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는 보수체제 유지를 위해 박근혜를 파면했다"

[정권교체 사용법]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 <1>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만장일치로 인용됐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항로를 개척해야 하는 '대한민국호(號)'는 과연 순항할 수 있을까?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를 만나 이번 탄핵의 의미와 향후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 교수는 지난 2월 16일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위원회 공동대표 자격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대통령을 반헌법행위자로 규정한 바 있다.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은 국가의 최고지도자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국내외적으로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당연한 결정"이었다며 "역사적으로 볼 때 헌법재판소는 기본적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헌재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청구를 기각했다. 만약 이 때 헌재가 이를 인용했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졌을까?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면 제1당인 한나라당의 패배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을 것"이라며 "헌재는 일정하게 파고를 견뎌낼 수 있을 만큼의 판결을 한다"고 덧붙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불복하는 메시지를 발표한 것과 관련 한 교수는 "'승복 / 불복'이라는 프레임 자체가 잘못됐다고 본다. 민주사회에서 헌재의 결정은 '유효'한 것이지 승복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서 "'승복 / 불복' 프레임을 놓고 보면 박 전 대통령은 절대 헌재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승복을 하든 말든 대선은 예정대로 치러진다"고 일갈했다.

한 교수는 "보수 세력 전체는 지금 상황에 대해 엄청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다. 검찰도 돌아서면서 사실상 보수가 박근혜를 버렸다"며 "어찌 보면 1987년보다 훨씬 더 큰 위기에 직면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강고한 한국사회의 보수세력은 자체적인 복원력을 통해 얼마든지 다시 지배적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것이 한 교수의 판단이다. 그래서 그는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었던 이른바 '촛불 시민'들이 "어떤 기억을 공유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의 힘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1930년대 독립운동사의 자료를 볼 때다. 당시 자료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3.1운동을 통해 각성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일종의 '범민족적' 각성의 계기가 3.1운동이었다"며 "촛불도 마찬가지의 경험이 될 수 있다. 한겨울에 찬바람을 맞으면서 함께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 기억을 공유하고 전달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역사는 기어코 변하고 만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것만큼 그렇게 빨리 변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근현대사 100년을 놓고 보면 앞쪽 10년은 나라가 망하는 시기였고, 이후 일제 강점을 36년 겪었다. 해방 이후에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다가 깡그리 다 죽었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국가 40년이 흘렀다. 20세기 100년 동안 우리가 민주주의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본 것은 1998년부터 오직 3년밖에 없다"면서 긴 안목으로 이른바 사회적인 '적페'를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 13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이재호)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들의 만장일치로 인용됐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합법적 대통령 축출이자 촛불 혁명의 첫 번째 성과다. 이번 탄핵 인용의 역사적 의미를 짚어본다면?

한홍구 : 큰 그림에서 이야기해 본다면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난 뒤 한국 전쟁을 거쳐 하나의 사회가 형성됐다. 그게 분단체제인데, 이게 크게 한 번 흔들린 것으로 봐야 한다. 물론 결코 극복됐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

촛불의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사건으로 분단 체제를 넘어선 것은 아니다. 일례로 촛불시위에 참석한 시민들 가운데서도 절반 이상이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찬성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분단 체제 극복을 위해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물론 분단에 기생했던 세력들의 민낯이 드러난 것은 확실하다.

프레시안 : 창비 2017년 봄호에 기고하신 '촛불과 광장의 한국현대사'라는 글에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사를 바꾸는 주역은 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라고 하셨다. 이번에도 그랬다고 보나?

한홍구 : 이번에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이른바 '헬조선'에서 '흙수저'여서 고통받던 청년층,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청년층이었다고 본다. 촛불시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봤을 때 이러한 평가가 가능할 것 같은데, 지난 4월 총선에서 야당이 과반을 차지할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낸 주역이 이들이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투표장에 나오면서 수도권에서 야당 압승을 견인했고 결국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었다.

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맨 처음 드러난 곳이 이화여대다. '불공정한 경쟁'이라는 아주 민감한 부분에서 시작됐는데 이게 헬조선 흙수저 핵심문제 아닌가? 헬조선이 만들어진 게 지금 젊은이들의 책임은 아니지만, 이를 풀어나가는 데에서 젊은이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구조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고통받는 젊은 층이 제일 먼저 나섰지만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내야 하는 것 또한 이들이다. 헬조선과 흙수저를 만든 것은 기성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 기성세대들은 15년 전,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냈다.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이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 현재의 헬조선이 들어선 것이다. 이 엄중한 책임을 나 자신을 포함하여 노무현을 뽑고 열광했던 사람들이 명심해야 한다.

