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있다. 촛불 시민 가운데에도 이게 정말 혁명이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묻는다. 무슨 혁명이 헌법재판관 8명의 입만 쳐다보는가? 고금의 어떤 혁명에서 구질서의 옹호자들이 이토록 기세등등한 적이 있었던가? 혁명이라는데 왜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적폐는 작년 가을 이전하고 달라진 구석이 전혀 없는가? 통렬한 물음이다. 촛불'혁명'은 역시 과장인 걸까?
하지만 이런 의혹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달 간의 드라마에는 '혁명' 말고 다른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특히 작년 12월 2일부터 9일 사이의 국면이 그렇다. 12월 2일에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하자 많은 이들이 탄핵은 물 건너갔다며 탄식했다. 한국 정치를 좀 안다는 사람일수록 그렇게 결론 내렸다(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사실 새누리당이 의석의 1/3 이상을 점하고 있었기에 통상의 논리대로라면 탄핵 불발이 상수였다.
분위기는 다음날 열린 촛불 집회로 뒤집혔다. 박근혜는 우주의 기운을 느낀다지만 나는 그날 사람들의 기운을 느꼈다. 광화문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숫자도 대단했지만, 더 압도적인 것은 결기였다. 국회에서 탄핵이 무산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누구보다도 새누리당 비박계가 이 서늘한 기운에 동물적으로 반응했다. 그래서 9일 탄핵소추안이 예상 외로 다수표를 받으며 통과됐다. 불과 몇 달 전 총선으로 만들어진 의석 분포마저 무력화시킨 이 예기치 못한 힘에 '혁명' 외에 다른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레닌의 이중권력, 밀리밴드의 이중권력
물론 지난 세기의 고전적 혁명 이론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올해는 20세기 혁명의 대표 사례인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기도 하다. 100년 전 2월에 러시아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몇 달 뒤에 이것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했다. 그 사이에 나타난 독특한 현상이 이중권력이다.
황제가 쫓겨나자 두마(국회)가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동시에 혁명을 성공시킨 노동자, 농민, 병사들이 새로운 대의기관으로 소비에트(평의회)를 건설했다. 몇 달 동안 두마/임시정부와 소비에트가 공존했다. 그래서 이중권력이라 불렸다.
10월 혁명을 이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볼셰비키)의 지도자 V. I. 레닌은 이중권력이 결국 어느 한 쪽의 승리와 다른 쪽의 파괴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공존은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비에트가 주체가 된 새 혁명에 나섰다. 이 혁명이 승리한 뒤에 두마/임시정부는 해산됐다. 혁명 와중에 쓴 20세기 혁명론의 고전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일갈한 대로 기존 국가기구를 ‘분쇄’해버렸던 것이다.
한데 촛불혁명의 양상은 전혀 달랐다. 레닌의 이중권력론보다는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 랠프 밀리밴드의 이중권력론에 더 가까웠다. 밀리밴드는 20세기 중, 후반에 활동한 영국의 정치학자다. 요즘은 2010년 노동당 대표 경선에서 형제상잔을 벌인 두 아들 데이비드와 에드워드 때문에 더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국가 이론이나 노동당 노선 비판은 토니 벤 하원의원이 이끌던 노동당 좌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현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밀리밴드도 현대의 혁명을 전망하면서 이중권력을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이중권력론은 레닌의 이론이나 러시아 혁명 경험과는 다르다. 기존 대의기구는 파괴되지 않는다. 대의기구 바깥에서 급성장한 대중운동에 떠밀려서 모처럼 제 역할을 하게 된다. 평소와는 달리 비선출 권력(대표적으로, 자본 권력)을 제압하는 데 앞장선다. 한편 대중운동은 소비에트 같은 특정 제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시민사회 안에 다양한 진지들로 남아 지속적인 민주화의 토대가 된다.
즉,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대체하는 관계가 아니다. 제도 안의 권력과 밖의 권력이 민주화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시너지를 일으킨다. 따라서 밀리밴드의 이중권력은 과도적 현상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답기 위해 장기간 지속돼야 할 세력 균형이다.
촛불혁명 과정에서 특히 혁명적이었던 순간들은 밀리밴드식 이중권력 개념으로 명쾌하게 설명된다. 상황을 주도한 것은 광장의 거대한 대중운동이었다. 촛불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 퇴진이라는 공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존 권력기구 중에서 대중운동이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을 움직였다.
