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청산은 죽산 조봉암의 완전한 명예회복으로부터

[장석준 칼럼] 보훈처, 조봉암 독립유공자 서훈 시급하다

혁명은 정치적 측면으로만 보자면 민주공화국을 세우는 일이다. 혹은 기왕의 민주공화국을 기본 틀부터 새로 짜는 일이다. 그래서 모든 혁명은 헌법을 크게 고치거나 다시 쓰는 작업을 수반한다.

고전적 혁명에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도 그러하다. 미국 독립혁명의 잘 알려진 장면 중 하나는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 55명의 대표가 모여 헌법을 작성하며 벌인 토론과 합의의 과정이다. 프랑스 혁명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스티유 습격이 성공하자 평민 대표들이 모여 제헌국민의회를 선포했고, 첫 성과로 헌법 전문 격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했다. 혁명과 제헌의회는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다.

꼭 '제헌의회'라는 이름을 달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대중의 대표들이 격렬하면서도 깊이 있는 토론을 거쳐 새 민주공화국의 토대와 방향, 골간을 합의한다는 점이다. 물론 18세기의 원칙이 지금도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다. 21세기에 맞게 수정하자면, 이제는 '대중의 대표들'만이 아니라 '대중의 적극적인 참여'가 토론 및 합의 과정의 중심이 돼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기억이 별로 없다. 4월 혁명이 있었고 사실상 혁명이었던 6월 항쟁도 있었지만, 대중적인 제헌/개헌 토론은 없었다. 제2공화국 헌법도, 제6공화국 헌법도 모두 기존 국회의원들에 의해서 기성 정당 간 협상을 통해 급조됐다. 간접적으로나마 혁명 정신이 반영되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혁명의 한 국면이라 할 만한 토론-합의 과정은 없었다.

어쩌면 이게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세대마다 거듭된 준-혁명들이 있었음에도 과연 이 나라가 제대로 된 혁명을 거친 민주공화국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자꾸 드는 이유 말이다.

제헌국회의 잊지 못할 장면 – 인신보호 규정 논쟁

하지만 치열한 헌법 제정 토론이 우리 역사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첫 헌법을 만든 제헌국회(제1대 국회)는 그 이름에 걸맞는 잊지 못할 장면들을 남겼다. 나는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의장이 일독을 권하며 건네준 이영록의 <우리 헌법의 탄생: 헌법으로 본 대한민국 건국사>(서해문집, 2006)를 읽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다.

가령 이런 장면이다. 1948년 8월 15일에 맞춰 정부를 수립하려고 제헌국회는 헌법 제정 절차에 박차를 가했다. 국회는 이 작업을 주도할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했고, 한국민주당 소속 서상일 의원이 위원장을 맡았다. 헌법기초위원회는 산하에 전문위원회를 설치한 뒤에 단일 초안을 제출하게 했다. 초안 작성을 주도한 이는, 잘 알려져 있듯이, 전문위원 중 한 명인 유진오였다. 한데 전문위원회는 단일안을 제출하지 못했다. 또 다른 전문위원인 권승렬이 독자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헌법기초위원회는 공동안(사실상 유진오 안)을 원안으로 하되 권승렬안을 참고하며 헌법안을 심의해야 했다.

공동안과 권승렬 안의 차이가 분명했던 대목 중 하나는 인신보호 관련 규정(현 헌법에서는 제12조에 해당)이었다. 공동안은 인신보호에 관한 절차 규정을 헌법안에 포함시켰다. 영장제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구속적부심사제도 등이었다.

본래 2차 대전 전의 각국 헌법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용이었다. 헌법이 아니라 법률이나 판례로 결정할 문제라는 게 그때까지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새로 제정된 헌법들은 이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명문화했다. 인권을 치안보다 우위에 두려는 시대정신이었다. 공동안은 이 시대정신을 담고 있었다.

반면 권승렬 안은 공동안보다 후퇴한 내용이었다. 공동안은 "현행범인 경우만 법관이 발부한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다"고 규정했으나 권승렬 안은 현행범일 때만이 아니라 "범인의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도 사후 영장 청구로 대체할 수 있다"고 예외 범위를 넓혔다.

