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참사 원흉'이 무죄?…법원도 심판 대상!"

[안종주의 안전사회] "사법부는 시민 생명 지키는 파수꾼"

우리 사회에서 시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파수꾼은 누구인가? 생명과 안전 지킴이의 상징은 어떤 직업군인가? 사람마다 물론 답이 다를 수 있다. 경찰일 수도 있고, 소방대원일 수도 있고, 구급대원일 수도 있다. 의사나 간호사 등 의료인과 약사, 과학자 등일 수도 있겠다. 혹 언론인이나 소비자·시민단체를 꼽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 법을 토대로 이를 집행하는 공무원도 그 후보군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한데 우리가 이렇게 많은 직업군과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빼먹은 집단이 있다. 바로 법의 심판관인 재판관, 즉 판사들이다. 법을 어긴 범법자들에게 형벌을 내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시민의 건강과 생명·안전을 지키는 파수꾼이 될 수 있을까? 이들은 경찰관이나 소방대원, 구급대원처럼 현장에서 직접 생명을 구하는 사람들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우리 사회에서 간접적으로 시민의 건강과 생명·안전을 지키는 최후의 파수꾼이라고 해도 토를 달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26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청사 앞에 30~60대 남녀들이 삼삼오오로 모였다. 지난 6년 동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가습기살균제 참사 관련 항소심 선고를 지켜보기 위해 온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들이었다. 이날 재판은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옥시레킷벤키저의 신현우 전 대표와 존 리 전 대표에 대한 선고가 있었다.

이날 신현우 전 대표에게는 1심보다 형량이 1년 적은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외국인으로 지금은 구글코리아 대표로 있는 존 리 전 대표에게는 1심과 같은 무죄가 선고됐다. 앞서 검찰이 이들에게 각각 구형한 징역 20년과 10년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선고였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들과 함께 온 환경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얼굴에도 분노가 가득했다.

재판부(이영진 부장판사)는 "인체에 유해할 수 있는 화학제품을 제조·판매하는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주의 의무가 요구되는데 안전성 검증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안이하게 생각했다"면서도 "피해자 대부분이 옥시로부터 배상을 받은 점, 관련 특별법이 마련돼 구제책이 생긴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을 낮춘 이유를 밝혔다.

옥시 전 대표 2심 선고 결과, 피해자들 한숨만

재판부의 이런 판결에 대해 대다수 피해자와 가족, 그리고 환경시민단체 등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검찰 구형량보다 선고 형량이 너무나 낮다는 점, 단군 이래 최악의 환경 참사를 불러온 사건의 주범에 대해 낮은 형량을 선고한 점, 옥시의 배상과 관련 특별법은 사건 발생 초기 옥시 측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사건의 진실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조직적 은폐를 하다 들통이 난 점 때문에 이루어진 것임을 지적했다.

피해자와 가족 등은 또 민사소송 1심 때 옥시 쪽이 제시한 허위 사실을 근거로 교통사고 사망 피해자에 준한 보상합의를 재판부와 원고·피고인 변호인들이 이끌어낸 점, 그리고 이런 사실이 문제가 되고 이어 지난해 국회 국정조사에서 옥시레킷벤키저의 부도덕성이 부각되고 난 뒤 기금 마련 합의 등 뒷북 조처가 있었음에도 재판부는 이를 양형을 낮추는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하고 있다.

환경시민단체 관계자는 특히 외국인 출신 존 리 전 옥시레킷벤키저 대표에 대해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한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검찰은 3년 넘게 수사에 손 놓고 있다가 지난해 봄 갑자기 본격 수사에 들어가면서 옥시레킷벤키저 외국인 임원에 대한 소극적 수사로 증거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또 검찰은 이들의 신병 확보에도 실패해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존 리가 증거불충분으로 1심과 2심 모두 무죄를 받았다며 이는 검찰의 직무유기 탓이라고 성토하고 있다.