그것은 국회였다. 국회는 가장 최근(불과 몇 달 전) 실시된 선거를 통해 박근혜 정권으로부터 돌아선 민심의 추이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촛불혁명은 여소야대 국회를 낳은 4월 총선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국회가 촛불 시민들의 뜻을 처음부터 충실히 따른 것은 아니었다. 의석 분포부터가 아직 새누리당이 다수당이어서 탄핵 절차 추진을 가로막고 있었다. 주류 야당들 역시 대통령 퇴진을 일관되게 외친 광장 민심과는 달리 끊임없이 새누리당과 타협을 시도했다. 몇 주 동안 피 말리는 드라마가 계속됐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중운동이 토요일 집회와 소셜 네트워크 여론으로 주도권을 발휘했다. 미적대고 꼼수 부리는 국회를 혹은 타이르고 혹은 윽박질러 끌고 갔다. 그래서 결국은 새누리당을 둘로 쪼개며 탄핵을 성사시켰다. 촛불 시민들은 대통령을 파면시킨 최종 '승리' 이전에 이미 국회가 민심을 따르도록 만든 첫 번째 결정적 '승리'의 주인공이었다. 아마 밀리밴드가 살아 있었다면, 12월 2일~9일의 한국을 현대 혁명, 21세기 이중권력의 대표 사례로 꼽았을 것이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된다
보통선거제도가 실시된 지 몇 세대가 지난 우리 시대에는 레닌보다는 밀리밴드의 이중권력론이 현실에 부합한다. 촛불혁명은 고전 혁명들과 무척 다르지만, 이게 21세기에 대중혁명이 취할 수밖에 없는 기본 형태라는 이야기다.
이런 진단에 답답함을 느끼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세상을 한 번 시원하게 뒤집어보는 게 이제껏 알고 있던 '혁명'인데 지금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몇 달 동안 광장 민심이 정국을 이끄는 통쾌한 경험을 했지만, 이제는 모두 대통령 선거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선거와 혁명을 대비시키는 오래 된 관점에서는 이것도 영 마뜩치 않은 일이다.
여러 이론(異論)이 있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 점은 인정해야 한다. 이후의 바람직한 시나리오가 뭐라 생각하든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혁명조차 장기전이라는 것이다. '몇 달'의 장기전이 아니라 '몇 년', 아니 그 이상의 장기전 말이다. 지루한 일상전과 작년 12월 같은 순간이, 선거 같은 제도 정치 일정과 대중운동이 교대로 반복되는 복잡한 정치 과정을 각오해야 한다.
1987년 항쟁조차 실은 12월 대선 패배로 끝난 게 아니었다. 최종 결과는 이후 몇 차례의 선거, 공안 정국과 삼당 합당, 1991년 5월 투쟁, 민주노동조합운동의 성장을 품고 난 뒤에야 결정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통령 퇴진 촛불운동이 끝났다고 끝이라고 봐선 안 된다. 대통령 선거로 빨려 들어간다고 해서 끝이라고 해선 안 된다. 우리는 수십 년만에 처음으로 첫 번째 승리를 맛보았을 뿐이다. 두텁게 쌓여 굳어진 사회 세력 관계에 단지 금이 하나 생겼을 뿐이다. 천만 명 넘게 거리로 나와도 금 하나 그었을 뿐이라고 푸념할 것인가? 아니다. 이 금이 또 다른 승리를 낳을 시도들의 굳건한 출발점이라고 믿어야 한다.
다만 이 시점에서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게 있다. 지금 우리가 장기화된 혁명 과정을 밟고 있는 게 맞다면, 옛 혁명에서 익숙했던 논리들이 우리 앞에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리듬과 곡조가 변주되더라도 말이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된다"(마태복음, 20장 16절)는 것이 그런 논리 중 하나다. 한때 혁명의 무대였던 곳이 혁명이 무르익을수록 반혁명의 거점이 된다. 한때 혁명의 주역이었던 세력이 혁명 과제가 바뀌면서 혁명의 걸림돌이 된다.