2002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수락 연설은 지금 들어도 굉장히 감동적이다. 젊은이들이 불의에 맞서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고, 또 다른 연설에서는 권력과 재산, 신분과 학벌 등이 세습되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고 했다. 이런 연설을 하고 난 뒤 정권을 잡았지만, 개혁에 실패했고, 노 대통령은 이 감동적인 연설을 한지 7년 뒤에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6~7년 지나니 우리 사회가 온통 '헬조선 흙수저' 천지가 돼버렸다.

물론 이번 촛불시위가 이런 문제까지를 성찰적으로 껴안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촛불이 너무 급하게, 갑자기 켜지는 바람에 차분하게 돌아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폐'라는 말 속에 포함될 수도 있지만, 한국 사회 내의 적폐가 워낙 곳곳에 겹겹이 누적돼있기 때문에 이걸 한번에 청산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때를 벗기려면 충분히 불려야 한다.

프레시안 : 헌재는 이번 결정문에서 지난 2014년 세월호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이 탄핵 사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판단했다. 세월호 유가족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편으로는 박근혜 대통령의 법률 대리인단이었던 서석구 변호사가 지난 2014년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킨 헌재가 어떻게 박근혜를 파면시킬 수 있느냐며, 노골적으로 반발하기도 했다.

양측 모두 불만이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무난한 결정문이 나왔다는데 별다른 이견은 없어 보인다. 이번 결정의 의미와 한계를 짚어본다면?

한홍구 : 당연한 결정이 나온 것으로 본다. 헌재 결정의 의미를 짚기 전에 우선 헌법과 헌법재판소라는 기관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해야할 것 같다. 헌법은 우리가 의존할 수밖에 없기도 하고 우리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다.

▲ 지난 10일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대한 주문을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런데 자고로 헌법을 포함한 모든 법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자의 것이다. 법은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지 지배체제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한국의 현행 헌법을 비롯하여 모든 나라의 헌법은 축적된 계급 투쟁의 산물이다. 거칠게 표현한다면 자유권 조항은 주로 19세기 부르주아들의 특권귀족에 대한 피어린 저항이, 사회권 조항은 주로 19세기 후반 이래 노동자들의 자본가들에 대한 투쟁의 결과 헌법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헌법의 한 글자 한 글자에 누군가의 피가 맺혀 있는 것이다. 헌법 자체가 민주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투쟁 공간인 셈이다.

그리고 헌법을 기준으로 사건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헌법재판소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만들어졌다. 원래 위헌 법률 심판 등 헌법재판권은 대법원이 가지고 있었는데 이 기능을 헌재로 이동시킨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 당시 대법원이 너무 심하게 망가져서 헌법재판소를 따로 둬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헌재가 만들어질 때 많은 사람들은 헌재가 중요한 기능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헌재가 괴물이 될 수 있다는 헌법학자 국순옥 선생님의 우려도 있었다. 헌재가 좋은 판결도 많이 내리긴 했지만, 행정수도 이전 위헌 판결이나 통합진보당 해산 등 몇 개의 중요한 판결로 봤을 때 헌재는 기본적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헌재는 여론에 대단히 민감하다. 헌재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청구를 기각했다. 만약 이 때 헌재가 이를 인용했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졌을까?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면 제1당인 한나라당의 패배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즉 헌재는 기본적으로 기성체제 유지의 최후의 보루로서 가장 보수적인 기관이지만, 일반 여론이 압도적으로 변화를 요구할 경우 보수체제 유지를 위해 일정하게 전향적인 판결을 할 수도 있다.

반면 지난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은 어땠나? 헌법재판관들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도 조사를 했다면 8대 1이 아니라 9대 0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통진당에 대한 인기투표가 아니라, 민주사회에서 정당 결성의 자유가 있다는 헌법에 명시돼있는 권리 보장 차원에서 보자면 사실 9대 0으로 정당이 존속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여론이 통합진보당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원내 제3당이 해산되었는데 아무리 추웠어도 그렇지 어떻게 일천 명도 안 모이나? 그런 상황이니 마음 놓고 그 보수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결정문도 여론을 따라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헌재는 세월호 당시 박 대통령의 행적 문제를 탄핵의 직접적인 사유로 삼지는 않았지만,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소극적이나마 인정했다. 이는 우리 사회의 보수적인 사람들조차도 거역하기 어려운 힘이 작용했다고 본다.

