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데카솔 공책'을 아시나요?

[격월간 민들레] 도시 속 치유와 돌봄의 공간 '곁애'

눈을 떠보니 꿈 가운데였다

스물하고 아홉이던 봄날, 덜컥 '배꼽빠지는도서관' 문을 열었다. 도서관을 여는 것이 어째서 내 꿈이었는지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꿈을 이루고 꿈 가운데서 한참을 소용돌이치고서야 깊은 내 안의 뿌리에서 기인하는 욕구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유년시절을 떠올리면 종종 운동장 구석에 있곤 했다. 지금도 변방을 내 자리라고 생각하는 걸 보면, 그때 운동장 구석에서 나름의 정체성을 마주했던 것 같다. 교실에 앉아 있기보다 골목을 돌아다녔고, 사람들이 걷는 길보다 바람이나 구름의 목적지가 늘 궁금했다.

우연히 골목에 세 든 바느질 가게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 앉아서 재봉틀을 돌리거나, 스웨터를 뜨거나, 단추를 다는 가게 이모의 손놀림을 좇는 일이 나의 하루 일과였다. 밤이 되면 박음질이 스친 자리는 옷이 되기도 했고, 테이블보가 되기도 했다. 왜 학교를 가지 않느냐, 공부나 숙제 따위 식상한 대화는 바느질 가게 이모와 한 번도 나눈 적 없었다. "쟤는 대체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 엄마의 퉁명스런 말에 갈라진 마음이 그곳에 머물고 나면, 말끔하게 박음질되어 다시 살아나곤 했다.

스무 살 무렵부터 놀이터에서, 지하주차장에서, 후미진 골목에서 만난 동네 아이들을 내 방으로 불러 모았다. 바느질 가게 이모가 그랬던 것처럼. 야간에는 성당에서 아이들을 만났다. 오토바이를 타거나, 가출을 하거나, 친구를 때리거나, 마음의 통증을 몸으로 호소하는 아이들이었다. 잘못은 어른이나 사회가 다 지어놓고, 책임과 선택은 아이들의 몫이 되었다. 함께 울고 웃고 떠들면서 혼미했던 정신을 가다듬곤 했다. 그렇게 녀석들과 마주하고 돌아올 때면 내가 휘청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한 겹 두 겹 쌓여갔다. 여기저기 떠돌다가 상처로 사방이 가로막힌 아이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푹 주저앉았다. 그러다 문득 그만 떠돌고 싶어졌다. 제한된 공간이 아닌,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담 낮은 그런 공간을 상상했고, 도서관을 떠올렸다. 도서관의 밤을 떠올렸고, 도서관 현관에 벗어놓은 신발 더미들을 떠올렸다.

스물여섯 살 되던 해에 결혼을 했다. 딸아이 네 살 무렵, 작은 공방을 마련하고 싶어 하는 지인과 함께 공간을 찾아다녔다. 지인이 마음에 둔 공간은 아담했고, 해가 잘 드나들었다. 건물 2층은 조금 넓었고, 때마침 비어 있었다. 그때였다. 우연히 2층 공간을 들여다본 순간 시간이 멈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방에 늘어선 창문으로 햇빛이 드나들고, 벽에는 낮거나 높은 책장이 둘러 있었다.

무엇보다 방처럼 편한 공간을 떠올렸던 터라, 뜨끈한 바닥은 엎드려 졸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늘과 구름이 펼쳐진 천장의 벽지를 보고 있으면 이런저런 망상이 마구 떠오르곤 했다. 산처럼 책을 쌓고 바코드를 입력하느라 며칠 밤을 지새웠지만, 공간을 채울 아이들을 떠올리면 잠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 달 사이 폐허 같던 공간이 꿈꾸던 그런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혼자 덜렁 도서관 그 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렇게 도서관 문을 열었다.

▲ 북카페 '곁애'. 문화예술협동조합 '곁애' 홈페이지 갈무리(http://cafe.naver.com/028527424/).