촛불혁명에서는 이 논리가 기존 권력기구 중에서 대중운동과 교통하는 부분, 대중운동이 공격하는 부분의 이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대통령 파면으로 끝난 1단계에서 대중운동과 교통한 부분은 국회였고, 공격한 부분은 청와대였다. 그러나 1단계의 마감과 함께 이 구도는 뒤바뀔 것이다. 대중운동과 교통하는 부분이 어디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비판과 포위, 변형의 첫 번째 과녁으로 삼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하다. 그곳은 국회다.
역설적이다. 대통령 퇴진 투쟁을 벌일 때는 국회가 가장 최근 선거 결과를 반영한 국가기구였기에 민심의 통로로 활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통령 파면과 새 대선 이전의 과거 민심에 고착된 가장 낡은 국가기구일 뿐이다.
새누리당 잔당인 자유한국당이 웅크리고 있는 곳이 국회다. 뿐만 아니라 광장 민심에 끌려서 탄핵소추안 가결의 수단이 됐던 새누리당 분리파(바른정당), 범민주당 세력 내 기회주의자들이 이제는 국회를 거점 삼아 촛불 항쟁 기간 중에 무산됐던 야합을 다시 시도하고 있다.
국민의당, 바른정당, 자유한국당, 3당의 개헌 시도는 그 첫 포문이다. 개헌 합의 자체는 막간극 정도로 끝나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이것은 결코 구 세력의 마지막 발악은 아니다. 오히려 이후 국회를 무대로 끈질기게 지속될 반격의 예고편이다.
경로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대선으로 등장할 새 정부가 시늉으로라도 개혁 과제들 중 일부를 추진하면 이번 개헌 합의 3당과 같은 원내 연합이 이를 사사건건 방해할 것이다. 다른 변수가 없다면, 새 정부는 과반을 넘보는 원내 반대파와 정면충돌하기보다는 이걸 변명거리 삼아 개혁에서 손을 뗄 것이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원내 세력 분포를 감안해서 범새누리당 일부와 공동 집권할 수도 있다. 안희정식 대연정 구상이 이것이다. 이렇게 되면 별다른 원내 충돌도 없이 새 정부는 처음부터 개혁을 접고 들어갈 것이다.
어느 경우든 국회는 촛불혁명을 뒤로 돌리는 거점 구실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게다가 현 국회는 임기가 3년이나 남아 있다. 3년 동안의 사보타주라면, 기득권 세력이 지난 몇 달 동안 입은 상처를 깨끗이 치유하고 다시 일어서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대선 후 개헌, 선거제도 개혁 논의로 국회를 포위해야
그럼 어떻게 국회라는 장벽을 돌파할 것인가? 국회 바깥에 국회를 품은 토론 광장을 열어야 한다. 이 점에서 대선 후 개헌 논의가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대선 전 개헌 시도는 국회를 통한 기득권 세력의 반격 수단이지만, 대선 후 개헌 논의는 반대쪽을 겨누는 칼이 될 수 있다. 대선 후에는 지금과 달리 시민이 참여하는 개헌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의제도 권력구조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권 확대와 경제 민주화로 확장될 수 있다.
또한 대선 후 개헌 논의는 선거제도 개혁 논의와 함께 이뤄질 수 있다. 그 동안 국회의원들의 생존 투쟁 때문에 선거제도 개혁은 난이도가 개헌보다 더했다. 이참에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선거제도 개혁 논의로 국회의원들을 오히려 수세에 몰아넣어야 한다. 개혁의 방향은 이미 많이 이야기됐다.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아니면 최소한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전환해야 한다. 이것이 새누리당 잔당이 탄핵 반대 세력, 즉 몰상식 세력만의 대변자로서 고사하게 만들 가장 확실한 길이다.
새 정부가 이런 논의에 착수하길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새 정부가 논의에 나설지 장담할 수도 없다. 논의가 시작된다 하더라도 다른 변수가 없다면, 늘 그랬듯 국회 내 정쟁으로 왜소해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역시 열쇠는 시민들이 쥐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될지와 상관없이 국회에 과녁을 맞춘 새로운 대중운동이 시작돼야 한다. 그래서 개헌 논의든, 선거제도 개혁 논의든 압박해야 한다. 작년 12월 9일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시민들이 국회를 에워싸야 한다. 촛불 항쟁 제2라운드는 국회 포위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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