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집은 무엇인가?

[서리풀 논평] 이젠 '주거복지'다

일부 지역의 집값을 잡기 위한 대책이 다시 등장했다. 이른바 '8.2 부동산 대책'. 날짜를 박아 특정 대책의 이름을 붙이는 나라는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집값, 부동산 대책이라니. 참으로 한국적 현상이 아닌가 한다.

정부가 발표한 대책과 그에 대한 반응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책을 반기는 쪽, 미흡하다는 쪽, 반대하거나 냉소하는 쪽, 모든 반응의 내용과 근거가 그리 낯설지 않다. 집과 부동산은 전문가 아닌 사람이 없는 데다 워낙 고질적 문제이니, 그렇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판이다(이 점은 교육 문제와 비슷하다).

집값 문제와 대책의 자세한 내용은 우리의 관심이 아니다. 지금 부동산 문제는 극도로 왜곡된 한국 경제와 시장, 삶을 반영하는 한국 사회의 기괴한 풍경일 뿐, 진정한 문제와 과제는 늘 은폐된다.

시대의 풍경은 렘브란트 시기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만큼을 놀랄 만큼 닮았다.

"튤립을 팔아 한몫 챙겨보려는 장사치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값이 훌쩍 뛰어있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중에는 서민들까지 집과 땅을 팔아 튤립을 사들였고, 튤립 가격은 하늘이 높은 줄을 모르고 치솟았다. ()

튤립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생산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해 품귀현상이 계속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서민들은 더 이상 생업에 종사하면서 힘들게 돈을 벌 필요가 없었다. 튤립을 사서 비싸게 되팔면 손쉽게 이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도 가격이 오를 거라는 기대감 속에서 튤립을 찾는 사람은 더욱 늘었고, 또 다시 가격이 오르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바로 가기 : 희대의 투기 사건 네덜란드 '튤립 투기')

서울의 집이 이 정도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박정희 시대 이후 부동산이 투기 대상이 아닌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집은 상품이고 이윤이며, 오로지 투자와 투기의 대상이었다. 8.2 부동산 대책의 배경도 그렇다.

집에 비하면 튤립은 분명 비현실적이다. 거품이 커지거나 꺼져도 투기에 참여한 사람만 직접 영향을 받는다는 점도 현실의 고통을 반감시킨다. 집은 현실이고 그만큼 고통이다. 투자와 투기 대상, 재산과 자산인 집은 삶의 조건을 갖추려는 사람들의 경제에, 그리하여 생활과 삶의 질에 직접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생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집을 구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렵고, 삶의 조건은 나빠진다. 수도권에 사는 서민 대부분이 점점 더 그렇게 된다. 집은 날이 갈수록 직장과 학교에서 멀어져 고통스럽다. 좁아지고 더러워지며 어두워지는 것도 금방이다. 좋지 않은 공기, 해충과 병균, 위생이 건강을 위협하면, 삶의 질이란 말조차 한가한 소리일지 모른다.

"서울 전체 가구 중 지하·반지하·옥탑방(8.9%)과 쪽방(1.2%), 판자촌 등에 사는 '주거취약가구'도 10%가 넘었다. (…) 통계청의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전국 주거취약가구 41만8000가구 중 수도권에 39만가구(93.3%)가 집중됐고 서울만 25만7000가구(61.5%)였다."

"서울에 세들어 사는 10가구 가운데 4가구는 소득 대비 주거비 부담이 지나치게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서울의 세입자 가운데 월 소득 30% 이상을 주거비로 지출하는 경우가 40%로 조사됐다. (…) 특히 서울에 홀로 사는 노인은 임대료가 소득의 절반 정도(50.3%)로 주거비 부담이 더 컸다. (…) 서울지역 조사 대상의 70%는 주택임차료와 대출금 상환을 부담스러워했다." (☞관련 기사 : 서울 세입자 40% "월급 30%는 주거비")

악조건은 서울과 수도권이 가장 심하지만, 다른 지역이라고 크게 다를까. 다른 문제가 다른 형태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농촌 지역에 산재한 낡은 주택들. 삶의 질과 안전, 건강을 보장할 수 없다.

세계보건기구는 이미 30년 전에 주거가 세 가지 측면에서 '건강 친화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관련 자료 바로 가기).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어야 하고, 사고와 중독, 그리고 만성질환을 막을 수 있어야 하며, 심리적, 사회적 스트레스를 최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가? 삶의 질보다 더 기본적인 것,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고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거의 조건이.

집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박정희의 개발 독재 시기까지 거슬러 오르는 그 연원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이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가야 할 길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제라도 집과 주거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급하다. 방향은 명확하다. 부동산과 경제로부터 삶의 질과 주거 복지로, 그리고 상품으로부터 공적 가치로.

기왕 새 정부가 들어섰고 부동산 문제에 직면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또 다른 기회. 정부의 생각과 정책이 먼저다. 집에 대한 정책이 기껏 투기를 막고 불로소득과 지대 착취를 줄이는 것밖에 없을 것인가? 국토교통부의 '주거복지기획과'는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인가? 공공임대주택에는 얼마나 적극적인가? 무엇을 목표로 할 것이며, 어떤 철학을 기초로 할 것인가?

국가가 어떤 패러다임으로 집 문제에 접근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최근 일어난 그렌펠타워 화재 사건으로 말미암아 기억을 되살리게 된 것. 집은 반드시 상품이 아니며 사회경제체제에 따라 '사회적 재화'일 수도 있다. 영국이 좋은 사례이다.

영국에서 주택은 전통적으로 국가가 공급하고 국가가 소유하는 사회적 재화였다. 1970년대 말에는 인구의 40%가 지방정부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지자체 공공주택에 거주할 정도였으나, 이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확대에 발맞추어 주택은 극단적으로 상품화되었다(필립 로스코 지음. 홍기빈 옮김. <차가운 계산기>, 열린책들 펴냄).

시장을 비롯한 한국적 현실이 있는데 정부가 이상을 좇을 수만 없다고 할 것이 뻔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개혁에 관심이 있는 정부라면 그 이상이어야 한다. 주택을 사회적 재화로 바꾸는 것은 당장 가능한 일이 아니나, 주거 정책은 이제 최소한 '복지'의 렌즈를 장착해야 한다.

복지의 렌즈란 무엇을 뜻하나? 얼마 전 그렌펠타워 참사를 계기로 발표한 <서리풀 논평>의 결론 부분을 되풀이한다(☞바로 가기 : 런던 그렌펠타워 참사의 교훈).

원인에서 결과에 이르는 전체 과정에서 생명과 건강, 그리고 복지를 기초로 주거의 원리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 집과 주거는 시세, 부동산, 부채, 주택청약저축, 전세와 월세, 투기, 위장전입 문제 그 이상이다. 데스몬드 매튜의 말대로, "생명과 집은 워낙 불가분의 관계라서, 하나가 없는 다른 하나를 생각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쫓겨난 사람들>, 황성원 옮김, 동녘 펴냄)

집과 생명을 나눌 수 없다면, "적절한 주거는 특권이 아니라 권리이며, 집은 우리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보호해야 한다." '주거복지'의 관점에서 '인간다운 주거생활을 할 권리'를 보장할 것!

완전한 상품과 사회적 재화는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 하나의 점진적, 점증적 과정. 다른 많은 국가가 그러하듯, 복지로서의 주거가 보편이 되려면 집은 사회적 재화로서의 성격이 더 강해져야 한다.

탈상품화와 사회화, 집에 대한 정책이 가야 할 길이다. 정책 이전에, 우리의 마음과 눈이 또한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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