이번 촛불은 지난 2년 반 동안 세월호 질문을 던졌던 것이 응축돼 나온 것으로 봐야 한다. 세월호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국가란 무엇인가'였는데, 이 질문이 '이게 나라냐'라는 분노로 이어졌다. 그리고 국민들은 왜 나라가 이 모양인지를 이번에 알게 됐다. 이게 촛불이 순식간에 번진 중요한 이유였다. 대중들이 여기에 공감하면서 헌재 판결도 시민들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게 최대치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가의 계급 이익을 반영하고 있다. '총자본'이라는 개념 하에 이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혹은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일정 부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만약 탄핵도 하지 않고 버텼다면 어떻게 됐을까? 보수세력 전체가 폭삭 주저앉았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수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헌재가 이런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탄핵의 주역이 누구냐고 할 때 예전 새누리당을 뛰쳐 나와 탄핵에 표를 던졌던 바른정당이 자기들이 주역이라며 손을 들 수 있다. 저울의 추가 탄핵으로 기운 건 그들이 가세했기 때문이니까. 촛불이 동력을 잃고 야권의 분열이 심화되면 보수 측에서는 이런식으로 또 할 말이 생기는 셈이다.

당장 한국 사회의 기층 민중이 사회를 뒤집어 엎는 혁명을 하기는 힘들다. 대신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는 합리적인 보수로 보수 세력이 교체된다면 이것 역시 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보수 세력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절박성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건 촛불 시민들에게는 없는 절박성인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의 친일파들이나 1987년 6월 항쟁이 한창일 때 전두환-노태우 세력이 느끼는 절박성과 위기감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지 물어봐야 할 때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은 절대 다수의 사람에게 누군가에 의해서 꼭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그런 과제였지만, 악질 친일파들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였다. 지금 촛불보다 훨씬 더 지지도가 높았었을 친일파 청산도 한 줌 친일파들이 죽을 각오로 돌파해내지 않았는가. 민중들의 분노와 고통, 슬픔의 총량으로 치면 비교가 안되겠지만 한 명 한 명의 사활적 이해 차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다고 해서 우리의 일상생활 자체가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말에 집에서 편하게 보낼 수는 있겠지만, 박근혜 탄핵이 통쾌하고 이를 통해 역사가 바로잡혀 가는 것이지 내 일상이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보수세력 입장에서는 이게 사활적인 일이었다.

박근혜 헌재 결정 불복? 어차피 보수는 버렸다

프레시안 :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결정 이후 박 전 대통령의 태도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헌재 판결을 받아들이겠다는 메시지는커녕 지지자들에게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홍구 : 그런데 저는 '승복 / 불복'이라는 프레임 자체가 잘못됐다고 본다. 민주사회에서 헌재의 결정은 '유효'한 것이지 승복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헌재 결정이 효력을 발생해서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것이지, 승복인지 불복인지의 마음 속의 문제까지 헌재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박 전 대통령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는 것 같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12일 저녁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사저로 돌아가는 길에, 사저 앞에서 자신을 기다린 지지자들에게 차 안에서 웃음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승복 / 불복' 프레임을 놓고 보면 박 전 대통령이나 골수 지지자들은 절대 헌재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승복을 하든 말든 대선은 예정대로 치러진다. 소위 '친박' 계열의 정치인들이 헌재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대선 자체를 거부할 것인가? 보수세력도 어떻게든 선거는 치러야 한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불복하든 말든 대선은 치러질 것이고, 대선 국면이 되면 거리에서 태극기를 드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헌재 결과에 승복한다고 메시지를 내보내도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오는 사람들이 갑자기 다 집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다만 국정원이나 기타 기관의 자금이 끊기면 동력이 확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대선 국면에 진입하면 그들의 세는 줄어들 것이다.

프레시안 : 파면 이후에 박 전 대통령이 정치적인 위상을 가지기 힘들다고 보는 건가?

한홍구 : 어떻게 위상을 가질 수 있겠나?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오는 열성 지지자들이 있다고 한들 보수세력 내에서 점점 찌그러지고 있는데. 문제는 박근혜 하나 걷어내도 그런 '꼴통 보수' 역할을 할 자들이 또 나올 거라는 점이다.

한국 사회의 진짜 문제는 개혁적이고 합리적인 보수를 소위 '꼴통 보수'로 만드는 구조가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회창 씨 같은 경우 1980년대 나름 건강한 보수였다. 이인제 씨 역시 1990년대에는 노무현 못지않게 청문회 스타로 떴던 사람이다. 조갑제 씨만 해도 1980년대 얼마나 훌륭한 기자였나? 그런데 분단체제가 결국 이들을 수구로 만들어버렸다.

프레시안 : 박 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갖는 위상이 축소된다고 하더라도, 국정 농단의 실체는 명명백백히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한홍구 : 당연히 밝혀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법정을 서게 되는 모습을 봐야 하고, 또 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그걸로 만족하고 관심을 끄면 안된다.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을 감옥 보내고 끝낸 것과 똑같은 현상이 또 벌어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또 지금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선장이어서 크게 흔들렸지만 보수세력은 여전히 강고하다. 이 세력의 복원력은 대단하다. 이 부분을 인지해야 한다.

