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출범 이후 협치는 식상하고 공허한 단어가 됐다. 협치가 여야 정당의 정치공학적 타협이라는 의미로 왜곡되고 축소되었다. 정당간의 타협이 협치라고 한다면 정치에는 일상적으로 협치가 필요하다. 여소야대이기 때문에 협치가 더욱 요구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대야소에는 협치가 불필요한가.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협치는 협량한 수준의 정당 간 주고받기식 거래가 아니다.
협치는 정당간의 절충과 타협에 국한한 개념이 아니다. 거버넌스를 의미하는 협치는 서로 다른 영역간의 연대와 소통을 통해 사회가 지향할 방향을 모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소득격차의 심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의 수용 범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합리적 조정, 공고화된 사회지배세력의 기득권의 허용 수위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위해 필요한 기제가 협치다.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어디까지 받아들일지, 고부담 고복지와 중부담 중복지 중 어느 방향을 선택할지에 대한 구체적 모색과 신자유주의적 방식과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적 복지를 어떠한 선에서 조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조율도 필요하다.
사안마다 이념적으로 충돌하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를 위해 우선 사회 각 부문별로 복잡다기하게 얽혀있는 갈등과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표출·집약시켜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균열, 계층 간 대립의 원인이 적폐일 것이다. 원인을 제거해 나가는 작업이 적폐청산이며, 이는 협치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적폐청산은 권력을 남용하여 진실을 은폐하고 사실 규명을 조직적·의도적으로 방해한 정치적 사건 등에 대해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과거에 대한 합리적 성찰과 은폐된 진실의 규명 없이 미래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적폐청산 대상으로 2012년 대선 당시의 국정원 댓글 사건, 2012년 남북정상회담회의록 공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사건, 채동욱 전 검찰총장 조사 등 13건을 확정했다. 이 사건들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논란이 됐던 문제들로서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거나 재판 중인 사안들이다. 이 문제들뿐만 아니라 정권이 개입되어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자행된 '적폐' 등은 반드시 색출되어야 한다.
사건을 왜곡하고 축소 또는 과장한 과거에 대한 원인제공자들의 반성과 규명이 전제될 때 청산이 가능하며, 청산 없이는 미래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사법기관의 재수사와 재판 등에 따른 법률적 차원의 광정이 제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역사가 실제로 반영하는 것은 현재의 요구 및 상황이며 역사란 현재의 관점을 통하여 과거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쳐서는 진정한 촛불혁명을 이룬다고 할 수 없다. 보다 적극적 의미의 청산은 사회구조의 변혁이다. 이는 입법을 통한 제도화와 관행의 혁파에 대한 소명의식과 역사의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 필요한 작업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에 대한 합의의 도출이다. 지금까지의 '정치'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 정치의 운용방식이 바뀌려면 정권을 담지한 세력이 사회 각 부문 간의 협치와 연대를 위한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민주당 정부의 출범 이후 사회개혁을 위한 거시적 디자인은 제시되지 않았다. 내각도 최종 구성되지 않았으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국정수행평가에 대한 긍정평가는 80% 내외의 고공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 때가 개혁과 적폐청산의 기초를 다질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이다.
물론 문재인 정부의 임기 동안 산업화와 권위주의 시대, 개발독재와 냉전 시대에 구조화되었던 부정의를 일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작업을 선도할 역사적 소명은 일차적으로 문재인 정부에 있다. 여야 정당과 시민사회를 아우르고, 난마처럼 얽혀있는 이해관계를 조율하기 위해서 거시적이고 총론적인 사회의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지금의 정당구조와 정당체제는 개헌은커녕 일상적인 입법도 녹록이 않은 상황이다. 촛불시민혁명에 의해 들어선 정부라는 평가가 무색하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지금 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집권세력이 지향하는 개혁 작업을 수행할 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지지율이다.
개헌이나 선거제도의 개혁 이전에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꿈으로써 적폐청산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퇴행적 정치문법과 구태의연한 소통의 방식으로는 적폐청산은 언감생심이다. 비록 41%의 지지를 받고 당선됐으나, 지금은 80%의 지지를 받는 정권이다. 그러나 언제든 지지율은 급락할 수 있다. 보다 강한 정권의 결기와 담대한 개혁 의지가 요구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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