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 시위대'의 성조기 크기는 태극기의 두 배

[기고] 박근혜 탄핵과 미국이 대체 무슨 상관인가?

지난 1월 21일, 서울 종로구 대한문 앞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담긴 현수막과 대형 성조기를 펼쳐들고 행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의 이른바 '애국 보수'들이 집회에서 성조기를 흔든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모르긴 해도 국내 정치 문제로 미국 대통령의 사진이 등장한 것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한국의 보수들은 왜 걸핏하면 미국과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성조기를 흔들까? 자기 나라 대통령 탄핵을 반대한다면서 어찌 남의 나라 국기와 대통령의 사진을 들고 나오는 걸까?

행진에 등장한 성조기는 3차로를 덮는 대형 크기였던 반면 태극기는 그 절반 정도밖에 안 됐다고 한다. 이게 도대체 자칭 '애국 보수'들이 주최한 집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애국을 가장한 국적 불명의 가짜 보수들의 진짜 국적은 어딘가? 대한민국인가 미국인가? 아니면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어느 여고생의 신랄한 표현처럼 '대한미국'인가?

집회 참가자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성조기를 든 이유로 '미국 참전과 구호 지원, 한미 동맹 강화, 트럼프의 박근혜 지지 기대'등을 꼽았다. 그들이 성조기를 든 이유를 하나씩 짚어보자.

▲ 지난 2월 18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에 태극기보다 큰 성조기가 등장했다. ⓒ연합뉴스

첫째, 미국의 한국전 참전이다. 미국은 일제가 항복하기 5일 전인 1945년 8월 10일 38선을 일방적으로 그어 한반도를 분단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8월 11일 트루만 대통령은 '미군은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항복을 받기 위한 군작전 편의상 일시적으로 한반도를 분할하며 본 군사작전이 끝나는 대로 한반도에서 철수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다.

미국이 제안하고 구 소련이 동의해 획정된 38선을 경계로 분단된 한반도 북부에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진주했고, 미군은 한 달 뒤인 9월 8일 남부 인천항에 도착한다.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한국전쟁은 종식되지 않은 채 분단은 70여 년째 지속되고있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했지만 미군은 아직도 남한에 주둔하고 있다.

한반도를 분단하여 '두 개의 한국(Two Koreas)'이 존재하게 되었고, 이데올로기가 서로 다른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게 되면서 통일과 독립을 위한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만든 것은 바로 미국이다.

물론 미국이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공산주의 북한으로부터 남한을 지키고 남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중국의 예를 들어보자. 1940년대 중반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이 중국 대륙 지배를 위한 국공 내전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공산당에 밀렸던 국민당은, 중국이 공산화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국의 참전을 간청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외면했고, 결국 지금의 남한 영토보다 100배가 더 큰 중국이 공산화되고 말았다.

이를 보더라도 중국땅의 100 분의 1도 안 되는 남한 땅과 중국 인구와는 비교도 안되는 남한 사람들을 공산국가인 북한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미군이 수만 명의 군인들을 희생시켜가면서 싸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른 자국의 국익을 수호하기 위해 한반도를 분단했고, 참전했고, 같은 이유로 지금도 남한에 미군을 주둔하고 있다. 남한의 안보나 통일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니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짝사랑은 그만 접고 제발 성조기 좀 그만 흔들란 말이다.

다음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미국의 구호 지원 문제이다. 탄핵 반대 집회에 성조기를 들고 나온 한 여성 참가자(66세)는 "한국전쟁 때 미국이 원조해 준 강냉이죽, 전지분유가 없었으면 우린 다 굶어 죽었을 것이다. 미국은 은인의 나라"라며 고마워했다. 한 남성 참가자(72세)는 "한국전쟁에서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수많은 미군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늘 미국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 중 일부가 이렇게까지 친미적인 성향을 띄는 것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집필한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역사학과 교수가 지적했 듯이, 해방 이후 줄곧 왜곡된 역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결코 '은인의 나라'만은 아니다. 분단의 원흉이기도하고, 통일을 가로막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한국땅에서 성조기는 계속 휘날릴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1905년 미국이 일본과 밀약을 맺어 조선을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민족의 운명은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던들 어쩌면 국토분단도 민족상잔도 없었을 것이고 통일된 자주독립국가가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전쟁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 근본 원인을 알게 되면 미국이 준 강냉이죽과 분유에 감읍하여 성조기를 다시 치켜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병 주고 약 주는 나라임을 잊어선 안 된다.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은 베트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우리의 국익을 위해서였듯, 미군이 한국전에 참전해 싸우다 죽은 것 또한 그들의 국익을 위해 그랬던 것뿐으로 우리가 특별히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다. 미국을 구세주처럼 여기는 쓸개빠진 한국민과는 달리 민족 자존감이 강한 베트남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군 파병을 전혀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민족이다.

둘째, 한미 동맹 강화다. 세계적인 국제정치학자인 전 시카고대 한스 모겐소 교수가 강대국과 약소국 간에 체결한 가장 대표적인 불평등 동맹의 사례로 꼽은 '한미동맹'은 강화할 것이 아니라, 굴욕적인 내용을 대폭 개정해 대등한 동맹 관계를 만들어야 할 대상이다. 일방적으로 국익을 훼손해가면서까지 고수해야 할 동맹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동맹에 입각해 한국에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전액 부담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이미 해마다 1조 원 이상 방위비를 분담하고 있고 세계 최대 미군 기지인 평택미군기지 건설 비용 107억 달러 중 96%를 한국이 부담하고 있는데도 걸핏하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미국에 퍼주는 천문학적인 돈으로 자주국방력을 배양해 우리 안보는 우리 스스로 지킬 테니 철수할 테면 언제든 하라고 미국에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다음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

셋째, 트럼프가 박근혜에 대한 지지를 해줄 것이라는 기대다. 만에 하나 탄핵을 기각하도록 트럼프가 헌법재판소에 압력이라도 넣어 주길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에서 그의 얼굴이 새겨진 대형 성조기를 펼쳐들었다면 이는 내정간섭을 자초하는 부끄러운 짓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이 주권독립국가가 아닌 미국의 속국임을 자인하는 꼴이 된다. 삼일절과 광복절에도 성조기를 휘날리고 미국 국가를 연주할 만큼, 어쩌면 토박이 미국인들 보다도 미국을 더 뜨겁게 사랑하는 한국 보수들에게, 미국이 그토록 좋으면 차라리 '미국의 51번째 주 편입 청원 범국민운동본부'라도 만들어 집회 때 자칭 애국 보수들을 상대로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은 어떨지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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