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된 민주화'의 날개 없는 추락, 새로운 균형

[유라시아 견문] 아테네 : 탈향과 귀향

1. 검은 아테나

18년 만이었다. 이십대 들머리 때 갔다. 삼십대 끝자락에 다시 왔다. 그새 세기가 바뀌었다. 20세기말, 서울에서 런던으로 향했다. 유라시아 동녘 끝에서 서쪽 끝으로 곧장 직행했다. 사이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중국도 인도도 이슬람도 하등의 관심이 없었다. 대영도서관에 둥지를 텄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했다는 탁자 주변을 배회했다. 후기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원서를 읽는답시고 끙끙 한 달을 보냈다. 바람 쐬러 떠난 곳이 아테네였다. 런던에서 아테네로 또 직항했다. 왜 아테네였던가,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아마도 서구문명의 기원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발칸반도의 끝자락에 자리한다는 사실도 깊이 의식하지 못했다. 사론 없는 이론을 탐닉하고, 지리 없는 이념을 천착하던 시절이다. 시간과 공간에서 유리된 근대인, 패션좌파 모던보이였다. 탈색에 탈색을 거듭한 머리칼마저 금발이었다.


21세기 하고도 17년. 아테네에 이르는 경로가 달라졌다. 이슬람권에서 꼬박 200일을 지냈다. 이란에서 페르시아문명의 진경을 목도했다. 터키에서 오스만제국의 영화를 환기했다. 이집트에서 고대문명의 휘황함에 감탄했다. 페르시아어와 아랍어와 터키어로 기록된 희랍 고전을 맨 눈으로 보고난 후였다.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희랍문명의 흔적도 간취한 차였다. 지난 세기말 그리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아크로폴리스가 이번에는 영 올망졸망 보인다. 페르세폴리스의 유적에 견주자면 아담하고, 나일강 따라 도열한 룩소르와 아스완의 신전에 비하자니 앙증맞다. 희랍문명의 뿌리에 페르시아와 이집트가 있다는 주장을 개진한 책으로 <검은 아테나>가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리엔트 문명으로부터 희랍세계가 비롯했다는 것이다. 그 책이 촉발한 논쟁을 구구절절 따라가지는 않겠다. 시시비비를 가리지도 않겠다. 아직 4부작 전집이 완간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직관적으로 수긍하게 된다.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잇는 곳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이 만나는 곳에 그리스가 위치한다. 삼대륙으로 둘러싸인 내해의 일각, 지중해(地中海) 문명권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에둘러 유럽에 당도한 행적도 달라졌지만, 유럽 안에서 그리스까지 가닿는 경로 역시 달라졌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이용하여 차근차근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스는 동유럽 하고도 발칸반도에 자리한 나라이다.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땅 끝 국가이다. 대서양을 면한 서유럽과는 거리부터 제법 멀다. 도리어 바다 건너 이슬람과 지척이다. 아라비아의 반대편으로 러시아와도 이웃한다. 아테네는 런던보다 모스크바가 더 가까운 도시이다. 파리보다는 이스탄불이 더 가깝다. 베를린보다 다마스쿠스에 더 근접하다. 오늘날 그리스인 혈통의 다수는 슬라브계라고 한다. 약 천 년 전 우랄에서 발칸으로 남하했던 이들의 후손이다. 그 옛날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현재의 그리스인들과는 생김새가 제법 달랐을 것 같다. 북아프리카부터 서아라비아까지, 베이루트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사블랑카에서 보았던 이들과 더 닮지 않았을까? 하노라면 그리스는 과연 ‘서구’인가? 질문해 보게 된다. 아테네를 재차 궁리해 보게 된다. 유럽을, 유라비아를, 유라시아를 달리 사고하게 된다.

옛날 옛적 얘기만도 아니다. 그리스는 천 년간 비잔티움제국에 속했다. 서로마의 가톨릭과 일선을 긋는 동로마제국, 동방정교회 세계의 일원이었다. 아니 비잔티움제국을 '그리스 제국'이라고 고쳐 말할 수 있을 만큼 희랍의 영향이 지대했다. 콘스탄티노플이야말로 '그리스 도시'였다. 키릴문자와 정교회가 비잔티움을 지탱시킨 피이자 살이고 뼈였다. 그 다음 반천 년은 또 오스만제국에 속한다. ‘이슬람의 집’ 아래서 오백년이나 지냈다.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이 자리했던 곳이 이스탄불이다. 지중해 무역을 관장하던 해양 그리스인들 또한 이스탄불에 거점을 차렸다. 그에 견주자면 아테네는 적막한 시골이고 허허한 변두리였다. 훨씬 많은 그리스인들이 아테네가 아니라 이스탄불에서 복닥복닥 살아갔다.

