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노동자도 인간"에서, 이젠 '주3일 노동 사회'로

[장석준 칼럼] 노동자 대투쟁 30주년에 부쳐

올해는 1987년 6월 항쟁 30주년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전개된 노동자 대투쟁의 30주년이기도 하다. 하지만 6월 항쟁 30주년이 촛불 항쟁 승리와 맞물려 새삼 뜨겁게 기념된 데 비하면 노동자 대투쟁은 관심에서 비껴나 있는 것만 같다. 하기는 민주노총 위원장이 아직도 감옥에 있으니 잔치를 벌일 분위기도 아니다.

게다가 이제는 6월 항쟁의 영광만큼이나 한계가 뚜렷이 보이는 것처럼, 노동자 대투쟁 역시 노동운동의 현 상황과 겹쳐 결코 아름답게만 기억되지 않는다. 한국 노동운동의 문제로 누구나 짚는 기업별 노동조합 체제, 대기업 혹은 공공부문의 정규직 남성 중심 투쟁, 임금 인상에 집중된 관심 등등이 모두 1987년 뜨거운 여름의 산물이다. 그때 전 세계에서 가장 전투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기반이었던 것이 이제는 다 덫이나 굴레 혹은 저주받은 숙명 취급을 당한다.

이렇게만 보면 노동자 대투쟁은 '기념'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기념'보다는 그 후 계속 쌓여가기만 한 한계와 오류의 '성토'가 격에 맞는 대접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인간'과 '시민'을 물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 상황을 30년 전에 투영한 결과다. 똑같은 기업별 노동조합이고 똑같은 대공장 남성 노동자 중심이었지만 그해 여름 사람들의 시선은 지금 대기업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것과는 분명 달랐다. 물론 언론의 공격과 이에 휘둘린 중산층의 반파업 여론은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6월 항쟁이 끝나자마자 곳곳에서 파업이 터져 나오는 광경에 다들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것은 누구의 눈에나 당위적이고 필연적인 폭발이었다. 그래서 그만큼 정당한 봉기였다. 거기에는 어떤 숙연함마저 느껴지는 지적, 도덕적 힘이 있었다. 이것이 30년 전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공장과 공단을 뒤흔든 수많은 불법 파업들이 지금의 합법 노동조합 활동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던가? 이념이나 사상?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민주노동조합 1세대 운동가가 된 이들이 국제 노동운동의 전통을 받아들인 것은 오히려 이후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다. 사회주의(혹은 당시 표현대로 '노동해방' 이념)는 1987년 여름의 경험을 사후에 재구성하고 의미 부여하는 틀이었지 그 여름을 낳은 동력은 아니었다.

그럼 지금과는 달랐던 운동 조직이나 양상? 이미 위에서 말한 것처럼, 현재 비판 받는 전통이 모두 이때의 투쟁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비밀은 다른 곳에 있었다.

당시 투쟁 현장마다 빠지지 않은 구호는 전태일 열사의 마지막 외침을 이어받은 한 문장이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이 구호는 누가 지령한 것도 아니었고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 이제 막 군부 독재로부터 첫 번째 항복을 받아낸 나라의 노동자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함께 토해낸 외침이었다. 그리고 이 외침 앞에서는 파업 진압의 이유와 책임을 지닌 이들조차 정당성이 저쪽에 있는 게 아니냐는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해 여름 노동운동은 ‘인간’의 문제를 제기했다. 인간이란 누구인가? 노동자는 인간인가, 아닌가? 노동자가 인간이라면, 그 인간은 동료 인간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노동자도 인간이라면, 인간 세상은 이 새로운 발견과 확인에 따라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노동자들은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단순한 문장을 통해 사회에 이런 물음들을 던졌다. 노동운동이 이렇게 묻는 순간에 그간 굳어 있던 사회 세력 관계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런 물음은 파업 투쟁을 거치며 좀 더 구체적인 물음으로 변주됐다. 민주노동조합을 인정하고 교섭에 임하라는 요구에 정권과 재벌은 구사대와 전투경찰의 폭력으로 대응했다. 지금은 욕만 먹는 기업별 노동조합이지만, 이때는 국가권력과 대결해야만 만들고 지킬 수 있는 조직이었다. 헌법에 보장된 '시민'의 권리인데도 그러했다. "노동자도 인간"이라 외치며 공권력과 대치한 노동자들은 6월 항쟁 뒤의 한국 사회에서 '시민'의 권리가 실체인지 아닌지 온 몸으로 물은 것이다.

즉, 노동운동은 '시민'의 문제 또한 제기했다. 노동자도 인간이기 위해서 그에게는 어떤 시민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가? 기성 권력에 대등하게 맞서기 위해 시민은 개인에 머물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그는 조직을 만들고 이를 통해 집단행동을 펼치며 협상할 수 있어야 한다. 30년 전에 노동조합을 처음 결성한 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앞장서서 이 권리를 실행했다. 그런다고 공권력에 짓밟히고 그럼에도 한 발 두 발 전진할 때마다 이 권리는 조금씩 실체를 갖춰갔다. 그렇게 시민적 권리의 전선은 좀 더 앞쪽으로 이동했다.

