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 추격 사회, 진보의 상식을 깨다

[장석준 칼럼] 기간제 교사 정규직 전환 논란에 부쳐

며칠 전 실망스러운 기사 하나를 보았다.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계획에서 계약직 교사만 빠졌다는 기사였다. 빠졌다는 사실도 안타깝지만, 실은 빠진 이유가 더 충격적이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포함한 교원 단체들이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전교조라면 민주노총 소속의 대표적인 '민주'노동조합이 아닌가. 난 지금도 1987년 항쟁이 있고 얼마 안 돼(나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학교 현장에 불어 닥친 전교조 바람을 기억한다. 그야말로 일상생활에 파고 든 사회변혁의 바람이었다. 그만큼 반동도 거셌고, 탄압도 심했다. 그때 이 모습을 직접 보고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뛰어든 내 또래 고등학생도 꽤 됐다.

아니, 그렇게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겠다. 지금은 수인 신세인 분이 청와대에 있을 때 가장 노골적인 공격을 퍼부은 곳이 전교조였다. 촛불항쟁이 2016년 10월 말에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라 박근혜 정권 내내 서서히 대오를 불려간 것이라면, 이 대오의 맨 앞에 선 조직이 전교조였다.

그런 전교조가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 전환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기사에 따르면, 상당수 조합원이 임용 시험을 거치지 않은 기간제 교사의 정교사 전환에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험뿐만 아니라 경력도 훌륭한 채용 경로라 생각하는 내 상식에는 이해하기 힘든 반대 논리다. 아니, 내 사회 경험으로는 시험보다 경력이 더 합리적인 채용 방식임을 확인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전교조 조합원들이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고 또 다른 교육 노동 종사자들의 여건 개선에 반대하고 있다.

이 기사를 본 이후, 줄곧 착잡한 기분이다. 그간 내가 당연하다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말로 노동'계급'이라 이야기한 내용이 그렇다.

한국식 평등을 추구한 두 차례의 추격운동, 그리고 그 결과

이 혼란 속에서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은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 한 권이다. 권내현의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어느 노비 가계 2백 년의 기록>(역사비평사 펴냄)이다. 이 책은 18세기부터 한 노비 출신 집안의 신분이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 집안은 노비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19세기 중반에는 준양반이라 할 만한 유학(幼學) 신분이 됐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역정이 한 예외적 집안의 이야기가 아니라 18~19세기 조선의 보편적 사회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관직 유무에 따른 협의의 양반이 아니라 유학 신분까지 포함한 광의의 양반은 17세기 말부터 돌연 급증하기 시작한다. 전체 인구의 10%였다가 18세기에는 40%가 되고 19세기에는 60%까지 차지하기에 이른다(<맹자의 땀, 성왕의 피: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김상준 지음, 아카넷 펴냄) 498쪽). 흥미롭게도 양반이 느는 만큼 17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던 노비의 수는 급감했다.

한국적 근대의 독특한 경로를 연구해온 사회학자 김상준은 이 역사적 변동에 '온 나라가 양반 되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상이었다. 근대로 넘어갈 무렵, 어느 나라에서나 민중, 그 중에서도 새롭게 부와 실력을 쌓은 집단이 세습 지배층에 맞서 평등을 추구했다. '온 나라가 양반 되기'도 큰 틀에서 보면 그런 흐름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양반의 권력을 뺏거나 양반 자체를 없애는 식이 아니었다. 반대로 너도 나도 양반이 되려 했다. 양반이 되려는 집단운동을 펼쳤다. 후세대에게 양반의 교양(과거라는 국가고시를 보는 데 필요한 교양)을 학습시켰고, 양반이 지키는 번잡한 유교 의례를 애써 따라 했다. 남성 가장이 군림하고 여성이 순종하는 가족 질서도 이때 완성됐다. 물론 족보 산업도 번창했다.

나는 몇 달 전 이 지면에 쓴 글(☞바로 가기 : "한국적 경제주의를 넘어서자")에서 '추격'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선진 자본주의를 추격하며 압축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사회 안의 구성원들도 계층 상승의 추격전을 벌였다는 요지였다. 더 나아가 기업별 노동조합 역시 중산층이 되려는 추격전의 수단이 됐으며, 한국 노동 대중을 지배하는 것은 계급의식이라기보다는 추격의식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이 논지를 조금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회의 추격 경험은 어쩌면 그보다 더 뿌리 깊은 것인지 모른다. 오히려 두 차례의 추격 운동이 있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첫 번째 추격 운동은 위에서 말한 18~19세기의 '온 나라 양반 되기' 운동이다. 전(前)노비까지 포함한 상당수 인구가 농장 세습과 과거 시험에 바탕을 둔 지배층에 속하려고, 최소한 이들을 닮으려고 추격전을 펼쳤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 집단적 추격 경험의 원형으로 남았다. 이때부터 한국 사회에서 평등을 실현하는 가장 일상적인 경로는 상위 계층에 편입되거나 이들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편입의 주된 수단으로 기억된 것은 시험이었고, 모방의 주된 수단으로 전승된 것은 교육이었다.

현대에 경험한 추격전은, 따라서 두 번째 추격 운동인 셈이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온 나라 강남 중산층 되기' 운동이라 할까. 강남 중산층은 재벌과 국가가 이끄는 성장 동맹을 통해 가장 먼저, 가장 안정적인 성공을 이룬 집단이다. 뒤늦게 이들을 따라잡으려 한 다른 집단들은 이들의 성공 수단들을 모방, 반복하려 했다. 입시 교육 경쟁에 뛰어들어 판을 넓혔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면서 부동산 투기를 벌였다. 지난 번 칼럼에서 지적했듯 민주노조 1세대조차 노동조합을 통해 확보한 자원으로 이 추격전에 가담했다.

