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양의무제, 이제는 폐지하자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사회복지 공무원이 본 부양의무제

나는 10년 넘게 서울 마포구 사회복지전담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대표적인 공공부조 정책인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하 기초생활법)을 집행해 왔다. 생계에 어려움이 있는 많은 분들을 상담하고 기초생활 수급자로(이하 수급자) 선정되는 일을 돕고 있다.

대선 공약으로 등장한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당연히 이번 대선 복지 공약에서도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에 눈이 갔다. 대부분 대선 후보들은 부양의무제를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부양의무제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했으나, 경선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폐지하겠다'는 다소 소극적인 태도로 물러서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부양의무제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이어져 왔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제도를 바꾸자는 분위기도 무르익은 듯하다. 물론 여전히 국가 재정의 한계, 도덕적 해이 등을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부양의무제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음에도 정부의 입장에서 전면적으로 폐지하기에는 여러 부담이 있을 수 있다. 국민 정서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럴수록 다양한 관점에서 부양의무제에 대한 공론의 장을 만들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바란다. 무엇보다 기초생활법이 지닌 문제를 정확히 직시해야 한다.

1인 부양의무자가 231만 원 벌면 수급에서 탈락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서 수급자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소득, 재산 등의 일정 기준에 적합해야 한다. 그런데 이 기준을 통과하더라도 자식이나 부모 등 부양의무자가 있다면 이 부양의무자가 부양 능력이 없어야 수급 자격을 얻을 수 있다.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회원이 지난 5월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인권과 평등을 위한 존엄한 행진을 하기 전 가진 기자회견에서 '부양의무제 폐지' 글씨가 적힌 마스크를 쓰고 있다. ⓒ연합뉴스

기초생활법에서 부양의무자는 신청 가구의 1촌 존비속과 그 배우자를 의미한다. 이 부양의무자의 소득과 재산을 조사하여 부양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한다. 예를 들어, 1인 가구 수급 신청자에게 1인 가구의 부양의무자가 있을 경우, 그 부양의무자 소득이 약 231만 원 이상이면 '부양 능력 있음'으로 간주되어 수급 신청자는 선정에서 제외된다.

최근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한 어느 어르신의 경우 재산과 소득 기준은 기초생활수급자 기준에 적합하지만, 자녀 중에 1명의 '부양능력 있음'으로 판정되어 수급자로 선정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 어르신은 실제 자녀로부터 부양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그 자녀 또한 소득의 대부분을 사채를 갚아야 하는 사정으로 부양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가 빈곤 상태에 있는 국민을 도와주기 위해 만들어진 복지이나, 정작 그 안에 있는 부양의무자 기준이 독소조항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수급자를 조사하는 복지 담당자들과 어쩌면 대부분의 시민들이 부양의무자의 부양의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건 당연한 의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의심하면 '왜?' 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최근 통합조사팀(동주민센터에서 수급 신청을 받아 접수를 하면 구청 통합조사팀에서 조사를 한다)에서 수급자에 대한 조사 업무를 하며 부양의무자에 대해 여러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부양의무자 기준

첫째, 기초생활법의 부양의무자 조항은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꼴이다.

기초생활법에서 부양의무제를 두는 근거가 과연 무엇인가? 국가의 모든 행위는 법에 근거한다. 그리고 모든 법의 근본인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국가는 이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부양의무자 조항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가족에게 전가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오랫동안 스며든 유교적 문화에 기인한 집단적 무의식의 발로라는 생각이 든다.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을 효라고 여기는 유교적 문화가 부양의무제를 만들어냈고, 아직까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건 아닐까?

둘째, 부양의무자 조항은 비현실적이다.

현재 우리사회에 자녀가 부모를, 부모가 자녀를 부양하는 가족 문화가 얼마나 존재하는가? 자녀가 따로 떨어져 사는 부모를 부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양극화가 심한 요즘 시대에 자기 생계를 꾸리기도 어려운 지경이라 부모까지 책임지기는 어렵다.

부모 자식 간의 갈등으로 인해 조사를 거부하거나, 부모가 자식에게서 부양의무자와 관련된 조사 서류를 받아오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저마다 사연들이 있을진대 생계의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 분들은 얼마나 말 못한 사연들이 많을까. 수급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말 못한 사연들을 자기 치부를 드러내듯 고통을 감내하며 새파랗게 어린 사회복지사에게 이야기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오는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헤아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그리고 부양의무자가 부양 능력이 있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생계를 지원하는 경우도 드물다. 자녀의 '부양 능력 있음'으로 수급자로 선정될 수 없다고 통보받아 관청에 부당함을 항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전전긍긍하곤 한다. 그러다 빈곤의 늪에 빠져 하루하루를 괴롭게 살아가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본다.

셋째, 국민은 이미 세금을 내고 있는데, 자식의 소득을 이유로 부모의 수급 자격을 제한하는 것은 부당하다.

대한민국 국민은 재산과 소득에 따라 세금을 납부한다. 국가는 그 세금으로 국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여러 정책을 펼친다. 국민이 납부한 세금으로 기초생활법 등 사회보장 제도가 운영된다. 세금을 납부한 국민은 우리의 부모이고 자식이다. 그 자식이, 그 부모가 납부한 세금으로 수급자에게 생계비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자식이 자신의 소득이나 재산에 따라 세금을 납부했는데도, 또 그 소득과 재산을 이유로 부모가 수급자가 되지 못하거나 받고 있는 생계비가 줄어드니 얼마나 부당한 처사인가. 어쩌면 이중과세라는 생각마저 든다.

마포구 사회복지전담 공무원 80%가 부양의무자 폐지 찬성

부양의무제 기준은 이제 폐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는 당사자들의 삶이 빈곤의 덫에서 하루 속히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다.

이 제도에 대해 보수적이었던 공무원 사이에서도 이제는 '폐지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최근 한국사회복지사협회에서 부양의무제 폐지에 대한 인식조사를 했는데, 우리 구 사회복지 공무원의 인식을 알고 싶어 따로 설문조사를 했다. 놀랍게도 80% 이상이 폐지에 찬성했다. 제도와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을 가장 많이 느꼈을 공무원이 현실을 반영하는 제도 개혁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 사회복지 공무원 조직인 한국사회복지행정연구회도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여 제도 개혁을 선도하기 바란다.

거듭 강조하지만, 국가가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건 헌법이 정한 의무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정받아야 하고,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한다. 조속히 부양의무자 기준이 폐지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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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는 시민들이 복지국가 만들기에 직접 나서는, '아래로부터의 복지 주체 형성'을 목표로 2012년에 발족한 시민단체입니다. 건강보험 하나로, 사회복지세 도입, 기초연금 강화, 부양의무제 폐지, 지역 복지공동체 형성, 복지국가 촛불 등 여러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칼럼은 열린 시각에서 다양하고 생산적인 복지 논의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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