▲ 아테네 대학교. ⓒ이병한

그리스가 서구의 일원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나 19세기이다. 서유럽의 신사조, 민족주의를 가장 먼저 수용한다. 1820년 오스만제국에 속하기를 거두고 '독립국가'를 추진한다. 이스탄불에 맞장을 뜨는 독립전쟁에 서구의 지원이 다대했다. 특히 영국이 앞장선다. 지중해의 패자 오스만을 약화시키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는 양수겸장이 깔려 있었다. 21세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체제 전환'의 논리, 분리 독립을 빙자한 '인도주의적 개입주의'의 원형이다. 독립국가 다음에는 국민국가를 추진했다. 오스만의 다문명세계를 지우고 획일적이고 균질적인 '민족문화'를 만들어간다. 아테네 대학이 들어선 것이 1837년이다. 국문학과 국사학 등 국(가)학을 선도했다. 아랍문자를 배타하고 키릴문자만 전용하는 '국어순화운동'도 전개했다. 이스탄불과 거리를 두는 '그리스 정교회'도 출범하여 국교(國敎)가 되어간다. 비잔티움과 오스만은 공히 '중세'와 '봉건'으로 기각되었다. 반면으로 위대한 고대사를 두드러지게 강조했다. 중세사를 격절시키고 고대사와 근대사를 직결시키는 역사공정이 단행된 것이다. 그 '그리스 사'를 통하여 고대의 희랍과 근대의 유럽이 직통하는 서구문명사의 척추가 세워진다. 희랍문명이야말로 새 유럽(상) 창조의 근간이 된 것이다. 오래 방치되었던 아테네도 새삼 주목을 받게 되었다. 새 그리스의 수도로 삼기로 한다.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펼쳐졌다. 고대의 영광을 현대에 재현시킨다는 야심한 목표 아래 네오클래식 건축물이 곳곳에 들어섰다. '발명된 전통', '상상의 공동체'의 시현장이 된 것이다. 그 신도시 프로젝트 가운데는 아크로폴리스를 허물고 그리스 의회를 새로 짓자는 방안도 있었다고 한다. 실행되지 않았다. 천만다행이다.

▲ 아크로폴리스. ⓒ이병한

2. 붉은 아테네

독립국가와 국민국가를 완수한 다음에는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서유럽의 제국주의를 본받았다. 신생국가 그리스의 영토는 오스만제국 아래서 가장 후미진 곳이었다. 교육수준이 낮고 생활수준도 변변치 못한 변방이었다. 고대 희랍의 영역이 죄다 그리스의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국수주의적 주장이 불거진다. 오스만제국을 그리스제국으로 대체하자는 제국주의적 주장도 솟아났다. 이슬람제국을 정교회제국으로 되돌리자고 했다. 이스탄불을 콘스탄티노플로 되살리자고 했다. 시골 동네 아테네는 어디까지나 임시 수도로 간주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고 비잔티움을 부활시키는 것이 궁극의 목표였다. 그리하여 오스만제국 내 모든 기독교인들을 잠재적인 '그리스 국민'으로 간주했다. 세르비아인부터 루마니아인, 아르메니아인까지 온통 '그리스인'이라고 불렀다. 흡사 내선일체, 만선(滿鮮)일체 같은 동문동족 '희랍인 일체론'이다. 그리스(인) 민족주의/제국주의는 발칸반도에 연쇄 파장을 일으킨다. '오스만인'을 그치는 한편으로 '그리스인'으로도 회수되지 않기 위하여 저마다 민족주의적 각성이 일어났다. 그 소산이 바로 1910년대 발칸전쟁이다. 발칸반도가 유럽의 화약고가 된 것이다. 곧바로 유럽전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되었다. 땅 끝 마을 아테네가 아랍과 유럽을 뒤흔들었다. 꼬리가 몸통을, 그리스가 유라비아를 진동시켰다.


