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에 빠진 아이들, 괜찮을까

[격월간 민들레] 놀이, 인간이 되는 연습

지난해 10월 서울 '삼각산재미난학교'에서 열린 특강 '뇌 과학과 교육' 지상 중계, 마지막 편입니다. 편집자 주.

영어 잘하는 아이로 키우려면?
"머리, 수다 떨고 놀 때 좋아진다"

인재가 아닌 좋은 인간을 기르는 일


요즘, 어딜 가도 4차 산업혁명과 미래에 관한 얘기들이 참 많죠? 미래교육이라고 하면 흔히들 '미래 인재 육성' 이런 말을 떠올려요. 어렸을 때 "체력은 국력이다" 이런 말 많이 들어보셨죠? 그런 말을 노상 듣고 살았으니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 체력이 왜 국력입니까. 사실 아무 상관 없어요. '미래 인재 육성'이라는 말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세뇌되어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교육을 얘기하는 자리에 가면, 많은 전문가들이 '앞으로 어떤 직종의 수요가 얼마나 될 거고 학교 교육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므로, 이에 대비해 어떻게 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말도 많이 하고요. 하지만 '그러므로 미래에 맞는 인재를 키워내는 것이 부모와 학교의 교육목표'라는 건 매우 곤란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권력자들이 노예를 기를 때나 쓰는 말입니다.

우리는 '인재'가 아니라 '좋은 인간'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지 얘기해야 해요. 물론,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 기계가 압도하는 세상이 될 텐데, '그 기계를 어떻게 다뤄야 아이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까?' 하는 고민은 필요하죠. 이는 인류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고민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정말 인간다운 사람이 기계를 다루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예 문명을 거부하고 생태적인 삶을 살겠다는 분들도 있는데, 개인의 선택일 순 있지만 절대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휴먼 스킬(human skill)'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인성(人性)'이라는 말은 너무 이데올로기적이어서 우리를 과거로 회귀하게 만들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인성 대신 '휴먼 스킬'이라는 말을 씁니다.

근대 200여 년 사이에 인간은 자연과 동떨어진 존재이고, 자연을 마음대로 개조하고 조종할 수 있다고 착각하던 시대가 있었어요. 인간이 문명을 만들면서 인간 본성(本性), 즉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도 있었죠. 근데 뇌과학 연구가 진전되면서 알게 된 것은, 본성이란 것은 너무도 강력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도 결국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그 '본성'이라는 맥락에서 인간의 '놀이'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놀이와 학습

요즘 놀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봤을 때 아쉬운 점이 있어요. 예전에 교육학이나 사회학의 토대가 될 정도로 강력하게 맹위를 떨쳤던 것 중에 '행동주의'라는 게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마음이 학문의 대상이 된 건 오래지 않습니다. 마음은 실체가 없는 거라고, 인간의 심리는 주술사들이나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인간의 심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이 프로이트죠. 이 심리학이 나중에는 구체적인 증거를 찾는 과학의 영역까지 간 거예요. 그래서 근대교육이 태동할 때도 심리학이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편 스키너와 같은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뜬구름 잡는 거라고 주장했어요. 마음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행동을 관찰하면 마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 행동주의가 사회학과 교육학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1950~60년대에 특히 성행한 행동주의 교육학에서는 인간을 어떤 모양으로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스키너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왓슨이란 학자는 "내게 열두 명의 건강한 신생아가 주어진다면, 그 아이의 타고난 성향과 상관없이 어떤 분야의 전문가로도 키워낼 수 있다. 의사, 예술가, 거지, 심지어 도둑으로까지"라고 주장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행동주의는 점차 설득력을 잃고 소멸해갑니다. 이론은 그럴듯한데, 결과는 신통치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 교육계에는 행동주의가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삶을 '디자인'할 수 있다고 믿는 경우가 많죠.