1987년에 노동운동이 던진 이런 큰 물음들은 운동 세력이 기획한 게 아니었다. 당시 한국 자본주의의 조건이 낳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민주화와 거의 동시에 시작된 3저 호황 이전에는 대다수 노동자가 저임금의 늪에서 헤매고 있었기에 임금 인상 요구를 동반한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구호가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정권과 재벌이 신생 노동조합들을 폭력 탄압했기에 노동자는 민주 시민 중에서도 전위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상황의 산물이었다 하더라도 한국 사회를 더 이상 과거의 연속일 수만은 없게 만든 위대한 물음들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인간이란 누구인가? 시민은 어떤 권리의 주체여야 하는가? 노동자들이 이 두 물음을 던졌을 때에 그들은 누구도 쉽게 정당성을 부인할 수 없는 지적, 도덕적 힘의 주인공이었다.

21세기에 던져야 할 인간/시민의 물음 – 노동시간의 새로운 분배

시간을 건너 뛰어 2017년 노동운동으로 돌아오자. 노동조합의 외양은 1987년과 비교할 수 없게 성장했지만, 노동운동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정반대 방향에서 그때와 비교가 안 된다. 특히 노동자 대투쟁의 중심이었던 대공장 노동조합들(울산의 현대 계열사나 남동해안 조선 사업장들)은 이제 문제제기자나 문제해결자는커녕 문제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다.

30년 전에 비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더 이상 객관적 상황 덕택에 노동운동이 자동으로 지적, 도덕적 힘을 확보할 수는 없게 됐다는 점이다. 가장 치열하게 임금 인상 투쟁을 벌인 노동자들은 중산층이 됐고, 요즘은 노동조합 만들었다고 육해공 진압 작전을 펼치지는 않는다.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울림과 시민의 기품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한 세대 전의 역사일 뿐이다.

노동자 대투쟁 때와는 달리 이제는 노동운동 스스로 이 시대에 던질 인간과 시민의 물음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물음을 중심으로 전략을 새로 짜고 운동을 재구성해야 한다. 물론 그 동안 이런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정신을 새로운 형태로 이어가려는 진지한 노력이었다. 최근에 그 연상선에서 최저임금 전선의 전진을 이뤄낸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비정규직 쟁점은 노동운동이 앞서 제기한 게 아니라 신자유주의 공세에 뒤늦게 대응한 것이었다. 정규직, 비정규직(더 나아가서는 영세자영업자까지)을 불문하고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21세기 자본주의에서 여전히 인간됨/시민됨의 미해결 과제를 안은 존재임을 선명히 제시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럼 우리 시대에 이런 물음을 집약하는 쟁점은 무엇일까?

황광우 전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은 최근작 <촛불철학>(풀빛, 2017)에서 그런 역할을 할 과제 하나를 제안한다. 그것은 '주3일 일하는 사회'다. 다들 평균 주3일만 일할 정도로 노동시간이 대폭 단축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자유시간이 확대된 사회로 나아가자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3일만 일하는 사회에서는 지금 같은 정규직, 비정규직 구별은 점차 사라진다. 오히려 중요한 구분은 주4일 노동과 주2일 노동이다. 지금보다 대폭 단축된 평균 노동시간 안에서 노동하는 사람 스스로 노동시간의 길이를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게 가능하려면 노동 소득 말고도 주요 소득원으로서 보편 복지(완성된 형태는 아마도 기본소득일 것이다)가 발전해야 하고, 노동시간의 불평등한 분배를 이윤 확대에 활용하는 자본주의 고용 관계가 변화해야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노동운동의 확고한 장기 목표다. 황광우는 그것이 노동시간 단축/자유시간 확대라고 역설한다. 물론 노동시간 단축은 이미 19세기부터 세계 노동운동의 중요한 과제였다. "8시간 일하고, 8시간 쉬고, 8시간 잔다"는 지난 몇 세대 동안 노동자들 사이에 전승된 가장 구체적이고 명확한 철학이었다. 한국 노동운동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은 주요 과제 목록에서 한 번도 빠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촛불철학>은 단순히 이런 전통을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머물지 않는다. 황광우는 "좋은 삶 혹은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 이 결론에 도달한다. 국가와 자본이 반복 학습시킨 답안지를 지우고 우리 스스로 다시 물어보자. 인간은 어떤 삶을 사는 자야야 하는가? 황광우가 제시하는 답은 "노동하고 창조하는 삶", "소통하고 연대하는 삶", "끊임없이 배우고 깨닫는 삶"(<촛불철학> 179~182쪽)이다.

