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18년 수감, 정이형을 아십니까?

[장석준 칼럼] 아쉽게 꺾인 고려혁명당의 이상

얼마 전 영화 <박열>을 보았다. 일본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맞선 두 젊은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투쟁을 마치 지금 우리 주위의 일처럼 생생히 그리고 있었다. 특히 천황제와 대결하며 식민지 민중과 연대한 일본인들을 진지하게 다룬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국 영화의 폭과 깊이를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상투적인 역사 인식을 훌쩍 뛰어넘는 성취였다.

박열 하면 따라붙는 것 중 하나가 일제하 최장기수였다는 사실이다. 1923년에 체포돼 1945년 일본 패전으로 석방됐으니 무려 22년 넘게 갇혀 있었다. 그런데 박열은 일본의 감옥에 있었다. 그럼 조선 땅 안에서 가장 오래 갇혀 있었던 항일혁명가는 누구일까?

나는 최근에야 누구인지 알았다. 정이형이라는 이다. 1927년에 하얼빈에서 일제에게 잡혀 1945년 해방의 그날까지 18년 넘게 포로의 삶을 산 정의부 간부다. 국사 교과서에 흔히 독립군 3대 조직처럼 나와서 시험 준비한다고 이름만 달달 외우던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중의 바로 그 정의부다.

정이형을 알게 된 계기는 역사학자 박환 교수(수원대)가 쓴 짧은 전기 <만주 지역 민족통합을 이끈 지도자 정이형>(역사공간, 2015)을 통해서였다. 처음 책을 손에 들었을 때는 만주를 누빈 여러 무장 항일혁명가 중 한 사람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이었다. 그는 망명지에서든 해방 조국에서든 일관되게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융합을 추구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이기도 했다.

학계의 현대사 연구가 쌓이면서 그간 몰랐던 항일혁명가들을 알아가는 일은 내게는 늘 뜻깊은 공부였다. 그들을 알아갈수록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이 드러나고 그만큼 가야 할 길이 더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새로 알게 된 이름, 정이형도 분명 그런 길의 표지판이다. 그래서 소략한 지면으로나마 그의 이야기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항일운동의 86세대였던 3.1운동 세대의 한 사람

▲ 정이형. ⓒ국가보훈처
정이형은 1897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것은 태어난 해다. 86세대 이전에 이미 한국 현대사에는 강렬한 집단적 투쟁 경험을 공유하며 유독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배출한 세대들이 있었다. 1870년대 후반~1880년대 초반 태생인 세대는 막 세상에 눈 뜰 시점에 만민공동회 운동을 겪으며 민주공화주의 제1세대이자 민족주의 항일운동의 중심이 됐다. 이동휘, 이승만, 김구, 안창호, 신채호, 김규식 등이 이 세대다.

그 뒤를 잇는 것이 3.1운동 세대다. 1900년 전후해 태어난 세대이고, 10대 말~20대 초에 만세 시위에 앞장선 이들이다. 항일운동의 86세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아니, 깊이 면에서는 오히려 86세대가 20세기 말의 3.1운동 세대라 해야 맞다) 수많은 혁명가들을 배출했고, 대다수 사회주의 항일운동가들이 이 세대다. 좌우를 불문하고 여성주의자도 이 세대가 처음이다. 알만한 이름만 대도 김원봉, 조봉암, 박헌영, 이재유, 김산(장지락), 박열, 함석헌 등이 있다. 1897년 생인 정이형은 바로 이 세대의 일원이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그가 평안북도 출신이라는 점이다. 정이형의 부친은 관서 지방에서는 흔치 않았던 대지주였다. 집안사람 중 어린 정이형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난 이복형 정원익이었는데, 그는 서북학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독립군을 후원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사망했다.

평안도는 조선 왕조 내내 성리학적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 그래서 차별 받다가 홍경래의 난도 일어났지만, 또 그래서 신문물을 접하는 기회만 열리면 조선 팔도 중 가장 열렬히 새 이념을 빨아들이기도 했다. 삽시간에 개신교의 본거지가 된 것도 그러했고, 정원익이 속했던 서북학회 등을 통해 근대적 민족주의 열풍이 분 것도 그러했다. 그래서 10대에 접어든 정이형은 나라 없는 소년이었지만, 이미 이 사실을 잠자코 받아들일 수 없는 한 명의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정이형이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계기 역시 그 세대의 다른 이들처럼 3.1운동이었다.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에 그는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등 국내에서 운동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1922년 형 정원익이 고문을 받다 사망하자 나라 밖으로 나가 무장투쟁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한창 혈기왕성하던 25살의 그가 찾아간 곳이 서간도의 독립군 조직인 대한통의부였다.