행동주의 이후,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놀이에 대한 담론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연구에서는 쥐 실험을 통해 행동을 통제한 쥐보다 자유롭게 풀어놓은 쥐의 뇌가 더 커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놀이를 교육의 한 방편으로 접근하는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때 생긴 것이 '놀이 학습'이에요. 놀이도 일종의 학습이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놀까?'를 고민하고 가르치려고 해요. 그런데 '놀이도 학습'이라는 생각은 좀 곤란합니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다만, 놀이여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한국 아이들 못 놀아서 불쌍하다고 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왔고요. 그런데 그것 역시 어른들의 선입견이 아닐까 싶어요. 교복 입은 학생들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지역마다 여고생들의 교복 패션이 다 다르다는 거 아세요? 서울과 인천에서 유행하는 치마 길이가 달라요. 부산에선 딱 붙는 치마가 유행이라면, 대구에서는 주름이 펴지는 스타일이 인기예요. 전적으로 교복의 기본 패턴은 거의 비슷한데, 자기 개성을 드러내고 싶으니까 조금씩 변형해서 입는 거죠. 인간에게 놀이란 이런 거예요. 혹시 '오광 양말'이란 거 아세요. 학교 앞 모든 문방구에 아예 양말 판매대가 따로 있죠. 머리도 물들이고 싶고, 옷도 다양하게 입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 손바닥만 한 양말에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뽐내는 거예요. 처음엔 하얀색 양말에 직접 그림을 그렸대요. 이런 창의적인 활동들이 바로 노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아요. 나름 잘 놀고 있어요.

요즘 아이들 놀이에 대해 얘기하자면 스마트폰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아이들이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많이들 답답하시지요? 하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아이들은 자기들 방식으로 놀고 있는 거예요. 친구들이랑 놀고 싶은데, 수업 끝나면 학원에 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서 친구들을 만나고 놉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거죠. 요즘 아이들 생활 방식을 봤을 때, 단순히 스마트폰이 사라진다고 창의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아주 예전에는 걸어 다녔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지금은 대부분 차를 몰고 다니잖아요. 그게 세상의 변화이지 않습니까. 이런 디지털 디바이스는 앞으로 더 많아질 거예요.

물론, 아주 어린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무분별하게 쥐여 주면 안 되겠죠. 저는 초등학교 5학년, 열두 살 이후로는 괜찮다고 봅니다. 사실 컴퓨터나 스마트폰도 운전 교습 못지않게 교육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시간을 정해놓고 약속을 지키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해요.

단, 만 두 살 전에는 텔레비전이든 스마트폰이든 절대로 보여주지 마세요. 시각 형성에 큰 문제를 가져오거든요. 아이들 눈이 정상 시력까지 올라오려면, 초등학교 2~3학년 정도는 되어야 해요. 어릴 때 강한 영상 자극으로 시각 형성에 문제가 생기면 뇌 발달에도 굉장한 영향을 미쳐요. 눈을 거쳐서 뇌로 전달된 정보들이 뇌 발달의 재료가 되거든요. 그런데 요즘 식당 같은 데서 보면, 앉자마자 부모들이 애한테 스마트폰부터 쥐여 주곤 거기에 정신 팔린 틈을 타서 아이 입에 밥 한술 떠 넣죠.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에요. 그리고 만 두 살이 지나 비디오를 보게 하더라도 시간제한이 필요해요.

같은 맥락에서 아이 혼자 텔레비전 앞에 방치하는 게 가장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을 무조건 없애지는 마시고, 아이랑 대화하면서 같이 보세요. 중학생쯤 된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 많이 하는 것도 걱정이시죠? 만약에 아이가 뭘 먹었는지 기억도 못 하면서 밤새 게임만 하면, 그건 심각하게 아프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한두 시간 정도 게임하고 나면 알아서 어디라도 나갔다 온다, 그럼 건강한 상태입니다. 건강한 아이들은 좀이 쑤셔서 오래 못 앉아 있거든요. 이렇게 스스로를 통제할 힘이 있는 걸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 디지털 소양)'이라고 불러요. 이런 건 연습해야 길러지는 건데 학교에서도 잘 안 가르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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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있는 것들과 관계 맺으려는 본성


첫 시간에 뇌의 별명 중에 '소셜 브레인'을 소개해 드렸잖아요. 직역하면 '사회적 뇌'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걸 저는 '서로서로 깃드는 뇌'라고 표현해요. 점과 점이 선으로 이어져 있는 관계는 그냥 기계적인 연결일 뿐이에요. 저는 '휴먼 네트워크'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네트워크 안에서 그런 기계적인 연결은 별로 의미가 없어요. 마음을 주고받으며 서로 깃들어야 합니다.

