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보수'를 표방한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가 10일 득표율 6.8%로 19대 대선 레이스를 '완주'했다. 당 안팎에서 쏟아진 단일화 및 후보직 사퇴 압박과 낮은 여론조사 지지율에 따른 고전에도 "보수의 새희망"이란 타이틀을 걸고 꿋꿋하게 선거 레이스를 펼친 결과다.
유 후보는 선거 레이스 초반 여론조사 기관의 조사 대상에서 누락되거나 1~2%라는 바닥에 가까운 지지율을 보였고, 선거 후반에는 소속 당의 절반에 가까운 의원들이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지지 선언과 동시에 탈당함으로써 사실상 '무소속 후보'에 버금가는 열악한 선거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칼퇴근법'과 '육아휴직 3년법', '비정규직 총량제' 등 보수 진영에서 보기 어려웠던 생계형 공약을 잇달아 발표해 언론 주목을 받았고, 다섯 차례에 걸친 TV 토론에서 호평을 끌어냈다. 특히 집단 탈당 사태 후인 다섯번째 토론회에서 2분의 시간을 아껴 "손을 잡아달라"고 대국민 호소를 한 것은 막판 지지율 소폭 끌어올리기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렇게 '개혁 보수' 실험을 계속해 갈 씨앗 6.8%의 득표율이 유 후보에게 주어졌지만, 그의 앞길은 순탄치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교섭단체가 될 수 있는 20석을 간신히 확보하고 있는 바른정당이 향후 자유한국당 등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 행보를 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평가다.
집단 탈당의 '역효과'로 보이는 20~30세대의 눈에 띄는 막판 지지와 일종의 '동정표'가 당에 완전히 흡수되며 고정 지지층으로 뿌리내릴지도 알 수 없다. 바른정당과 유 후보가 향후 국회에서 '캐스팅 보트'로서 존재감을 키우며 활약하지 않는다면, 대선 이후 벌어질 수 있는 정계 개편에서 '공중 분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사실상 '무소속' 후보 유승민…선거 막판 확인한 '젊은 보수'
유 후보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사실상 '무소속 후보'에 가까운 선거 운동을 해야만 했다. 후보자로 선출된 후 김무성·주호영·정병국 세 중진 의원을 당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하며 힘 있는 레이스를 도모했지만, 바른정당 창당 전후로 불거졌던 김무성 의원 측 의원들과 유승민 후보 측 의원들 간의 갈등이 불식되지 않으면서 안 그래도 열악한 조건의 선거 운동에 당력이 제대로 집중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후보자의 각 지역 선거 유세에 현역 의원들이 밀도 있게 가세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당의 선거 운동을 일부 의원은 방관만 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됐다. 급기야는 절반에 가까운 의원들이 홍준표 지지 선언을 하며 탈당을 감행, 후보를 흔들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또는 홍 후보와의 단일화를 요구했으나 유 후보가 거절한 점을 이들은 탈당 이유로 들었으나, 기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더 유리한 위치에 있기 위한 '유턴 탈당'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지지율이 낮다고 자당의 후보를 주저앉히려 했던 일부 의원들의 이런 행태에 유권자들은 동요했다. 선거 초반 유 후보는 '유승민은 어쨌든 차차기 후보'라는 인식 속에 좀체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TK(대구·경북) 등 전통적인 보수층에서는 '배신자' '좌파'라는 비난을 받았고 진보 진영에서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추가 도입 요구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상대로 했던 '주적' 공격 때문에 미움을 샀던 점도 낮은 지지율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탈당 파문으로 바른정당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며, 유 후보가 꾸준히 내세워 온 '따뜻한 보수'라는 캐치 프레이즈와 유 후보의 발언 하나하나에 대한 주목도도 같이 올랐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바른정당에 입당하는 사람들이 늘고 후원금이 눈에 띄게 증가하자 위축됐던 캠프 분위기도 고양되는 모습이었다. 유 후보는 지난 7일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소액 후원금을 보내준 지지자들을 언급하며 "너무 감사해서 많이 울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유승민·바른정당, '고난의 행군' 계속…'신 안보관' 내놔야
유 후보는 당내 탈당파 의원들의 '흔들기'가 본격화하기 전이었던 지난달 10일, 당의 국회의원과 원외위원장을 모두 모은 연석회의에서 "저는 지금 절대 짧게 보고 정치하지 않는다"며 "우리가 옳은 선택(탄핵과 새누리당 탈당)을 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위축될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어려움에서 하나씩 하나씩 올라가면 그게 우리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런 일만 남아있다고 확신한다"며 낮은 지지율에 위축된 이들을 격려했다.
유 후보의 이 말처럼, 바른정당은 선거 후에도 '고난의 행군'을 계속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에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24%의 득표율을 얻었다. 이는 자유한국당이 탄핵 반대 유권자들만의 표를 받는 '본전 뽑기'에 그쳤다는 해석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홍 후보가 내걸었던 '좌파 청산' 등을 투표의 최우선 가치로 둔 '반공 보수'세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 20%를 넘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합리적 보수, 또는 따뜻한 보수를 표방하는 바른정당의 설 자리가 그만큼 좁다는 얘기다.
반면, 바른정당과 유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만든 씨앗인 6.8%는 아직까지는 '유동하는 표'로 보인다. 5년 전에는 안철수 후보가 '새로운 정치'를 내걸고 정치권에 뛰어들며 20~30 세대의 집중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이번 대선에서는 중·장년층으로 주요 지지층 연령대가 이동했다는 점을 본보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유 후보 특유의 진정성 있는 제스처와 새누리당과는 다른 '새로운 보수' 정치 가능성에 감명 받은 젊은 유권자들을 고정 지지층으로 만들려면 '이미지 정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얘기다.
바른정당의 '지속 가능성'은 이후 국회에서 입법 행보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첫 번째 평가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바른정당과 유 후보는 증세를 통한 복지 확대, 비정규직 사용 제한, 육아휴직 3년 연장, 공수처 설치 등 개혁 입법을 약속했다. 이런 법안들은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의 대선 공약들과의 교집합이 작지 않다. 비록 20석밖에 갖지 못했지만, 바른정당은 향후 국회에서의 어느 당보다 확실한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이때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이번 대선에서 확인한 '씨앗'의 미래가 결정될 수 있다. 향후 있을지 모를 보수의 '정계 개편'에서 주도권을 쥘 지도 모른다.
다만 바른정당의 지지층이라 할 만한 중도 보수층과 젊은 보수층이 사드 추가 도입과 유 후보가 TV 토론에서 보였던 '주적론'과 같은 강경한 안보·반공 노선에 장기적으로 동의할 수 있을지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보수와 진보가 각각 담지하는 가치는 물 흐르듯 시간이 흐르며 변한다.
바른정당이 사회 일부를 '빨갱이'와 '좌파'로 분류해 배제하고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기실 목적이었던 낡은 반공주의 안보관을 과감히 버리고 '신 보수 안보관'을 설계할 수 있느냐도 바른정당의 미래를 결정지을 변수 중 하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