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비극 "이것은 '리얼리티쇼'가 아닙니다"

[해외시각] "취임 5개월, 아직 정부 구성도 못해"

기껏해야 취임 5개월을 넘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이후 처음으로 '사법방해죄'라는 사유로 탄핵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측근들이 러시아와 연결돼 있다는 의혹으로 잇따라 사퇴하고, 일부는 연방수사국(FBI)의 수사를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FBI국장에게 수사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는 서면 증언이 7일 공개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던, 그리고 석연치 않게 전격 해임됐던 FBI 전 국장이 사전에 준비한 메모를 근거로 한 것이어서 충격을 주고 있다. 또한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대통령이 사법방해를 한 것으로, 이는 탄핵 사유에 해당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탄핵 사유로 주목받는 사법방해죄는 미 연방법에 규정된 중범죄로 법 집행기관의 사법 절차에 부정하게 영향을 미치거나,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 행위 등을 가리킨다. 미국 헌법은 탄핵 요건을 '반역, 뇌물, 중범죄 및 기타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사법방해죄는 닉슨 전 대통령이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였고, 르윈스키 성추문 스캔들에 휘말렸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탄핵 위기로 몰고 간 혐의 중 하나였다.


▲'마피아 두목 수준 대통령' 트럼프가 코미 전FBI 국장의 치밀한 공격에 휘청거리고 있다. ⓒAP=연합

미국민 40% "트럼프, 4년 임기 못채울 것" 응답

코미 전 FBI국장이 상원 정보위 청문회 전날 정보위 홈페이지에 공개한 서면증언은 지난달 9일 전격 해임되기 전까지 트럼프와 독대한 자리에서 나눈 대화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서면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시절인 1월 6일 첫 독대를 포함해 3차례 대면하고 6차례 통화하는 등 총 9차례의 대화를 했다.

코미 전 국장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대화들을 통해 수사 중단 요구를 했고, 임기를 채우고 싶으면 개인적으로 충성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해석되는 발언들을 했다. 코미 전 국장은 즉각 모든 대화를 기록해 FBI 수뇌부들과 곧바로 공유해왔다면서 자신의 메모의 신뢰성을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4월 11일 코미 전 국장과의 전화통화에서 자신은 수사 대상이 아니라고 밝히며, 자신의 대통령직 수행을 어렵게 만드는 "구름을 걷워달라"고 거듭 요구했다. 코미 전 국장은 "법무부에게 요청할 사항"이라고 거절했다.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과 코미 전 국장의 마지막 통화가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5월 9일 코미 전 국장을 전격 해임했다.

미 ABC 방송과 <워싱턴포스트>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 중 61%가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코미 전 국장을 해임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코미 전 국장을 해임하는 결정이 '미국을 위해 좋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2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아가 퀴니피액 대학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34%까지 떨어졌고,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자 비율은 57%로 상승세를 이어갔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4년의 임기를 채우지 못할 것으로 전망한 응답이 40%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사법방해 혐의 등으로 조만간 탄핵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한국처럼 국민이 촛불을 들고 일어나는 등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지 않는 한, 대통령직의 안정성을 중시하는 미국의 제도는 탄핵 가결까지 가기 어려운 절차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통령이 탄핵이 됐다고 해도 부통령 순으로 권력이 이양될 뿐 정권 자체가 바뀌지 않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놓게 될 경우 탄핵 절차가 실제로 완성되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많다.

우선 탄핵 절차가 시작되려면 하원에서 탄핵 사유가 되는지 여부를 판단받아야 한다. 과반이 넘게 판단을 하게 되면 상원으로 넘어간다. 상원에서는 대법원 수석재판관의 감독 하에 탄핵심판을 진행한다. 하원의원 일부가 검사 역할을 수행하고 상원의원들은 배심원 역할을 한다. 상원에서 3분의 2 이상이 '유죄'라고 판단하면 대통령은 파면되고 부통령이 직무를 대행하게 된다.

그런데 클린턴 전 대통령 탄핵심판 때 일부 의원들은 범죄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탄핵에는 찬성하지 않았었다. 이처럼 탄핵 자체에 찬성하느냐 여부가 혐의와 별개의 문제로 취급된다.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다수당이라는 것도 탄핵안 가결을 어렵게 보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다만 2018년 중간선거에서 다수당이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이 갈수록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여전히 유효하다.

558개 핵심보직 중 불과 80명 지명, 그중 40명 상원 인준


조기 탄핵 가능성은 불투명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기간이 오래될수록 미국이 망가져가는 게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미국 진보 성향의 시사매체 <복스>의 편집인 에즈라 클라인은 '트럼프 집권이 미국의 위기(Donald Trump’s presidency is an American crisis)'라는 칼럼을 썼다.

그는 "트럼프가 사법방해를 해서 탄핵될 것이냐를 따져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큰 맥락을 살펴보자"면서 "트럼프가 집권하면서 미국은 위기로 치닫고 있다"고 진단했다.

칼럼은 이 위기를 두 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첫번째는 정권 수뇌부의 정통성 위기다. 코미가 기록한 트럼프 대통령의 언행은 법치국가의 대통령에게 허용된 범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클라인은 "트럼프의 언행은 대통령이 아니라 마피아 두목에 더 어울리는 것"이라면서 "트럼프가 거듭 충성을 요구함으로써, 미국 대통령들에게 부과된 규범이나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칼럼은 세계 최강대국 대통령이 마피아 두목같은 언행을 일삼는 것에 따른 위기보다 더 큰 '무능 통치'의 위기를 꼽았다.

칼럼에 따르면, 대통령에 취임한 지 138일이 된 7일 현재 트럼프 정부에게는 의회의 문턱을 넘긴 주요 법안이 단 하나도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핵심 동맹들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다. 클라인은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을 방문한 결과를 평가하면서 "절제된 표현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다른 나라(미국)를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 것"을 꼬집었다.

칼럼은 이런 통치의 위기가 초래된 중심에 제대로 구성도 하지 못한 혼란스러운 내각이 있다고 짚었다. 558개 핵심보직 중 지금까지 겨우 80명을 내정했고, 그중 40명만 상원 인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임명된 측근들도 떠나거나 해임되고 있다. 최측근 실세로 꼽혔던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은 사임의사를 밝히고 있고, 마이크 더브키 공보국장은 해임됐다.

클라인은 "지금 상황은 리얼리티 쇼도 아니고, 허접한 소설도 아니다"면서 "심각하게 자격미달인 자가 세계 최강대국을 통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대통령이 정통성이 결여되고, 정부는 마비되고, 현안들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면서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외면하는 가운데, 동맹국과 적들은 미국이 초래한 공백을 채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칼럼은 "미국은 내부적으로 대통령이 취임 100일도 안되는 사이에 사법방해를 저질렀는지 논쟁을 벌이고, 코미 전 FBI 국장의 상원 청문회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면서 "미국은 강해지고 있는 게 아니라 약해지고 있으며, 갈수록 나빠지고 있을 뿐"이라고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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