그 '근대 발칸'의 모순이 응축된 곳이 마케도니아이다. 인구 200만의 마이크로 국가이다. 백 년 전만 해도 오스만의 한 주였다. 다양한 종교와 언어와 민족이 공존하는 제국적 모자이크를 구현했다. 그러나 발칸에 불어 닥친 독립국가와 국민국가의 연쇄 속에서 비극의 장소로 전락한다. 그리스도 터키도 불가리아도 루마니아도 세르비아도 마케도니아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 경합하는 영유권 간 기이한 세력균형으로 초소형 국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2017년 이 작디작은 나라꼴도 가관이었다.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린다. 그리스와 터키와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와 세르비아의 일부 영역들이 마케도니아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과격한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리스를 '병합'하자고 열성이었고, 속 좁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도시명인 마케도니아를 국명으로 쓰지 말라며 윽박지르고 있었다. 다시 일백년 전, 이 곳 사람들은 마케도니아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 같은 정체성은 극히 희박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저는 기독교도입니다. 정교회 신자입니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 정통의 말씀이 사라지면서, 입말로 갈라지고 생긴 꼴로 분열하고 국기를 휘날리며 으르렁거리게 된 것이다. 한 카페의 종업원은 '터키식 커피'를 주문하는 동방의 여행객에게조차 사납게 대꾸했다. '이 나라에 터키식 커피는 없다!' 탁, 소리를 내며 탁자에 내려놓는 '마케도니안 커피'는 내가 200일 넘게 즐겼던 그 터키식 커피와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 마케도니아의 키릴 국립대학교. ⓒ이병한


콘스탄티노플부터 이스탄불에 이르기까지 1500년이나 제도(帝都)를 구가했던 도시 또한 양 갈래로 찢어졌다. 아테네를 수도로 삼는 그리스의 건국에 이어 터키 공화국 또한 앙카라를 새 수도로 만들었다. 1920년대 이 분단국가 사이에 대대적인 인구 교환이 단행된다. 오스만 전역을 무대로 살아가던 130만 정교회 신도들이 그리스 영토로 이주했다. 130만은 당시 그리스 총인구의 2할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졸지에 그리스가 되어버린 땅에서 살아가던 60만 무슬림 또한 '터키인'이 되어 생전 가보지 못한 아나톨리아로 떠나야 했다. 이민과 난민의 세기, 고향 상실의 시대였다.


인구 이동은 비단 사람의 교환으로 그치지 않는다. 사람 따라 문화도 이념도 이동한다. 1920년대의 인구 교환이 1940년대 그리스 내전을 촉발한다. 원주민과 이주자, 난민 사이 생활세계의 다툼이 불거졌다. 그리고 곧 이데올로기 투쟁과 결합되었다. 먼저 온 사람들은 기존의 몫을 고수하는 의미에서 '우경화'되어갔고, 뒤늦게 온 사람들은 공정한 대접과 배분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좌경화'되어갔다. 앞선 사람과 늦은 사람 간의 의식 차이가 그리스형 진보와 보수를 규정지어 간 것이다. 그리스에서 좌와 우는 지리적으로도 갈라졌다. 우파들이 서구를 선망했다면, 좌파들은 소련을 동경했다. 단지 이념적 동질성이라고만 잘라 말하기 힘들다. 민간에서 흐르고 있던 러시아에 대한 전통적인 우호감에 바탕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와 종교를 공유하는 공속감이 대단했다. 1924년 창당한 그리스 공산당이 파죽지세로 당력을 키울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하겠다. 공산당을 지지했던 농촌과 어촌, 산촌 사람들의 9할은 마르크스니 레닌이니 관심이 없었다. 키릴문자와 정교회를 통하여 러시아에 친근감을 느낀 것이다. 평등국가 소련의 이상을 예수님의 사랑이 만개한 것이라고 접수했을 법하다.


냉전의 전초전이 일어난 곳도 그리스이다. 1944년 12월 25일, 처칠이 아테네를 방문한다. 나치 독일에 항전하면서 세를 키워가고 있는 그리스 공산당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 '붉은 아테네'를 저지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 공산당의 거점은 북부였다. 유고슬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전투에서 밀리면 유고로 피신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후 그리스로 재진입했다. 그 중 몇몇은 티토와 회동하여 '발칸연방공화국'을 논의했다. 처칠로서는 기겁할 노릇이었다. 소비에트연방에 이어 발칸연방마저 출범하면 서유라시아의 7할이 공산주의 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으로 그치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금 그리스의 위치가 관건적이다. 지중해세계 전체가 위험해진다. 도미노 이론이다. 소련의 영향력이 그리스를 발판으로 서아시아(중동)와 북아프리카까지 미치게 된다. 그러하면 서유럽은 범소련권으로 둘러싸여 완전히 고립되게 된다. 역전의 계기를 그리스에서부터 마련해야했다. 그래서 입안된 것이 봉쇄 정책이다. 공식화된 것은 트루만 독트린이다. 노쇠한 영국을 대신하여 싱싱한 미국이 반공 정책의 총대를 멘다. 그리스를 소련 및 유고에서 떼어내고 서유럽과 연결시키는 특명이 내려졌다. 미국이 주도하여 '붉은 아테네'를 주저앉힌 곳이다. 그리스가 발칸반도에서 유일하게 공산주의에서 벗어난 나라가 된 까닭이다. 1940년대 미국의 그리스내전 개입은 1950년대 한국내전과 1960년대 베트남내전에 개입하는 원형이 되기도 했다. 냉전기 유라시아의 동과 서는 늘 공진화했다.


