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으려 해도, 산부인과가 없다

[복지국가SOCIETY] 여주시에서 공공 의료 확대를 위한 첫발을 떼다

꽤 오래 전에 보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어 하는 홍준표 씨가 경남도지사직에 당선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민주 진보 진영이 합심해서 확보한 경남도지사라는 소중한 교두보를 미련 없이(!) 포기함으로써 벌어진 일이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가슴을 쥐어짜는 슬픔을 느끼게 만든 그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거리낌 없이 수행했던 '사람 사는 세상'에 역행하는 정책들 중에 우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아이들로부터 밥그릇을 빼앗는 행태인 무상 급식 지원 중단과 서민들의 건강권을 짓밟은 진주의료원의 폐원이었다.

미래의 대한민국을 이끌고 갈 동량들에게 의무적으로 급식을 제공하는 것은 충분히 마땅한 정책이다. 또 국가와 지방 정부에는 '공공보건 의료'를 지속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시민의 '건강권'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도 자본과 시장의 효율성을 앞세워 '공공성'을 파기한 진주의료원 폐원은 민주주의와 더불어 공공 보건의료의 역사를 후퇴시킨 대표적인 사건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 2013년 3월 27일 보건의료노조는 경남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주의료원 폐업 반대'를 요구하는 시민 3만5000명의 서명을 전달했다. 기자회견에 앞서 한 간호사가 눈물을 보이고 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심근경색 와도 병원 못 가고 파출소에서 숨지는 현실

홍준표 지사는 시민의 건강권을 지켜오던 진주의료원을 자본과 시장주의의 수익성 논리를 앞세워 폐원시켰지만, 경기도 끄트머리의 작은 도시 여주에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공공의료 개선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여주시는 인구 12만 명이 채 안 되지만 면적은 서울보다 넓은 608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여주에서는 1년에 약 800명의 새 생명이 태어난다. 그런데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출산 산부인과'가 없다. 갑자기 독감이 유행하면 제대로 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소아과 병의원'도 부족하다. 소아든 성인이든 긴급하게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에 제대로 대응할 변변한 '응급센터'도 없다. 결국, 조금이라도 큰 병에 걸리면 치료받을 병원이 없어 대도시로 '원정 치료'를 받으러 가야 하는 실정이다.

지금 여주 시민들은 산모가 갑자기 진통을 시작하면 3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를 최고 속도로 질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위험천만한 도시에서 살고 있다. 심근경색으로 고통을 호소하다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가 숨을 거두는 비극적 상황이 발생하는 의료 불안의 도시에서 살고 있다. 아이가 불덩이의 몸을 견디지 못해도 진료 예약이 다 되었다는 말 한 마디에 눈물을 머금고 병원 문을 나서야 하는 경우도 있다. 저항력이 약한 아이를 성인들과 함께 쓰는 병실에 입원시켜야 하는 슬픈 현실도 감내해야 한다. 이것이 여주 시민의 의료 현실이다. 내 아버지도 뇌출혈로 여주시의 작은 병원을 전전하다 결국 5시간 이상을 허비하고 서울의 큰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났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만든 자발적 모임 '여의주'

그래서 여주의 젊은 엄마들이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일어나 '여의주'(여주시 의료서비스 개선을 위한 주부들의 모임)를 만들었다. 여주시의 의료 환경 변화와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첫 발을 뗀 것이다. 이는 꼭 필요하고 적극 환영할 일이다. 나는 시의원으로서 여기에 가능한 모든 힘을 보탤 생각이다.

지난 1월에는 20여 명의 젊은 엄마들이 모여 여주시 의료서비스 개선을 위한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어서 2월 13일에 150여 명의 '깨어 있는 시민'들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인 이상이 제주대학교 교수를 초빙하여 '엄마들이 행복한 복지 여주'를 만들기 위한 열린 강연회를 개최했고 성황리에 마쳤다. 작지만 거대한 첫발을 성공적으로 내디딘 것이다.

올해 6월 마지막 주 쯤, '여의주'가 주도해서 여주시 의료서비스 개선을 위한 공청회를 열 준비를 하고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 여주시 '공공 의료'에 대한 정책적 합의를 마련하는 토대를 다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여주시 공공 의료 정책의 발전 전망에 대한 큰 그림도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

▲ 서울의 한 병원 신생아실. ⓒ연합뉴스

스웨덴이 오늘날 보편적 복지국가의 기본 틀을 만드는 데 40년의 세월이 걸렸고, 핀란드가 교육 복지국가의 모습을 만드는 데 15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덴마크가 행복지수 1위의 복지국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또한 10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점에서 복지국가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후보가 학교 무상 급식을 공약으로 내 건 이후 시작된 치열한 복지국가 논쟁이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반복지 세력의 힘이 보편적 복지국가로의 거대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복지의 참 맛을 느껴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과잉 복지로 국가 재정이 흔들릴 위험이 있다고 상시적으로 협박을 일삼는 '반복지 세력'에 대항할 복지국가 정치 세력은 여전히 부족한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여주에서도 그동안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시민운동이 활성화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전통적 보수 성향의 도시 여주에서 이제 소아과 병의원의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발걸음을 막 시작한 '여의주'가 여주를 '사람 사는 세상'인 역동적 복지국가 만들기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익을 담당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공공 의료를 위한 시민들의 작은 몸짓을 응원하며

복지와 생활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시민의 행복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든든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보편적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소아과 병의원, 소아 전문 응급센터, 출산 산부인과 병의원, 지역 사회 종합 병원 등을 갖추는 일은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하는 자본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의 논리가 아닌 시민의 건강권을 지켜내기 위해 재원을 투여할 필요가 있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

여주에서도 과거에 산부인과 유치를 추진했지만 실패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공공 의료를 확대하려는 시민들의 자발적 노력을 '되지도 않을 일'로 폄훼하거나 비난만을 앞세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낡은 생각이나 소극적인 무사안일에 젖어 있는 '무늬만 지도자들'이 여주 시민들의 행복권을 향한 소중한 바람을 짓밟는 어리석은 행태가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여의주'를 비롯한 여주의 깨어 있는 시민들은 공공 보건의료를 확대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주치의 제도를 비롯해 시민의 건강권을 지킬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찾아가는 첫 발을 내디뎠다. '여의주' 같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여주시를 거듭나게 하는 거대한 변혁의 물길을 만들어 낼 것이다. '혼자 꾸는 꿈은 그냥 꿈이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이 옳다. 희망을 찾아 나서는 역동적이고 자랑스러운 여주 시민의 모습을 기대한다.

(박재영 여주시의원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입니다.)

(☞ 이상이의 칼럼 읽어주는 남자 바로 가기 : OECD 국가들 연금 수령시기 늦췄다고 한국도 67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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