물론 한국에서 이른바 '민주 세력'의 복원력도 만만치 않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기존의 민주 진영이 다 죽어버렸지만, 불과 7년 만에 4.19혁명이 일어났다. 1987년 대선에서 비록 패배했고 3당 합당으로 김영삼 진영이 보수에 투항하면서 민주세력이 반 토막 났지만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결국 승리했고, 박근혜 대통령 이후 제도 정치권이 무력해진 상황에서 순전히 국민들의 선택으로 지난해 4.13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어쨌든 보수 세력 전체는 엄청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다. 검찰도 돌아서면서 사실상 보수가 박근혜를 버렸다. 여기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까지 감옥에 가는 상황이 됐다. 어찌 보면 보수 세력 입장에서는 1987년보다 훨씬 더 큰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보수는 박근혜를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프레시안 : 한편으로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를 배출했다는 것 자체가 1987년 민주화가 잘못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홍구 :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적 이행기에 한 시대를 제대로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지 못했다. 1919년 3.1운동을 한 뒤에 민주공화정의 정부가 세워졌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람들의 의식은 그렇지 않았다.

1920년대 우리 국민의 절대다수는 '조선'이 망했다는 것은 확실히 느꼈다. 그런데 일제 해방 이후 한반도에 '민주공화국'이 들어선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소수의 지식층밖에 없었다. 전체의 70~80% 정도는 군주 국가가 다시 들어선다고 생각했다.

세계에서 제일 강한 혁명을 한 곳이 프랑스다. 거기는 단두대에서 왕의 목을 쳤던 곳이다. 그런데 결국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고, 그 조카까지 황제가 되지 않았나. 그런 아픈 사연이 2012년 대선 직후 많은 사람을 위로했던 <레미제라블> 같은 작품을 낳는 거다. 프랑스 혁명 이후 공화정이 들어서는 데까지 90년이 걸렸다.

그에 비해 우리는 불과 30~40년 만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이번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버지인 박정희를 같이 안고 추락한 셈이 됐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60년 4월 혁명은 역사적으로 정말 기가 막힌 사건이었다. 전쟁이 나고 모두가 죽었는데 7년 만에 혁명이 일어났다. 이걸 누가 했을까? 일본이 망한 다음에 학교에 들어가서 한글과 미국식 민주주의를 배운 첫 세대가 대형 사고를 친거다. 그런데 이 세대들이 지금 대한문 앞에 나가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다른 세대도 다르지 않다. 1980년대 혁명을 하자고 싸웠던 소위 '386 세대'들의 상당수가 지금은 보수 정당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면 지금의 촛불 세대들은 30년 뒤에 어떻게 될까?

원래 역사가 이렇다. 그래서 촛불 시위의 큰 과제 중 하나가 이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가 앞으로 촛불을 들었던 그 마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이냐의 문제다. 물론 이번 촛불 시위는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 참여했기 때문에 기존과 다른 양상을 보일 수도 있다.

▲11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축하하며 폭죽을 터뜨리는 시민들. ⓒ프레시안(최형락)

결국 어떤 기억을 공유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의 힘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1930년대 독립운동사의 자료를 볼 때다. 당시 자료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3.1운동을 통해 각성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일종의 '범민족적' 각성의 계기가 3.1운동이었다.

촛불도 마찬가지의 경험이 될 수 있다. 한겨울에 찬바람을 맞으면서 함께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 기억을 공유하고 전달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다.

저는 역사가 기어코 변하고 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것만큼 그렇게 빨리 변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물론 일부에서는 민주정권 10년 동안 도대체 한 게 뭐가 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근현대사 100년을 놓고 보면 좀 다른 평가를 내려야하지 않나 싶다. 우리 근현대사의 앞쪽 10년은 나라가 망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일제 강점을 36년 겪었고 해방되고 난 다음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다가 깡그리 다 죽었다. 그리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국가 40년이 흘렀다. 20세기 100년 동안 우리가 민주주의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본 것은 1998년부터 오직 3년밖에 없다. 100년 묵은 때가 3년 불려서 얼마나 빠졌을까?

그런 측면에서 김대중 대통령 집권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야 한다. 그래야 기대치가 현실화될 것 같다. 사실 당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1987년 이후 민주 세력은 반으로 갈렸다. 그 절반을 가지고 김대중이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건데,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외환위기로 나라가 망했고, 김대중과 김종필이 연대했으며, 이인제가 후보로 나와서 보수 세력의 500만 표 정도를 가져가 줬고, 김영삼 전직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 씨의 비리에 상대 후보였던 이회창 씨 아들 병역 문제까지 함께 엮였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정권이 교체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겹치고 겹친 상황에서도 김대중은 겨우 37만 표 차이로 당선됐다. 물론 다음 대통령인 노무현은 이러한 요건이 없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대중의 공로는 이런 요소 없이도 노무현이 승리할 수 있는 요건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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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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