내 마음은 어디서 올까요? 밖에서 와요. 물리적으로 몸을 따져봤을 때도 밖에서 들어온 것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우리가 물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있나요? 음식은 말할 것도 없죠. 공기는 또 어때요?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밖에 있던 공기가 내 안으로 들어와서 머물렀다가 다시 나갑니다. 이 작용은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어요. 그게 멈추면 죽으니까요. 사실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밖에 있는 것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생각은 또 어때요? 흔히들 "이건 내 생각이야" 하면서 나의 신념이라고 믿고 있는 것을 다시 곰곰이 따져보면, 누군가의 생각이거나 누군가의 생각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식대로 바뀐 거죠. 밖에서 오지 않는 게 하나도 없어요.

나는 내가 아니에요.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은 오만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것들과 함께 깃들어 있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에요. 잘못 이해하면 신비주의로 빠질 수도 있어서 좀 조심스럽긴 한데, 우리는 모두 밖, 즉 우주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요. 우리가 호흡하는 산소는 어디서 왔을까요? 태초의 우주로부터 왔어요. 그러니 우리는 우주의 일부예요. 근데 나를 내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이가 내 자식이라고요? 어불성설이에요. 그래서 밖에 있는 것들과 어떻게 깃드느냐가 중요하고,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밖’과 연결되어 서로 깃든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아이들은 세상을 직접 몸으로 경험해요. 자기의 몸으로, 감각을 통해 밖에 있는 것을 느끼고 경험하고 싶어 해요. 그게 놀이라는 형태로 드러나죠. 그래서 저는 놀이를 '밖에 있는 것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자 하는 본성'이라고 규정합니다. '놀이를 하면 신체에 어떤 영향을 주겠지' 하는 건 결과일 뿐이에요.

아이들은 왜 흙장난을 좋아할까요? 흙 안에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수많은 미생물, 박테리아가 들어 있어요. 아이들은 태어날 때 면역 체계를 모두 갖추고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경험을 하면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별하는 능력, 즉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가요. 직접 겪어보고 항체를 만들어서 면역이라는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치달았는가 하면, 실내에서 갖고 노는 인공 흙을 만들어 팔아요. 아이들이 완벽하게 소독된 인공 모래를 집 안에서 가지고 노는 거죠. 밖에서 흙을 만지며 노는 경험이 적은 아이는 면역 시스템을 제대로 만들 기회를 잃어버려요. 밖에서 놀 때 아이들이 뒹굴기만 하나요. 물속에 뛰어들고, 나무 타고, 언덕에 오르고. 이 모든 과정들이 다른 존재와 내가 만나는 과정이에요.

휴먼 스킬을 배우는 놀이

지금 우리가 아이를 기르는 방식은, 스스로 인간이 되려는 조건들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제거하는 식이에요. 아주 이상한 시스템이죠. 뇌 과학자들이 왜 이런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느냐면, 이상한 아이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에요. '아이솔레이티드 키즈(Isolated Kids)', 즉 '고립된 아이들'이라는 뜻인데 저는 이 말을 '또라이 시키들'이라고 번역했어요. 너무 저렴한…(웃음) 번역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아 할 분들도 계실 텐데요. 예전에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났던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한국계 미국인이었죠. 스물여덟 명을 죽였어요. 부모가 자식 교육 잘 해보겠다고 어린 남매를 데리고 미국에 간 거예요. 게다가 하필 백인 중산층 동네로 이사 갔는데, 말도 서툴고 피부색도 다르니까 왕따가 된 거죠. 그래도 공부는 잘해서 버지니아 공대를 갔어요. 이 아이가 학교에 권총을 들고 가서 친구들과 교수를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고립된 아이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놀이를 충분히 하지 못한 아이들이라는 뜻이에요. 성장하면서 또래와 만나는 과정이 너무 약했으니 인지능력은 갖춰졌을지 몰라도 가장 중요한 휴먼 스킬, 공감 능력이 결여된 채 자란 거예요. 아이들은 경험하는 것들을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아가죠. 놀이는 그렇게 쌓인 벽돌들을 굳게 하는 접착제 역할을 해요. 앉아서 책만 보는 공부를 놀이 형식으로 바꾼다고 해서 놀이가 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접근해서는 곤란합니다. 놀이는 그저 놀이여야 합니다.

