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혁명과 다르다. 혁명은 기존 시스템에 대한 전면 부정을 통한 체제 변혁을 의미한다. 당연히 사회변혁을 수반한다.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무너뜨렸던 프랑스 혁명, 억압의 상징인 차르를 타파한 러시아 혁명, 부패한 국민당을 몰아낸 중국혁명 등은 역사의 줄기를 바꿨다.
역사 발전은 혁명에 의해 한 걸음씩 전진했다. 구조화된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 누적되고 고착화된 사회적 갈등의 타파는 기존의 법적 시스템 내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주의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개혁의 한계가 올 때 혁명이 이루어지고 이는 인류의 역사를 진전시켰다. 물론 보수 반동의 국면에서 역사는 후퇴하기도 했으나 역사발전은 혁명적 에너지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국사회에서는 1960년의 4월, 1987년의 6월 대항쟁을 시민혁명이라 칭한다. 주권자가 주체가 되어 역사의 물꼬를 텄고 절차적 차원의 민주주의를 확립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 쟁취는 사회의 질적인 변혁을 일궈내는데 실패했다. 산업화와 개발독재의 유산인 관료적 권위주의의 기득권 구조는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근본적 변화의 에너지는 선거과정에서 추동되지 못했고, 누적된 권위주의 관행과 문화는 바뀌지 않았다.
1988년 13대 총선 결과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는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정당체제로 발전하지 못하고 보수대연합의 완결판인 3당 합당으로 귀결되었다. 1987년 시민의 저항과 항쟁으로 이룩한 시민혁명은 무색해졌고, 여타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반동의 과정을 경험했다.
1987 체제 후 30년, 시민이 주체가 된 촛불혁명은 권력을 사유화한 국정농단 세력을 단죄했다. 명실상부한 시민혁명이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의 패러다임과 경제의 구조를 바꾸지 못하면 촛불혁명은 민주주의를 유린한 세력을 몇 개월 먼저 권좌에서 내려오게 한 것 이외에 다른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사회 전반에 체화된 퇴행적 관행과 인식을 바꾸는 대전환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1987년의 6월 항쟁의 결과 절차적 측면을 제외하곤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루지 못했던 데자뷔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사회 내부의 간극을 메워 나갈 진정한 거버넌스를 위해 정교한 프로그램과 철학이 전제되어야 한다.
촛불시민혁명은 사회 전반의 틀을 새롭게 짜는 대개조를 요구했다. 그러나 서구의 부르주아 혁명이나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면 기존의 법적 테두리에서 질적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개혁은 반동적 저항에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더구나 여소야대의 정당체제는 개혁에 친화적이지 않다. 낙후된 정당문화에 노출되어 있는 국회의 추경 예산과 입법도 교착에 직면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참신한 행보와 검찰개혁을 위한 일관된 인식, 탈냉전 사고 등은 권력의 불통에 익숙했던 국민들에게 정권교체를 실감케 했다. 청와대와 정부 인선에 파격을 선보였고 지난 정권 때 핍박받던 인물의 기용으로 개혁과 적폐청산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대통령의 권한으로 가능한 영역에서 비정상적 상황도 정상화시켰다. 이 밖에도 정부 출범은 뭔가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새 정부는 아직 내각 구성조차 못 하고 있다. 내각 구성에 52일이 걸렸던 박근혜 정권에 비해 문재인 정부의 내각 구성은 이보다 훨씬 늦다. 보수 정권간의 교대에 그쳤던 전임 정권에 비해 촛불혁명을 통한 진보정권으로의 정권교체를 감안한다면 내각 구성 지체는 심각하다.
수십 년 간 고착화된 부정의한 제도와 절차의 흐름을 바꾸는 대작업이 입법과 정책 몇 개의 보완으로 완수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지금의 정당체제에서 협치는 공허해 보인다. 집권당을 사회개조의 사명감으로 무장한 정치결사체로 미화할 수는 없으나 여소야대의 의석 분포는 정책입법을 통한 개혁 자체를 무산케 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개혁에 친화적인 정당체제의 개편이 논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인위적 정치공학에 의한 재편은 가능하지도 않고, 규범적으로도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결국 개혁세력의 조직화와 유권자 연대를 통한 정당체제의 재정열이 관건이다.
야당 중 일부를 개혁세력에 동참시킬 수 있는 메커니즘을 확보하든지, 근본적으로 체제개편을 모색할지의 전략적 지점도 고민해야 한다. 집권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당·정·청의 유기적이고 전략적인 시스템 구축도 개혁 동력 확보에 필수적이다.
개혁세력의 조직화란 집권세력이 사회경제적, 정치사회적 개혁을 위한 일관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그러나 국무위원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에서 제기되는 의혹은 과연 개혁세력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원초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정권출범 50일, 개혁 방향과 실천 어젠더 및 정치적 로드맵을 다시 점검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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