발칸에서 홀로 떨어져나간 그리스를 미국이 책임졌다. 1950~60년대 원조가 집중된다. 마샬 플랜 가운데서도 특히 그리스에 돈을 쏟아 부었다. 유고의 턱 밑에 자리한, 소련의 지척에 위치한 그리스를 자본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소련의 위성국, 발칸연방의 일원이 아니라 미국의 동맹국으로 운명이 뒤바뀐 것이다. 발칸 유일의 반공국가 그리스는 '에게해의 기적'을 일군다. 연 7% 경제성장을 견인한 주역은 응당 군사정부였다. 군부 주도의 발전국가, '조국 근대화'의 원조이다.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했고, 도시 노동자들은 서유럽, 그 중에서도 분단국가 서독의 공업도시로 이주했다. 이와 같은 '냉전형 그리스'의 하부구조에 걸 맞는 상부구조도 입안되었다. '서구화된 그리스', '서구의 기원으로서의 그리스'가 학문적으로 정립된다. 그리스-로마-서유럽-미국으로 이어지는 대서사가 미국의 주요 대학에서 '냉전학'의 일환으로 확립되었다. 미국의 소프트파워에 힘입어 '그리스 민주주의'라고 하는 20세기의 그리스 신화가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산업화 다음은 민주화이다. 그리스는 또 앞서 달린다. 1974년 민주주의로 이행했다. 1980년대 동아시아와 동유럽 민주화 물결의 선두주자였다. 더불어 '관리된 민주화'이기도 했다. 민주주의 이행의 결실을 좌파들이 낙아채서는 곤란했다. 여전히 소련과 유고가 건재한 시점이었다. 이행 초기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반미 정서가 상당했다. 68혁명의 영향 속에서 좌파 문헌들이 대학가에서 크게 유행했다. 마오쩌둥, 체게바라, 호치민은 물론이요 김일성의 주체사상까지 전파되었다. 아울러 1940년대 그리스 내전의 공산당 게릴라를 선망하는 풍조마저 퍼져나갔다. 1974년은 베트남전쟁 패배로 인도차이나 전역의 공산화를 목전에 두고 있던 무렵이다. 사이공과는 달리 아테네서만큼은 기필코 '반공 민주'를 사수해야 했다. 다시금 그리스를 저 멀리 서유럽과 연결시킨다. 1980년 EEC에 가입한다. 지리적으로 한참 떨어져있고 경제적으로도 수준 차가 현저했건만 무리해서라도 유럽공동시장에 편입시킨 것이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보다도 빠른 진입이었다. 그 후 그리스는 경로 의존성에 따라 이행했다. 자연스럽게 EU의 일원이 되었고, 유로화를 사용하는 나라가 되었다. 역사 또한 그리스 편인 듯 했다. 소련은 붕괴되었고, 유고도 해체되었다. 발칸과 동유럽의 신생국가들은 뒤늦게 사 그리스 노선을 추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스는 '후발주자 가운데 선두주자'였던 것이다. 그 영광의 선물로 하달된 것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다. 150년 줄기찬 서구화가 달콤한 결실을 맺은 듯 보였다. '마지막 축제'가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3. Grexit : 귀농, 귀향, 귀의.

공든 탑이 무너졌다. 날개 없이 추락했다. 이루기에는 수십 년이 걸려도, 허물어지는 데는 5년이면 족했다. 와르르, 20세기의 '그리스 신화'가 붕괴되었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그리스는 나날이 비상시국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유럽중앙은행과 IMF의 구제금융에도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경기후퇴보다는 공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가계 수입은 1/3 수준으로 줄었다. 국가 경제 규모는 3/4으로 축소되었다. 평균 실업률은 30%를 오르내리고, 청년 실업률은 60%를 넘어섰다.