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관찰해보면 아주 흥미로워요. 놀이를 통해 아주 사소한 것부터 휴먼 스킬을 채워 나가거든요. 이를테면, 놀이에는 삶과 죽음이 포함되어 있어요. 애들이 놀 때 "금 밟아서 죽었어!" "땡! 살았다!" 이런 말 많이 하잖아요. 애들은 살고 죽고를 계속 말해요. 죽었다고 집에 가나요? 술래가 죽은 애들을 한곳에 몰아두죠. 놀이하다 죽은 애들은 화장실도 술래한테 물어보고 가야 해요.(웃음) 아이들은 놀이에서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연습해요.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이잖아요. 죽은 애들에게 '땡'을 해준 애들은 살아 있는 애들이죠. 아직 죽지 않은 친구가 와서 생기를 불어넣으면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요. 만세를 부르며 뛰어나가죠. 저는 그걸 부활의 기쁨이라고 봐요. 한국 애들만 이러고 놀까요. 전 세계 아이들이 그런 놀이를 해요. 놀이는 본능이거든요.

이렇게 아이들의 놀이를 살펴보면 아주 재밌는 요소들이 많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을 신비화시켜요. 아이가 어른보다 지혜롭다고도 하는데, 이런 얘기는 사실이 아니에요.(웃음) 유전자에 기록으로 남아서 유전자의 명령대로 하는 거예요. 여자애들은 대체로 엄마 놀이나 병원 놀이를 좋아하잖아요? 이 놀이의 공통점은 '뭔가를 돌본다'는 거예요. 전 세계 모든 여자아이들이 일정한 연령기에 그런 놀이를 하는 이유는 엄마가 되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근대에 들어서면서 성 평등 얘기가 나오면서 모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생겼는데, 저는 그걸 과학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모성은 정말 만들어진 걸까요? 저는 그게 본성이라고 봐요.

남자애들은 또 양상이 달라요. 장난감 총칼 가지고 싸우면서 놀죠. 아빠가 되는 연습, 수렵채취를 연습하는 거예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요. 남성이 수렵채취를 하지 않은 것은 100년 정도밖에 안 돼요. 수십만 년 동안 그렇게 가족을 먹여 살려왔으니 유전자에는 그 기록이 더 많은 거예요. 남자애들 노는 거 보면 얼마나 생생해요. 진짜 죽은 것처럼 넘어지고 피하고 구르고 하잖아요.

아이들 놀이를 관찰하면서 제일 재밌었던 것은 '깍두기' 문화예요. 저는 그게 인턴십이라고 봐요. 정식 사원은 아니고 견습생이죠. 어른들은 인턴을 악용하고 착취하지만 아이들은 안 그래요. 사실 인간의 유전자에는 그런 기록이 없거든요. 아이들 문화에서 깍두기는 '안 죽는 사람'이에요. 동네에 새로 이사 온 동생을 동네 큰형이 깍두기로 임명하죠. 그럼 얘는 안 죽어요. 그리고 한 사람이 독점하면 안 된다는 것도 배웁니다. 다들 어렸을 때 딱지치기해보셨죠? 저도 기억이 나는데, 아버지가 달력을 뜯어주는 날은 횡재하는 날이었어요. 빳빳하니까 잘 안 뒤집어지거든요. 근데 옆집 사는 친구가 라면 박스로 딱지를 접어오면, 그날은 공치는 거예요. 그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딱지를 잃은 아이들이 동맹을 맺어서 독점한 친구를 무리로부터 배제시키는 거예요. 아이들 사이에서 "너랑 안 놀아!"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죠. 그럼 그 아이는 자기의 노동으로 획득한 그 딱지들을 들고 가서 화해를 시도합니다. 그때 물질적 보상을 제시해요. 그걸 전문용어로 '개평'이라고 하죠.(웃음)