이런 삶에 근접하기 위해 반드시 실현해야 할 과제가 노동시간 단축/자유시간 확대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강제노동에 드는 시간을 최소화해야 그만큼 늘어난 자유시간에 우리는 인간에 값하는 삶을 펼칠 수 있다. 창조하고, 소통하고, 학습할 수 있다.

21세기에는 이런 인간됨의 도전이 더욱 가능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더욱 절실히 필요하게 됐다. '제4차 산업혁명' 논의야 거품이 많이 끼기는 했다. 그러나 얼마간 회의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현대 자본주의가 K.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비판 요강(그룬트리세)>에서 예견한 "일반적인 사회적 지식 자체가 직접적 생산력이 되는 단계"로 성큼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식이 직접적 생산력이 되는 단계"에서 인간의 핵심 자질은 창조하고, 소통하며, 학습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됨의 기준에서 배제당하는 이들에게 남는 선택지는 강제노동과 보조금을 왔다 갔다 하며 항상 불만족스러운 소비에서 그나마 행복을 찾는 삶이다.

우리 시대에 노동운동은 이런 운명을 거부하고 반전시키는 대중운동이어야 한다. 과학기술혁명 시대에 걸맞는 인간됨의 자격과 능력을 보편화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자유시간 확대가 그런 보편화의 절대적 요건이다. 노동시간의 새로운 분배를 중심으로 여러 시민적 권리를 재구성하고 재배치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촛불철학>의 결론에 완전히 동의한다. 황광우가 제안하는 '주3일 일하는 사회'라는 비전에서 새 세대 한국 노동운동이 한 세대 전 노동자 대투쟁 이상의 지적, 도덕적 힘을 확보할 가능성을 본다. 30년 전에는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구호 아래 민주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이 그런 힘의 원천이었다면, 이제는 정규직, 비정규직을 가로지르는 노동시간/자유시간의 새로운 분배를 외치고 실현해나감으로써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다.

노동시간의 새로운 분배를 중심으로 재구성되는 노동운동

누가 뭐래도 한국 자본주의를 가장 잘 설명하는 한 단어는 역시 '압축 성장'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비극 또한 이 말 하나로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압축 성장할 수 있지만, 이에 맞서는 사회운동은 압축 성숙할 수 없다. 그래서 노동운동을 비롯한 저항 세력은 늘 한국 자본주의의 숨 가쁜 변화에 추월당해왔다.

노동자 대투쟁으로 처음 본격적 삶을 시작한 한국 노동운동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 노동운동이 경험했던 시간을 반복할 수 없었다. 노동조합, 협동조합, 지역사회를 조직하면서 반자본주의 이념을 구심 삼아 독자적인 생활 세계를 구축하던 몇 세대의 시간 말이다. 1987년에 첫 울음을 울 때에 한국 노동운동은 이미 대량소비와 대중문화에 포위당한 상태였다.

이런 토대 구축 뒤에 서구 노동운동은 20세기의 고도화된 자본주의와 대결, 타협하며 노동권, 사회권을 확대했다. 달리 말하면, 복지국가(사회국가)를 건설했다. 이 과제에서도 한국 노동운동은 시대적 요청과 주체 역량 사이의 심각한 어긋남을 경험했다. 아니, 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성장 정도로 봤을 때에 한국 사회에는 이미 상당한 재분배 제도들이 구축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서구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노동운동이 이를 관철시킬 힘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과 소비의 변화라는 새로운 도전까지 밀려오고 있다. 노동운동으로서는 '과거'를 잃어버리고 '현재’를 완성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미래'와 마주한 격이다. 한꺼번에 세 시대의 도전에 직면했다고 할까.

이럴 경우 해법은 가장 최근의 도전을 중심으로 미완의 과제들을 재구성, 재배열해서 사실상 하나의 과제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자유시간 확대는 중요하다. 21세기의 이 핵심 과제를 추진하면서 '잃어버린' 19세기와 '미완의' 20세기를 함께 실현해가야 한다.

가령 우리에게 비자본주의적 생활 세계를 구축하는 과제는 곧 늘어난 자유시간을 채울 창조와 소통, 학습의 거점들을 시민들 스스로 만드는 일이다. 복지국가를 수립하는 과제는 곧 노동시간의 새로운 분배에 부합하는 방향에서 보편 복지의 틀을 짜는 일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시간 분배를 협상하고 계획, 집행하는 과정에서 경제 민주주의를 확대, 심화해야 한다.

'주3일 일하는 사회'는 이 모든 비전을 압축하고 상징한다. 어느 나라 노동운동보다도 극적인 첫 30년을 보낸 한국 노동운동은 이제 인간의 시간을 되찾는 운동으로 거듭나야 한다. 시간이란 결국 우리 삶의 모든 가능성의 다른 이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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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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