제헌국회의원 중 일부, 특히 한국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이 틈을 파고들었다. 일제하에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우파로 전향한 김준연 의원이 앞장섰다. 이들은 원안인 공동안이 아니라 권승렬안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김준연 의원 등은 "내우외환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의 경우에는 인신보호 관련 규정 일체의 적용을 법률로써 정지할 수 있다"는 규정을 덧붙이자고 제안했다. 헌법의 약속을 법률로 무력화시킬 수 있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공동안에 담긴 "고문과 잔인한 형벌 금지" 조항도 삭제하자고 했다. 이유는 치안 당국의 수사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일제 시대 경찰이 그대로 남아 극우파 이외의 정치 세력에게 과거에 익숙했던 고문과 테러를 자행하던 시절이었다. 의열단 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이 친일파 출신 경찰의 고문에 분개해 월북을 선택해야 할 지경이었다. 김준연 등 한국민주당 의원들은 이러한 극우 친일 경찰의 입장에서 최소한의 인권 보장조차 가로막으려 한 것이다.

그러자 헌법기초위원 중 한 사람이 분연히 일어나 반대 발언에 나섰다. 녹음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자가 전하는 내용만 봐도 참으로 격앙됐음을 알 수 있는 발언이었다. 욕설과 저주에 가까운 말들이 있으니 십중팔구 삿대질도 했을 것이다. 그대로 인용해본다.

"법률은 강자에게나 약자에게나 공평하여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후 영장이라는 게 있을 수 없으며, 또 고문과 잔혹한 형벌은 당연히 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준연 씨는 예외 규정을 두는 게 당연하다고 하지만, 이에 준할 '비상사태의 경우' 등은 집회에도 적용될 우려가 다분히 있는 것이니 어찌 이를 당연하다고 하는가? 이 천하가 언제나 너의 천하가 될 줄 아느냐?" (<우리 헌법의 탄생> 110쪽에서 재인용)

"이 천하가 언제까지 너희들 천하가 될 줄 아는가?" 그렇다. 이 성난 언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 아니던가. 천하의 주인 노릇하던 자들의 목을 쳐서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게 민주주의다. 헌법을 토론하는 자리에 마땅히 살아 있어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이 서슬 퍼런 진실이다.

이 발언을 남긴 헌법기초위원은 인천 을구(지금의 부평 등)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조봉암이었다. 농지개혁을 주도한 초대 농림부 장관이자 이승만을 턱 밑에서 위협한 진보당 제3대 대통령선거 후보였고 대한민국 대법원이 공식 인정한 잘못된 재판으로 법살(法殺)당한 그 사람, 죽산 조봉암이었다.

민주주의의 서슬 퍼런 진실을 일깨운 제헌국회의원, 조봉암

안타깝게도 조봉암의 이런 노기 어린 공박으로도 다수파인 한국민주당의 공세를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상사태의 경우에 헌법이 정한 인신보호 절차를 정지할 수 있다는 규정의 삽입은 일단 막았다. 그러나 나머지는 막지 못했다. 사후에 영장을 청구할 수 있는 예외는 권승렬안대로 늘어났고, 고문 금지 조항을 삭제하는 수정안도 1표 차이(찬성 11 대 반대 10)로 가결됐다.

이때부터 조봉암은 헌법기초위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냥 항의의 표시가 아니었다. 본회의에서 토론에 적극 나서려면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더 이상 발언하지 않는 게 낫겠다는 전술적 고려였다. 그만큼 그는 진지하고 결연했다.

조봉암에게 제헌헌법이 추구해야 할 방향은 너무도 분명했다. 따로 글로 발표한 "헌법 초안 총평"(1948. 9)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이 헌법은 어디까지나 혁신적이며 어디까지나 현대적이며 민주주의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봉건적 보수적이거나 몇몇 개인의 독재는 물론이고 어떠한 한 계급의 독재적 정권이 세워질 수 있는 헌법이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죽산 조봉암 전집 1>, 72쪽)