다른 민족, 인종들도 그렇게 놀아요. 제가 아마존 부족의 아이들과 뉴욕에 사는 아이들을 비교해봤더니 화해가 이뤄지는 비율, 즉 개평의 비율이 놀랍도록 비슷해요. 내가 딱지 열 장을 잃었는데 상대가 두 장만 돌려주면 화해가 안 이뤄져요. 다섯 장은 너무 많고, 네 장쯤 줘야 해요. 자기도 열심히 해서 땄는데 절반은 불공정하잖아요. 아이들은 놀면서 이런 중요한 휴먼 스킬을 몸으로 익혀 나갑니다. 저는 아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터득하는 그런 휴먼 스킬, 인간의 방식을 어른들 세계에도 제도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대기업들의 연간 수입에서 40퍼센트는 무조건 사회에 환원해야 합니다. 그럼, 화해가 이뤄져요. 그런데 겨우 몇 퍼센트 내면서 생색내고, 그것도 안 내려고 별의별 편법을 쥐어짜지요. 본성에 위배되는 거예요.

놀이에 필요한 세 가지

놀이는 아이들 삶의 조건이고, 이를 통해서 아이들은 인간이 되는 연습을 계속해 나갑니다. 그래서 놀이를 단순히 학습의 방편으로 접근해서는 안 돼요. 저는 온전한 놀이를 위해서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봐요. 첫째, 아이들에게는 '자유롭게' 노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면 어른들은 자유 놀이 학원을 만들어요. 그러면 아이들은 지겨워해요. 놀이학원 갔다 와서 "엄마, 나 이제 놀아도 돼?" 할 거예요.(웃음) 그래서 저는 '자유 놀이'를 '마음껏 놀이'라고 해석해요. 이 '마음껏'이라는 조건이 중요해요. 어른들이 짜준 시간표 말고 아이들에게 시간을 되돌려주어야 마음껏 놀 수 있어요. 두 번째는 공간의 문제예요. 예전에는 동네마다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 공터가 있었죠. 이 공터라는 게 정말 절묘해요. 아이들은 공터가 있으면, 마음껏 놀면서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어요. 어느 날엔 딱지치기, 구슬치기, 땅따먹기 게임장이 되어 있고, 또 어느 날은 거기서 나이트클럽처럼 춤추고 노래를 해요. 그런데 만약 어른들이 이거 해라, 하면서 바닥에 선을 그어주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그 놀이만 하게 될 거예요. 지금은 동네 공터도 다 사라졌어요. 어른들이 빈 땅만 있으면 전부 집 지어서 팔아먹었죠. 그리고는 동네 귀퉁이에 놀이터랍시고 몇 개 만들어놨어요. 전국 어딜 가도 아이들이 똑같은 놀이터에서 똑같이 놀아요. 도대체 그걸 누가 정했나요. 그런 걸 없애고 그냥 공터로 두면 아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놀 수 있어요. 그런 공간의 문제가 굉장히 절실해요.

세 번째가 제일 중요한데요. 오늘 강연 끝나고 집에 가면 아이들에게 "이제 너 마음껏 놀아!"하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아이는 뭘 할까요? '이게 웬 떡이냐' 싶어 혼자 골방에 들어가서 마음껏 게임이나 하면서 놀겠죠. 그런데 혼자 마음껏 놀면 '고립된 아이'가 돼요. 가장 중요한 것은 친구입니다. 아이들은 놀이 집단에 들어가면서 서열도 배우고, 깍두기 챙기는 법도 배우죠. 그런 면에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나이별로 갈라놓은 것은 정말 이상한 제도라고 생각해요. 교실에는 나이 많은 형부터 동생까지 다 있어야 해요.

마음껏 놀 수 있는 시간과 공간, 다양한 친구들, 저는 놀이에는 반드시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인간의 방식을 갖추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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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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