이념 갈등 속에 피어난 고려혁명당의 이상

목숨 걸고 찾아간 독립군 근거지였지만, 그곳은 그곳대로 어수선했다. 일본군의 토벌 작전만 문제가 아니었다. 독립군 사이에도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이념 차이가 빚은 동족상잔이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충돌이 아니었다. 좀 뒤에 가면 두 세력이 주로 대립하게 되지만, 정이형이 막 통의부를 찾았을 때는 복벽파와 공화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복벽파란 일제를 몰아내고 조선 왕조를 복원하겠다는 왕정복고파였다. 반면 공화파는 일제로부터 찾은 새 나라가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유생 신분으로 의병을 조직했던 이들이 만주에서도 복벽파로 활동한 반면 대다수 민족주의자는 물론 공화파였다.

정이형이 서간도에서 활동을 시작할 무렵에는 복벽파 지도자 전덕원이 이끄는 무리가 공화파 간부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복벽파의 총구는 급기야 공화파의 정신적 지주 양기탁을 겨냥하기에 이르렀다. 영국 기자 배설(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냈고 비밀결사 신민회의 중심이었던 그 양기탁 말이다.

이 대립 구도 속에서 젊은 정이형은 당연히 신진 공화파 쪽에 섰다. 정이형보다 8살 많은 오동진과 뜻이 맞아 서간도 항일무장투쟁을 젊은 세대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 결과가 1924년에 출범한 정의부였다. 정이형은 정의부 의용군 제6중대장을 맡아 국내 습격 작전을 펼쳤다. 이때 정이형처럼 부상한 인물 중 한 사람이 1930년대 만주에서 민족주의 계열로는 가장 마지막까지 대일 항전을 펼친 양세봉이었다.

군정부 성격의 정의부 외에 별도로 정당도 결성했는데, 이 당의 이념과 구성이 흥미롭다. 일단 당명은 고려혁명당이었다. 창당의 첫 번째 축은 물론 양기탁, 오동진, 정이형 같은 이전 통의부 공화파-정의부 중심 세력이었다. 그런데 이들만이 아니었다.

천도교 혁신파가 결합했다. 천도교 혁신파는 천도교 내에서 상쟁하던 신파, 구파 모두와 선을 긋고 항일운동에 적극 뛰어든 흐름이었다. 이들은 동학에 사회주의를 접목시켜 더욱 철저한 평등 사상을 다지려 했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가 이 흐름을 이끌었고, 그가 간도 정의부와 국내 천도교 조직을 잇는 역할을 했다.

여기에 형평사가 더해졌다. 형평사는 조선인 내부에서 차별받던 백정의 해방운동이었다. 형평사 간부이면서 천도교도였던 이동구가 최동희의 설득으로 정당 건설에 함께 했다. 고려혁명당이 국내에 일정한 사회적 기반을 확보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4월 5일에 길림에서 창당했는데, 이날은 동학 교조 최제우의 득도를 기리는 천도교 기념일이었다. 이때 채택한 강령은 "모든 계급적 기성제도와 현재 조직을 일체 파괴"하여 "자유평등의 이성적 신사회를 건설"한다고 천명했다. 또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반항"을 언급했다. 당략(당의 전략이라는 뜻)에서는 "동양운동의 필요상 제3국제공산당[코민테른]과 합치하는 전략을 취한다"는 항목도 있었다.

고려혁명당은 이렇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뒤섞이며 동학과 사회주의가 만나는 조직이었다. 하지만 이 뜻밖의 융합은 더 많은 발전의 시간과 기회를 허락받지 못했다. 일제가 만주에 진출해 탄압의 포위망을 좁혀오면서 만주와 국내를 잇는 혁명정당이 되려던 고려혁명당의 원대한 꿈은 무산됐다. 정이형도 그 와중에 체포돼 처음에는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바뀌어 일제하 국내 최장기수가 됐다.

불발된 가능성이 너무도 아쉽다. 토착 평등 운동과 국제적 평등 운동이 일찍이 한 몸이 됐더라면, 과연 어떤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었을까? 이런 사상-운동이 준비됐더라면, 새 나라 건설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었을까?