촛불 이후 우리의 개헌 방향으로도 손색없을 내용이다. 바로 이런 지향에 따라 그는 인신보호 규정의 수정을 되돌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9조의 예를 들자면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 구금, 수색, 처벌과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 했으니 이만하면 소위 문명인으로 최소한도의 권리가 규정된 셈인데, 그 아래에 [예외 조항을] 더 붙인 것이 변입니다. () 지금 남조선에서는 경찰이 하고자 하면 여하한 구실로든지 우리들 양민은 하루이틀간은 유치장 속에 넣을 수 있어서 우리 인민은 언제나 신체의 자유라는 안전감은 전혀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즉 이 단서는 오직 현행범에 국한하여야 할 것으로 봅니다." (위의 책, 75~76쪽)

조봉암은 이런 의견이 헌법에 최종 반영되지 못할 경우의 결의까지 밝혔다. 이 대목에서는 헌법기초위원회 회의에서 토해낸 발언 속 민주주의 정신이 다시 선명히 반복된다.

"나는 이 헌법초안위원회의 한 사람이지만 기초위원회에서 달성하지 못한 점은 본회의에서 주장할 기회가 부여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국회에서 달성되지 못한 점은 인민 전체의 심판에 호소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우리의 주장을 꾸준히 견지하려는 바입니다." (위의 책, 73쪽)

이것이 대한민국의 첫 번째 헌법을 제정하며 한 제헌국회의원이 품은 각오고 자세였다. 조봉암만이 아니었다.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연장선에서 경제 관련 조항들에 일관되게 진보적 내용을 담으려 한 이청천 등도 있었고, 노동자 경영참가권과 이익균점권을 제안해(이번에도 이에 반대한 한국민주당 측 선봉장은 김준연이었다) 결국은 이익균점권을 관철시킨 문시환, 전진한 등도 있었다.

비록 단정 반대를 이유로 좌우파의 주요 정치 세력들이 불참한 제헌국회였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는 이렇게 당시 시민사회의 열망을 진지하게 대변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열띤 토론과 개입이 있었기에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경제의 최고 가치로 제시하고(제84조) 농지개혁(제86조), 공공성 있는 기업의 국공유화(제87조), 사기업 내 이익균점권(제18조) 등을 명시한 상당히 진보적인 헌법이 채택될 수 있었다.

제헌국회의 이런 면모야말로 촛불 이후 개헌 논의가 마땅히 돌아가야 할 지점이다. 2016-2017년 촛불이 4월 혁명, 6월 항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대한민국 역사에서 한 번뿐이었던 제헌국회의 헌법 제정 토론을 시민사회 전체의 참여로 확대 반복해야 한다. 이번에는 분단의 긴장과 압박 아래서가 아니라 그 70여 년 역사를 깨고 나아가려는 자유로운 상상력 속에서 말이다.

덧붙여 – 적폐 청산은 죽산의 완전한 명예회복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조봉암 관련해 몇 마디 덧붙이고 싶다. 2주 뒤인 7월 31일이 기일(무참한 언어로는, 사형집행일)이고 해서 죽산 이야기를 더 길게 하고 싶지만, 지면 관계상 그를 다룬 좋은 책들(전기로는 이원규의 <조봉암 평전>(한길사, 2013), 최근 나온 책으로는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 현대사>(나무나무, 2017))을 권하며 여기에서는 아직도 그의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2011년 대법원은 조봉암의 국가 변란 및 간첩 혐의가 무죄임을 선고했다. 이로써 그의 죽음이 4월 혁명을 얼마 안 남겨둔 이승만 정권의 광기의 산물임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남은 절차는 독립유공자이자 건국공로자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그가 표면상 일제 말기 국방헌금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미뤄왔다.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을 불러일으킨 극우적 신념의 인물 박승춘이 처장이던 시절 이야기다.

말도 안 된다. 1945년 1월에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해방의 그날을 감옥에서 맞은 그였다. 8월 15일 오후에 여운형이 치안권을 넘겨받자마자 서대문형무소로 가 뜨겁게 포옹한 독립투사들 중 한 사람이 바로 1920년대 상하이에서부터 여운형의 막역한 동지였던 조봉암이었다.

새 처장을 맞이한 국가보훈처가 서둘러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죽산 조봉암의 독립유공자 서훈이다. 이것은 적폐 청산의 당연한 한 과제이고, 역사 바로 세우기의 확실한 출발이다. 촛불 원년인 올해가 죽산을 지운 대한민국사의 마지막 해여야 한다.

▲ 조봉암. ⓒKBS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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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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