우리 사법부는 옥시레킷벤키저를 포함해 롯데마트 등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한 기업들을 대상으로 피해자들이 민사소송을 제기하자 법에 따른 판결보다는 소송 중 화해를 권고한 장본인이다. 화해는 시간을 끌어 지루할 수 있는 소송을 일찍 끝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법정에서 죄의 무게를 저울로 가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도 분명 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과연 법정 화해로 마무리해야 할 사안인지에 대해서 결코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판사들은 그렇게 유도했다.

1심 민사소송 때 재판부 판결이 아닌 합의 종용, 치명적 흠결로 남아

어린이와 산모, 심지어는 태아, 쌍둥이마저도 악마의 입으로 삼켜버린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해서 재판부가 몇 억 원이라는 교통사고 피해수준의 합의금으로 마무리하게 만든 것은 어찌 보면 우리 사법부의 치욕이라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불과 1년 뒤 이 합의금보다 몇 배 더 많은 액수를 배상하겠다고 옥시레킷벤키저와 롯데 등이 발표하고 실제로 실행에 옮긴 점 등을 생각하면 당시 1심 민사 재판 때 쌍방 간 합의를 이끌어낸 판사들의 판단과 행위는 적절치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성문은 재판부 어느 누구도 쓰지 않고 있다.

사법부에서 이루어지는 손해배상과 형사처벌 등 모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가습기살균제 사건과 같은 제품결함 내지는 환경성 질환으로 인한 위해와 관련해 미국과 같은 징벌적 배상 판결이 이루어진 적이 없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사법부가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해 사망자나 임성준 군 사례처럼 평생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하는 피해자들에 대해 몇 억 원 수준이 아니라 수십 억 원 이상 수준의 판결을 내렸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분명 기업들이 제품 제조와 출시 전 사전 안전 점검을 강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습기살균제 참사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업들이 대대적으로 제품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도 듣지 못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계기로 화학물질 평가 및 등록에 관한 법을 제정하고 최근 이를 강화하려 하자 기업들은 외려 조직적으로 반발하고 언론 등을 상대로 로비를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만 풍문이 아닌 실제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기업들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악마와도 거래할 정도로 온갖 짓을 서슴지 않아왔다. 비자금을 조성해 힘 있는 사람과 기관에 뇌물 공세를 벌이거나 로비를 펼쳐왔다. 장기적으로는 기업 이미지 훼손 등이 있더라도 단기적으로 돈을 벌 수 있다 싶으면 만들어진 법도 무시하거나 교묘하게 피해 나간다. 이것이 기업들-물론 모든 기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의 역사요 자화상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기업들의 이런 일그러진 행태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온 국가가 합작으로 만들어낸 괴물이자 악마였다.

사법부는 시민 생명과 안전 지키는 최후의 파수꾼

판사들이 가습기살균제 성분이 지닌 악마성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다른 사건과 비슷하게 판결하고 화해를 얼치기로 중재하고 하는 것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행위이다. 판사다운 판사라면 밤을 새워 관련 서적을 읽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으며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물론 재판부는 판결을 내리면서 기업에 대한 원천적인 악감정이나 피해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감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정신과 관련해서 최후의 파수꾼이 성직자라면 생명과 안전과 관련해서는 재판관들이 최후의 파수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설혹 법과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고 기업들이 관행을 빌미로 소비자의 안전과 생명을 경시하는 일이 벌어질 때라도 회초리와 죽비를 내리칠 수 있는 유일한 집단과 조직이 재판관과 사법부이다.

앞으로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해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국가도 그 대상이다. 재판관들이 생명과 안전을 그 무엇보다 앞서는 천부인권의 가치로 여긴다면-그것이 진정한 법정신이기도 하다.-지금까지 사법부가 해왔던,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해서 벌어졌던 판결과 사법부의 행위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법부가 성찰하는 시간을 자주 많이 가질수록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들의 피눈물을 더 많이 닦아줄 수 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완전한 해결에 사법부도 이미 동참하고 있다. 그리고 머지않은 시간이 흐른 뒤 이 사건과 관련해 사법부가 얼마나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는가를 저울로 그 무게를 달게 될 것이다. 저울추가 정의 쪽으로 기울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쪽으로 기울 것인가. 시민들이 역사의 심판관이 되어 두 눈 부릅뜨고 저울대를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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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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