8000세대의 아파트가 밀집된 도시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배꼽빠지는도서관은 그래서 몹시 분주했다. 품앗이를 제안했고, 부모와 함께 배우고 익히는 여러 과정들을 시도했다. 틈만 나면 도서관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답이 없는 고민들을 나누었고, 외부 강의를 해서 모은 돈으로 드럼과 기타를 샀다. 1년에 두 번은 서울 근교로 워크숍을 떠났고, 조금 자란 청소년들이 자신들보다 어린 마을 아이들을 챙기고 보살폈다. 누군가를 보듬고 챙기고 그 대상에 연민을 품는 건 그와 유사한 상처나 아픔을 지녔다는 방증이다. 배꼽빠지는도서관 아이들은 그런 상처의 순간을 대부분 지났거나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들을 마주하고 나면 그들의 부모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부모에 대한 내 안의 치유가 온전히 이뤄지지 못한 것이 세상의 부모에 대한 불만으로 확장되었다. 나 역시 몸만 어른이었고, 대다수의 부모들 또한 예고 없이 연습 없이 그리된다.

그래서인지 마을 부모들과 함께 시도해보려 했던 '공동육아'라는 울타리가 영 불편하고 낯설었다. 공동육아라는 틀이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공동으로 무언가를 해볼 의지조차 내지 못하는 부모들을 더 들여다봐야 하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흔들렸다. 내 아이는 그래도 이미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그렇지 못한 다른 아이들을 보살피며 엄마의 역할을 나눠야 한다는 다짐을 은연중에 했다. 육아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들과 배꼽빠지는도서관에서 보낸 경험들 속에서 주관이 조금씩 명확해지고 있었다.

돌아온 청년들이 아이들을 만나고

아이들을 '놀려준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방학식이나 소풍날처럼 조금 특별한 날이면 부모들은 아이들을 '놀려준다'. 특별한 날인만큼 피아노학원 혹은 영어학원은 하루 쉬고 안전한 실내놀이 공간이나 공원에서 아이들은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부모들은 그 모습을 흡족하게 지켜본다.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도 여가를 즐기는 방식도 부모들의 기호가 한몫하고 있다. '놀려준다'는 발상이 그리고 그 방식이 속으로 아픈 아이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런저런 문제들 속에서 배꼽빠지는도서관은 다소 고집스럽게 우리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만나기로 했다. 고집을 부릴 수 있었던 건 시간이 흐르고 흐르자 도서관을 스쳐 간 아이들이 청년으로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하여 배꼽을 만들고 채웠던, 이제는 늙어버린 청년들이 1세대라면, 배꼽 2세대의 존재감이 그런 무게감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렇게 우리만의 공동육아 방식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도서관은 '문화예술협동조합 곁애'로 옷을 갈아입었다. 문화예술 성격이 강화되면서 그 틀이 조금 바뀐 것이다.

벌써 6년째다. '신나는 토요수업'이란 타이틀 아래 토요일 오전이면 아이들과 마주 앉았다. 1학년 때 만났던 아이가 벌써 중학교에 들어간다. 이제야 매주 토요일 오전을 어찌해냈나 싶다. 내년에는 그만하자. 내게도 가족에게도 주말이 필요하지 싶다가도, 마음은 먼저 내년 프로그램을 기획하곤 했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속에서는 늘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느려야 했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고 해야 했다. 그리고 토요일이 치유가 되는 시간이길 바랐다. 어린이 인문학이라는 큰 틀 안에서 '어린이 기자 교실', '어린이 작가 교실', '내 안의 바른 역사', '작가와의 만남', '꼬마 그림책 작가' 등 작은 단위로 아이들과 세밀하게 소통하는 인문학 치유에 방점을 두었다.

철저하게 아이들과 아이들의 마음과 세상의 후미진 구석과 소통했다. 대형마트만 따라다니던 아이가 어린이 기자가 되어 구로시장으로 취재를 나갔다. '칠공주 떡볶이'를 파는 일곱 분의 할머니를 만나고, 가게 앞에 기다란 국수를 널어놓은 풍경을 만나고, 시장에서 쓸 수 있는 '온누리상품권'이란 걸 알아갔다. 집으로 돌아간 아이는 부모에게 온누리상품권에 대해 설명했고, 시장에도 공영주차장이 있으며 우리가 왜 전통시장을 이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시선이 변하자 부모들의 의식도 조금씩 덜컹거렸다.