'온 나라 강남 중산층 되기'가 이토록 깊이, 그리고 빨리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실은 이 추격운동이 이 나라 역사에서 '두 번째'이기 때문이라는 게 나의 가설이다. '온 나라 양반 되기'라는 토대가 있었기에 '온 나라 강남 중산층 되기' 운동이 한국 사회의 구조와 의식에 쉽게 뿌리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대적 평등을 이룰 가장 현실적인 길은 지배층과 대립하고 이를 타도하기보다는 지배층을 모방하고 이에 편입되는 것이라는 상식이 이미 존재했고, 그것이 최근에 다시 강화됐다는 이야기다.

이런 추격운동이 동반하는 의식, 즉 추격의식에서 대립선은 내가 속한 집단과 그 바로 위 집단 사이에 있지 않다. 오히려 내가 속한 집단과 그 바로 아래 집단 사이에 있다. 이 점에서 추격의식은 계급의식과 대립된다. 계급의식을 지닌 집단은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집단들과 연대해 위와 대립, 협상, 타협하려 한다. 반면 추격의식을 지닌 집단은 자기보다 위에 있는 집단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아래를 차별, 경쟁,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다.

한국 사회가 역사적으로 경험한 두 차례의 추격운동은 다른 어느 사회보다 강한 추격의식을 낳았다. 특히 집단적 추격이 지속 확장되지 못하고 갑자기 계층들 사이의 간극이 두드러지게 되면 추격의식은 더욱 강해진다. 즉, 추격의식은 공격보다는 방어의 국면에서 더욱 완강해진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일어난 일이 바로 이런 방어적 추격의식의 고착화였다.

이런 상황이 노동시장 유연화와 맞물릴 때에 한국 사회와 같은 비정규직 규모와 구조가 나타나게 된다. 사회의 긴장이 재벌과 민중, 자본과 노동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러니까 안정된 중산층과 불안정하거나 탈락 중인 중산층 사이의 균열선에 집중된다. 특히 집단적 추격 경험과 직결된 어떤 상징(시험, 대학 졸업장, 부동산 등등)이 이 균열선 바로 위와 바로 아래 사이의 쟁점이 될 때 긴장은 폭발한다.

'시험'이 정규직-비정규직을 가르는 가장 강력한 장벽이 된(심지어 촛불항쟁의 효과조차 어쩌지 못하는) 교육 현장에서 나는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할 적나라한 사례를 본다. 교과서 속 계급의식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이 현상에 적용돼야 할 개념 틀은 추격의식이다.

우리의 맨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제대로 바꿀 수도 있다

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가설일 뿐이다. 한낱 가설이니 더 다듬어져야만 하고, 쉽게 반박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일종의 역사 숙명론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우리 역사에는 '온 나라 양반 되기'라는 일상의 지속도 있었지만,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격렬한 대사건도 있었다. 사회 구조를 한 번 뒤엎어서 평등의 일대 전진을 이루려던 경험도 우리에게는 있다. 미래에는 '양반 되기'와 '양반 세상 뒤엎기' 중 어느 쪽이 더 힘을 발휘할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다만 우리 자신의 얼굴을 좀 더 솔직히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좌파, 사회운동은 바로 이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 아직도 부족한 게 아닐까.

민주노동조합 안에서도 가장 의식이 높다는 조직의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이 조직의 훌륭한 활동가들은 벌써 오래 전부터 대학 입시를 폐지하는 운동에 앞장서왔다. 그러나 막상 이 조직의 다수 조합원은 임용 시험을 장벽 삼아 정규직-비정규직 분단을 승인하고 강화한다.

현실이 이러한데, 1910년대의 러시아 노동자, 1930년대의 스웨덴 노동자에게 더 어울릴 법한 이야기만 반복할 수는 없다. 계급의식이니 계급연대니 하는 이상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이런 이상과 우리의 맨 얼굴 사이의 거리를 다시 제대로 측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중 내부의 뿌리 깊은(겉보기보다 더 뿌리 깊은) 상식들을 뒤엎을 구체적인 개혁 과제들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사회사상사에 불멸의 자취를 남긴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처음 이름을 떨친 것은 23살에 발표한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이라는 글을 통해서였다. 그 글에는 이후 그람시가 평생을 바쳐 답하려 한 물음이 담겨 있다. 그대로 인용해본다.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이탈리아 역사의 현재 국면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의 역할(나는 프롤레타리아트나 사회주의 일반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에너지를 바치고 있는 사회당은 이탈리아의 사회당, 즉 인터내셔널을 위해 이탈리아 국가를 장악해야 할 과제를 떠맡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그 지부이기 때문이다. 이 직접적 과제, 이 일상적 과제는 당에게 특수한, 국민적 성격들을 부여하며 이탈리아의 생활 속에서 특수한 역할, 독특한 책임을 떠맡도록 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이전>(김현우, 장석준 옮김, 갈무리 펴냄))

그람시는 이탈리아를 바꾸기 위해 참으로 이탈리아를 알고 싶었다. 한 세기의 시간을 건너뛰어 '이탈리아'를 '한국'으로 바꾸기만 하면, 이는 고스란히 우리 자신의 긴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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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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