다만 정의부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청천이 제헌국회에서 펼친 활동으로 얼마간 짐작은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청천은 헌법에 '민족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못 박아야 한다고 주장했고(영어로는 National Socialism이니 독일 나치즘을 연상시키지만,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경제 관련 진보적 조항들을 관철하는 데 앞장섰다. "경제질서는 (…) 사회정의의 실현 (…)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는 제84조(현행 헌법 경제민주화 조항인 제119조의 원형)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경제적 조직화운동이 필요하다

정이형의 옥중 생활은 감옥 밖 투쟁의 연장선이었다. 같이 투옥된 공산주의자들과 옥중 연합전선을 구축하는가 하면,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이곳에 이송된 영국군 포로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그러다 대전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정이형의 정치 활동은 항일운동 중에 그가 걸은 노선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방향 그대로였다. 여운형,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고,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으로 선출돼 친일파 처리 특별법 제정에 앞장섰다. 조봉암 등과 함께 좌우합작노선 소장파 조직이라 할 수 있는 민주주의독립전선준비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고, 분단 위기를 앞두고 김규식이 이끌던 중도파 대연합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해방공간의 여느 중도 좌우파 인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무렵 정이형이 쓴 한 편의 글이 내 눈길을 붙들었다. 해방 공간의 한 정객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메시지가 거기에 있었다. 해방의 그날까지 감옥에 있던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함께 만든 8.15출옥혁명동지회의 기관지 <혁명> 창간호(1946년 1월)에 실린 "민족조직화운동에 대하여"다.

이 글에서 정이형은 정치조직, 즉 정당도 이야기한다. 당이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정당들 사이에 협의와 타협이 이뤄지지 않는 게 문제라는 요지다. 정당 분립 자체를 당파싸움과 동일시하던 당시의 평균적 인식에 비하면 사뭇 현대적인 다원적 정치관이다. 그러나 이 글의 백미는 여기에 있지 않다. 오히려 다들 정당만 이야기하고 중요시할 때 정이형은 다른 조직화를 함께 논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이야기다.

"현재 우리나라의 농민과 상민과 노동자가 유기적 연락을 갖지 못한 것은 실로 유감천만인 것이다. (…) 현재 농업단계에 있는 우리는 농민으로서 노동자 될 수 있는 농장과 공장의 연락, 농촌과 도시의 연결이 필요한 동시에 노동자, 농민이 관련되는 조직이 필요하다. 현재 중간 상인의 존재는 극단 시간 내에 정리하여 민족 내부에서 흡혈기생적 존재가 없도록 국민경제상 절대 필요한 구매조합으로 전국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정치적 조직화운동과 동시에 긴급한 것은 경제적 조직화운동인 것이다. 문화 방면에서 있어서도 역시 동일한 원리 하에 조직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민족을 영원히 살려내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조직화운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박환, <만주 지역 민족통합을 이끈 지도자 정이형>, 134쪽에서 재인용)

정치적 조직화만이 아니라 경제적 조직화, 문화적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노동조합은 물론이고 생산자 협동조합, 소비자 협동조합이 조직돼야 한다는 것이다. 새 나라 모든 시민은 이런 대중조직들로 묶여 조직 내부의 민주적 의사결정과 조직 간 협상과 합의로 사회생활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글에서 정이형은 표트르 크로포트킨도 인용하는데, 크로포트킨이 꿈꾼 사회가 대략 이런 모습이었다. 비슷한 흐름으로는 20세기 초 영국의 길드사회주의가 있다.

해방 공간에서는 다들 좁은 의미의 정치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심지어는 대다수 사회주의자들도 노동조합이나 농민조합을 정당의 동원 대상쯤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이런 속에서 정이형은 오히려 다양한 자주적 결사체들로 촘촘히 조직된 시민사회가 새 나라의 기본 토대임을 강조했다. 이런 토대를 갖추는 일이 곧 경제 민주화의 핵심임을 일깨웠다. 2016년~2017년 촛불항쟁 이후에도 한국 사회가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는 숙제를 정이형은 70년도 더 전에 제기한 것이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정이형의 말년은 스산했다. 남북협상에 참여했지만, 분단은 막지 못했다. 다른 남북협상파와는 달리 제헌국회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당선되지는 못했다. 비록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거나 이승만 정부에게 탄압 당하는 비극은 피했지만, 1956년 채 뜻을 펴지 못한 채 병사했다.

그러나 그의 족적은 끝내 망각되지는 않았다. 그의 메시지는 마치 처음부터 2017년의 한국 사회를 향했던 것처럼 우리를 다시 찾아왔다. 그간 대한민국 역사에 오롯이 담지 못했기에 오히려 미래의 끊임없는 참조점이 돼야 할 이름들, 여운형, 조소앙, 조봉암…. 이런 숱한 이름들 곁에 이제 이름 하나를 더해야겠다. 정의부 중대장이자 고려혁명당 당원 정이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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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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