올림픽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빚잔치였다. 아니 민주화 및 유럽화 이래 줄곧 부채국가 모델을 심화시켰다. 1980년대 이후 그리스에서는 중도좌파 정당이 장기 집권했다. 외부로는 유럽과의 통합이 심화되었다. EU 자금에 의존하는 국가 경영이 만성화된다. 민간의 활력보다는 국가에 의존하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그 국가는 다시 EU에 의탁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실제 실력 이상으로 신용을 보장받아 저금리로 유럽에서 돈을 빌려다 국내 복지를 해결했다. 자국민에 대한 조세를 강화하기보다는 EU에서 융자를 취하는 방법으로 땜질 처방을 해온 것이다. 총체적 개혁을 단행하면 정권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딜레마가 병을 더욱 키운 셈이다.

유로화 도입으로 그 악성 구조는 일종의 체제로 굳어졌다. 티끌모아 태산, 만성적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30년 누적된 체제의 모순이 금융위기의 도래와 함께 일순에 폭발해 버린 것이다. 하더라도 그리스 탓만 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겠다. EU의 모순 또한 동시에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통화주권과 재정주권 사이 갈등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자국 통화가 없는 그리스에서는 이미 중앙은행이 기능하지 않는다. 그리스 정부가 주도적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 자체가 진즉에 사라져버렸다. 위기 순간에 더더욱 철저하게 브뤼셀(과 베를린과 워싱턴)에 종속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중앙은행과 베를린의 금융자본에 그리스의 운명이 볼모로 잡힌 것이다. 대학가에서는 고색창연한 '종속경제론'이 난데없이 붐을 일으켰다. 20세기 나치독일의 군사적 점령에 이어 21세기에는 독일의 경제력에 점령되었다는 극우/극좌 정당들도 출현했다. 민주화 이래 견고하던 중도 좌/우파 양당제를 깨뜨리고 급진좌파연합 시리자(SYRIZA)가 정권을 접수할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시리자 등장을 전후하여 그리스의 유럽/유로 이탈, '그렉시트' 논의가 빗발쳤다. 하여 위기의 그리스는 비단 그리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로의 위기이다. EU의 위기이다. 서구가 위기이다. 근대가 위기이다. 일국의 예외적 상태가 아니라 21세기의 뉴노멀이다. 서구적 근대의 황혼이다. 서세의 말세이다.


그리하여 시리자 집권을 '좌파 정치의 부활'로 접수해서만은 곤란하다. 표면만 짚는 것이다. 겉만 훑는 것이다. 좌/우에 고착되어서는 치프라스 총리가 가장 자주 회동하는 인물이 러시아의 푸틴이라는 점을 쉬이 설명하기가 힘들어진다. 극좌와 극우의 회합이 아니다. 200년짜리 좌/우 이데올로기가 옅어지면서 1000년이 넘도록 장구하는 문명이 재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껍데기가 벗겨지면서 진피가 돋아나고 살과 뼈와 피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문자를 공유하고 신앙을 공유하는 동로마제국의 후예들이, 비잔티움과 동방정교회의 후신들이 코드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비서구적 세계질서의 재건에 의기투합하고 있는 것이다.

▲ 피레우스 항구. ⓒ이병한


'서에서 동으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일방에서 동/서 쌍방으로 균형을 회복해간다는 뜻이다. 지난 200년을 통으로 들어낼 수야 없는 법이다. 1820년 이래 200년도 이미 그리스의 현대사로서 온축이 된 것이다. 다만 편향을 거두고 중용을 취해간다. 동과 서 사이에, 새것과 옛것 사이에 역동적 균형을 회복해간다. 하여 피레우스에 한창 조성 중인 신항만 건설 또한 21세기의 '뉴노멀'에 부합한다고 하겠다. 중국 자본에 의하여 만들어진다고 하여 그리스가 친중 국가가 될 가능성은 터럭 하나 없다. 중국이 그리스를 속국 마냥 만들 의도가 있는지도 의문일뿐더러, 그런 실력이 있기는 한 것인가 조차 심히 의심스럽다. 즉 피레우스에서 중국의 서진을, 중국의 유럽 진출만 보는 것도 단견이다. 외눈박이, 사시 눈이다. 복안으로 겹눈으로 읽어야 한다. 목하 도드라지는 것은 희랍세계의 귀환이다. 피레우스 항만을 통하여 재차 그리스가 아시아와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에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로 스페인으로 영국으로만 향하지 않고, 터키로 이집트로 시리아에도 가닿는다. 고대 희랍세계는 근대적 영토국가가 아니었다. 지중해의 동서남북으로 도시와 도시를 잇는 해양네트워크였다. 그 오래된 바닷길이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과 아랍을 엮어 유라비아로,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 유라시아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허브로서 왕년의 아테네가 재림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를 유럽만이 독점했던 '유사 역사학'(Fake History)의 세계상이 해체되고 있다. 가짜 역사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그리스는 다시금 아프리카와 오리엔트와 재회한다. 그리스 세계가 복수화되고 입체화되고 '민주화'된다. 그리스의 역사 또한 서구적 근대라는 단막극을 뒤로 하고 지구적 근대로 이행하는 대서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고쳐 쓰여질 것이다. 다른 역사와 다른 미래가 공진화한다. 다른 백년과 지난 천년이 상호진화 한다.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재균형이고, 새균형이다.

