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탑골공원…안철수냐 홍준표냐?

"이번엔 안철수" vs "막말해도 홍준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전개된 대선 정국. 요동치던 노년층의 표심은 어디로 갔을까.

지난 28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만난 수십 명 노인들의 절반 이상은 지지 후보를 묻는 질문에 손사레를 쳤다. "아직 못 정했다", "알려줄 수 없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번 대선에서 투표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몇몇 보였다. 갈 곳을 잃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 모든 대선에서 꼬박꼬박 투표해왔다는 김택수(가명·남·82) 씨는 이번에 처음으로 투표를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놈이 그 놈"이라고 생각해서 안 한단다.

김 씨는 전형적인 스윙보터다. 2002년에는 노무현이 싫어서 이회창을 찍었고, 2012년에는 박근혜가 싫어서 문재인을 찍었다. 이번 대선은? 홍준표는 절대 안 된다. "홍준표 되면 큰일 나. 홍준표는 박근혜 쪽이잖아. 홍준표만 안 되면 좋은데."

그나마 나은 사람은 안철수다. 하지만 그는 투표장에 가지 않을 것이다. '될 사람 되겠지' 하는 심정이다. "안철수가 될 가능성이 없어졌잖아. 내가 찍은 사람 다 떨어져서 재미 없어. 떨어지면 속상하잖아."

"박근혜 싫다, 난 보수다, 이번엔 안철수다"

김 씨처럼 투표를 안 하겠다고 선언한 노인을 빼고, 나머지 지지 후보를 밝힌 노인들은 국민의당 안철수, 자유한국당 홍준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순으로 지지를 표했다. 흥미로운 점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태도에 따라 지지 후보가 갈렸다는 점이다. 보수이지만 탄핵에 찬성했던 사람은 안철수 쪽으로, 탄핵에 반대했던 사람은 홍준표 쪽으로 수렴되는 분위기였다. (☞관련 기사 : '박정희 사랑'하는 노인도 "박근혜 하야해야")

실제로 여론조사 기관 갤럽이 지난 28일 발표한 대선 후보 지지도 조사 결과를 보면, 60대 이상 노년층에서 1등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36%)였다. 2등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29%), 3등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16%), 4등은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3%), 5등은 정의당 심상정 후보(1%)다. 문재인 후보는 전국과 60대 이상을 제외한 전 연령층에서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유독 60대 이상에서는 3위로 내려앉았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대선을 앞둔 지난 28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노인들이 앉아 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황모(남·63) 씨는 "나도 옛날 같으면 문재인 찍었는데, 나이 먹으면 안철수"라고 했다. "나이 60이 넘으니까 보수가 맞는 것 같다."

문재인은 왜 별로인가. "북한이랑 친해지려는 노무현의 마음은 이해하는데, 이상과 현실은 다르지 않나. 문재인은 너무 북한을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홍준표는? "말이 너무 거칠다. 차라리 유승민이 낫지." 유승민을 안 찍는 이유는? "박근혜한테 옳은 얘기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사표 만들기 싫어서 안철수 찍는다."

황 씨는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찍었다. 그러다가 정윤회 사건, '문고리 권력' 사태 때 실망해 지지를 거뒀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을 때는 탄핵을 지지했다. 탄핵 국면 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사퇴했으니 이젠 안철수다.

2012년 대선 때 문재인을 찍었던 이기수(남·68) 씨도 이번엔 안철수다. "구태 정치인들을 바꿔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충청이 고향인 이 씨는 '지역 투표'하는 특정 지역 사람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내가 충청이 고향인데, TK와 호남을 둘 다 싫어하거든. TK랑 호남은 서로 지역색만 보고 투표하잖아. 한 지역에서 95% 나오는 게 어딨나."

이 씨는 2007년 대선에서는 이명박을, 2012년 대선에서는 문재인을 찍었다. 이번에는 왜 바뀌었나. "문재인 때문에 박지원이 갈라져 나왔잖아. 당을 장악하고, 왜 이렇게 욕심이 많나 몰라. 그런데 여론조사 보면 문재인이 1위야. 전국 곳곳에 문재인 표가 많고, 전라도, 경상도에 문재인 표가 있어. 반대로 내 친구들 중에는 안철수 찍어주자는 사람이 많지."

홍준표 막말해도 괜찮아…'홍찍문?' 누가 그래?

김사성(남·76) 씨는 홍준표 지지자다. 자유한국당 어떤 후보든 지지할 계획이었다. 막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홍준표가 말은 막 해도 걘 보수잖아. 막 해도 괜찮아." 김 씨에게 문재인은 "빨갱이에 가깝"고, 안철수는 "빨갱이는 아닌데 희미하다"고 했다. 유승민은 "박근혜를 배반한" 사람이다.

김사성 씨에게 '홍준표 찍으면 문재인 된다'는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김 씨가 발끈했다. 여론조사와 실전은 관계 없다고 했다. "보수 노인들이 3분의 2만 찍어도 홍준표가 당선 돼. 안철수-문재인이 진보 두 놈이니까 표를 갈라먹잖아. 노인들만 다 찍어도 홍준표가 되지."

▲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선 후보가 지난 26일 저녁 대구 서문시장에서 집중 유세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희순(가명·여·64) 씨도 홍준표 지지자다. 홍준표 후보가 대학 시절 여성에게 '돼지발정제'를 먹여 강간을 모의하려 한 사건 논란에 대해서 묻자, 전 씨가 발끈했다. "수십 년 지난 그런 걸 물고 늘어지는 게 어딨어. 어릴 때 잘못 없는 사람 있나. 자기가 법조인이 되고 보니, 큰 죄였다고 과거를 뉘우친 거지."

전 씨에게 박근혜 탄핵에 나선 유승민, 김무성은 배신자다. "김무성, 유승민, 국민의당이 나라 망친 놈들이야." 국민의당은 왜 끼었을까. 더불어민주당에는 애초에 기대도 안 한 탓에, 탄핵에 가세한 국민의당이 더 얄미운 모양이었다. "박지원이 김무성, 유승민 꼬셔서 탄핵했잖아. 박근혜가 하야한다고 했으니 하야하게 뒀어야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이북 타령"

'샤이 문재인' 표도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노인은 지지 후보를 묻는 질문에 "지금 말하면 될 것도 안 된다"고 손사레를 쳤다. 문재인 후보 지지자로 추정된다.

박순희(가명·여·83) 씨는 문재인과 안철수 중에 누구 찍을지 "아직 생각 중"이다. 지금까지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을 꼬박꼬박 찍어왔던 박 씨는 이번에 야당에서 둘이 나와서 "골치 아프다. 둘 중에 누구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

노인들이 여럿 모인 자리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자가 불편한 마음에 자리를 뜨는 일도 생겼다. 한 홍준표 지지자가 "문재인은 안 된다. 이북을 그거하잖아"라고 말하자,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힌 한 노인이 "가짜 뉴스다"라고 발끈했다. 이 노인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이북 타령이냐. 세상이 바뀌었는데 이북하고 거래하느냐"고 말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몇몇 노인들이 집단적으로 '문재인의 대북관'을 문제 삼고 나서자 결국 불편한 듯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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