그동안에도 '마데카솔 공책'은 늘 아이들 곁에 있었다. 토요수업이 시작되는 첫날 마법의 스프링 노트를 나눠주는데, 상처를 치유하고 새 살이 솔솔 돋게 한다는 뜻으로 마데카솔 공책이라 불렀다. 아이들은 한 주 동안 겪었던 다양한 감정과 사건들을 그 공책에 적었다. 아이들은 마데카솔 공책에 쓴 이야기는 절대 세상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믿음에 자기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마데카솔 공장장이 초록 볼펜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적어주기도 한다. 그 공장장이 누구인지 아이들은 모른다. 그저 마데카솔 공장장이라 불린다. 공책에 꺼내놓은 상처에 공장장이 초록 연고를 발라주면, 상처 난 마음에 새 살이 솔솔 돋는 마법은 종종 진짜가 되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궁극적으로 세상에서 따로 혹은 함께 지내는 법을 배운다. 따로 지내는 순간을 제대로 즐기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능동적 참여'와 '자발적 소외'에 대한 적절한 균형을 토요일마다 연습하며, 자발적 소외의 아늑함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알아간다.

예술이 마을을 만나

고집스럽게 버텨오고 있음에도, 해마다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두려워진다. 지금 '곁애'의 곁에 머무는 청년들이 도서관에서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공간에서 답이 없는 세상의 고민들과 마주하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조금 보편적인 세상의 잣대로 살았더라면 덜 몸부림칠 수 있지 않았을까? 과거의 그런 자극들로 인해 너무 예민한 자세로 살아가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문득문득 스친다.

아이들은 자꾸 크는데, 난 여전히 여기 있다. 밀려드는 일곱 살부터 몰려드는 스물 대여섯 살 녀석들 사이에서 난 여전히 일곱 살 혹은 열일곱 살이었다. 이제는 간식과 함께 술상도 마련해놓아야 한다. 나와 닮았으면서도 또 다른 아이들은 서로를 보듬어야 하는 위태로운 존재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특별하게 느껴진다. 어른들보다 유연한 그들은 언제든 자신을 수정할 의사를 지녔다. 그런 이들이 만들어내는 개방형 공동육아의 선순환을 나는 믿는다.

그간의 고민들을 바탕으로 '곁애'만의 이야기들을 엮어내는 작업을 시도 중이다. 한마을에 살면서도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오래된 것들. 시장이나 골목에서 생선을 팔고, 보일러를 고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묵묵함을 조명하고 싶었다. 그런 경험이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매개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한다.

▲ '동네방네 마을 그림책' 시리즈. ⓒ곁애

청년들과 상처 많은 이들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빚어낸 것이 구로마을 이야기를 엮어낸 '동네방네 마을 그림책' 시리즈(곁애 펴냄)다. 구로 시장 <형제설비 보맨>, 오류시장 <소영이네 생선가게>, 가리봉 골목의 <희희희 미용원>, 항동 철길을 담은 <철길을 걷는 아이> 모두 네 권의 그림책이 작년에 출간되었다. 소싯적 화가가 꿈이었던 78세 성두경 선생님이 그림을 그렸고, 한국에 시집온 카오리가 작업에 참여했다. 청년 웹툰 작가가 글 그림 작업을 동시에 하기도 했다. 아마추어들이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원했고, 그림책 속 주인공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자랑스러울 수 있도록 토닥이는 따뜻한 자서전이 되었으면 한다.

그림책을 토대로 곁애는 마을의 아이들뿐 아니라, 가족들이 마데카솔 공책처럼 치유되는 활동을 기획 중이다. 예술이 지닌 힘은 부드럽고 세다. 그 힘을 믿는다. 여러 청년들과 예술가들이 마을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은 어느 날 마을이 예술의 온기로 채워질 날이 오겠구나 싶다. 마을에서 아이들이 자라 청년이 되고 그 청년들이 다시 마을의 아이들을 보듬는 세대와 세대의 선순환, 그런 나눔이 더 깊숙이 스며들고 더 멀리 퍼져가기를 희망한다.

머리로 아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그렇게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 이어지는 여행이 바로 우리네 삶이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만 못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하다."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당부는 또한 곁애가 새기는 가치이기도 하다. 머리 좋은 사람은 많으나, 발 좋은 사람이 적다. 곁애는 뚜벅뚜벅 마을과 세상의 그늘지고 아픈 것들을 엮어내고자 한다. 마침내 그런 발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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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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