서 무기를 팔아 먹고 있는데 우리도 협조할 건 협조하되 별도로 길을 찾아야지, 이렇게 고지식하게만 있으면 안됩니다.

내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에 우리가 좀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특히 북한의 장웅 IOC 위원이 지난 16일 북한 선수단의 올림픽 참가 가능성을 내비치며 "정치와 스포츠는 별개"라고 말했습니다. 불과 3개월 전 무주 세계태권도대회에서 "스포츠 위에 정치 있다"고 말했던 것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입니다.

이는 북한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를 구실로 남북 간 체육 회담 성사도 가능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겁니다. 북한은 미국을 말려줄 수 있는 곳은 한국 밖에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본인들도 미국과 맞서는게 힘겨우니까요.

우리는 이를 잘 활용해서 지난 7월 문 대통령이 제안한 이산가족 상봉과 군사회담까지 끌고 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과 미국이 접점을 만드는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입니다. 또 남북관계가 복원되면 미국을 상대로 한 북한의 도발적인 행동을 줄이는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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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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