▲수출용 올리브 오일. ⓒ이병한

외부서는 시리자 정권의 행보에만 관심이 쏠려 있지만, 현지에서 내 눈을 찌른 것은 귀농과 귀향 바람이었다. 2009년 이후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경제 위기가 지속되면서 수만 명의 실직 청년들이 아테네를 떠나 고향으로 농촌으로 돌아가고 있다. 시골의 가족들과 재결합하고 어릴 적 친구들과 재회하며 땅을 일구고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도시에서는 경기 순환의 사이클에 따라 직장이 사라진다. 화폐 경제에서 이탈되면 살아갈 방로가 닫혀버린다. 하더라도 시골로 돌아가면 자연의 순환에 따라 먹고 살 길이 열리게 된다. 고용 없는 탈산업사회의 도래가 전(前)산업사회의 재귀를 촉진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이래 8년간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11% 늘었다고 한다. 농촌에서 35세 이하의 비율이 15%까지 치솟았다. 20세기 산업화/민주화 시대와는 정반대 방향의 인구 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21세기의 '신청년'들이 꾸려가는 '청년농부연합'이라는 조직까지 탄생했다. 시리자의 집권에도 나라꼴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고 낙담한 이들이 대거 하방한 것이다. 이들이 의기투합하여 유기농 올리브 오일을 생산하고, 천연 화장품과 비누, 샴푸를 만들고 있었다. 당장은 유럽이 주된 시장이지만 머지 않아 할랄 인증까지 받아서 아랍 시장까지 진출할 것이라며 의욕을 태운다. 마냥 장밋빛으로 포장하지는 않겠다. 시골 살이, 녹록치 않다. 넉넉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표정 하나만은 참 밝았다. 다시는 사방이 벽으로 막힌 사무실로 돌아가 하루 종일 모니터만 보면서 살지는 않겠노라고 한다. 아테네의 그 우울한 공기와는 달리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자력으로 자강하는 자생력이 반짝거린다.

▲올리브 나무 농장. ⓒ이병한

삶의 태도 또한 달라지는 것 같다. 아카데미에서 설파하는 인간중심주의, 휴머니즘을 감히 운운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간신히 사람이 자리할 뿐이다. 시간과 공간 사이 인간이 겨우 위치할 따름이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의 자유를 한껏 드높이기보다는, 천년만년억년 가는 천지인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일조하는데 정과 성을 바쳐야 한다. 하늘 아래 겸허하고 대지 위에 경건해짐으로써, 인성과 신성을 합치시켜 간다. 고대의 희랍인들은 '민주 시민'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신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과 속의 가교자였다.


18년 만에 다시 찾은 그리스에서 내 눈에 유독 들었던 것 또한 정교회 성당이었다. 검붉은 토지와 지중해의 새하얀 햇살 아래 푸르게 빛나고 있는 성당들이 참 많았다. 지난 세기에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스가 정교회 국가라는 점 또한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과연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처처에 자리한 성당들이 이제야 시각을 뚫고 지각까지 침투해 들어온다. 그리스인들은 성경 또한 로마자가 아니라 키릴문자로 읽는다. 그리스인의 영혼은 키릴어로 새겨져 있다. 구교와 신교가 기독교문명의 전부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서로마세계, 반쪽자리 유산이다. 또 다른 로마, 동로마는 정교회 세계였다. 제2의 로마는 키릴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동/서로마와 동/서 교회를 겹눈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유럽 또한 깊이 파악할 수 있다. 그 동/서 유럽이 만나고 갈라지는 경계선에 우크라이나가 자리한다. 비로소 우크라이나 사태 또한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키예프로 이동한다.

▲ 정교회 성당.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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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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