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적 지식 습득이 아닌 전인적 교양교육을 표방하며 지난 2015년 1월 개교한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지순협 대안대학)’이 지난해 말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지순협 대안대학을 이끌어온 심광현 지순협 운영위원장(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 지순협과 대안 대학과 관련된 글, 그리고 지순협 졸업생의 논문 1편을 보내왔다. 지순협의 의미와 대안대학의 미래에 관한 글을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1.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2000년대에 계속 상승세를 달리다가 2009년 84%로 정점을 찍은 후 다시 하락하여 2016년 70% 정도로 낮아지고 있다. 하지만 70%라는 수치도 여전히 0ECD평균의 2배에 달하는 데 반해 취업률은 OECD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어마어마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경제적 과잉생산에 따른 경제공황의 피해가 고스란히 가난한 민중에게 전가되듯이, ‘학벌사회’ 이데올로기와 발맞추어 과잉 생산된 대학교육이 초래한 교육 공황의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 다수의 몫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인공지능 시대의 본격적인 도래에 따라 일자리 감소의 속도가 가속화될수록 이 피해 역시 가중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육 자체가 불필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가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해서 경제가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제도적 혁신이 시급해지듯이, 교육 역시 전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과 혁신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초중등 교육현장에서는 진보교육감의 당선으로 2010년부터 혁신교육의 흐름이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2011년 출발한 경희대학교의 후마니타스 컬리지를 제외하고는 대학교육에서 혁신의 움직임은 아직까지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정작 더 강력한 혁신이 필요한 대학교육에서 진학과 취업 사이의 악순환 사이클을 멈추게 할 뾰족한 제도적 방책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인공지능과 4차산업혁명의 가속화는 이제까지 '좌뇌중심적'인 방식으로 분과학문적인 지식 습득에 주력해온 대학교육과는 전혀 다르게, '좌우뇌 균형적>'인 방식으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의 연결-순환-창발을 촉진할 새로운 혁신교육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진학-취업의 연결 비율이 전체 대학 진학자(고등학교 졸업자의70%)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할 경우, 당장 고등학교 졸업자의 30% 이상은 기존의 대학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적인 혁신적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여기에 인공지능시대의 도래와 함께 취업률이 줄어들 경우, 대안적인 혁신적 대학교육의 수요는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교육 수요와 현실의 제도교육 사이의 격차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교육이 이 격차를 좁히지 못한다고 한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러는 동안 피해를 보는 것은 새로운 세대이기 때문이다. 경직된 사회제도가 스스로 혁신방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사회구성원들 스스로 자율적인 대안을 만들어 실천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 격차를 뛰어넘기 위해 한국 최초로 대안대학을 구성하기 위한 자율적 시도가 바로 2013년 10월에 창립한 지식순환협동조합(이하 지순협) 대안대학이다.
2. 지순협 대안대학은 창립 후 약 14개월 간의 교육과정 워크샵을 거쳐 '협력교육을 통한 명시적 지식과 암묵적 경험의 통섭'이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교육적 패러다임을 세우고, 가속화되고 있는 자동기술화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인간학적 잠재력의 전면적 발달과 자유-평등-연대의 가치를 체화한 새로운 민주시민 육성을 목표로 2015년 1월에 개교하여, 2016년 12월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 대학은 100여명의 생산자조합원 및 후원회원(교수진)과 150여명의 소비자 조합원(학생과 일반조합원)으로 구성된 <협동조합>이기에 교육과정과 운영체계를 포함한 모든 사업 내용과 절차가 민주적으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한국 고등교육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인 대학설립과 운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립하려는 실험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2년제 8쿼터(쿼터당 2개월 수업과 1개월의 방학) 기간 동안 개설되는 이론강좌 40여개와 워크샵강좌 20여개 중 절반 이상을 수강하고, 마지막 6개월 동안 졸업논문을 완성해야만 학교로부터 학위(비인가 학위)를 수여 받을 수 있는 지순협 대안대학의 비교적 빡빡한 교육과정은, 학생 개개인의 멘토 역할을 하는 <담임교수제>(6명)와 년간 3회 (2015년에는 4회)의 '학예발표회'라는 독특한 방법을 통해 협력교육을 실천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개교 후 2년 8쿼터 동안 약 60여명의 교수진이 강의에 참여했으며, 휴학생을 제외하고 1-2학년을 합해서 현재 46명이 재학 중에 있다. 2016년 12월 졸업논문을 통과한 1기 학생은 4명이고, 2017년에는 17명이 졸업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2016년 첫 졸업생의 논문 제목의 사례를 통해서 지순협 대안대학의 교육과정의 전공트랙과 교육 방향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신자유주의적 주체화를 넘어선 자율적-연대적 주체화의 모색: 랑시에르와 칸트 분석을 매개로>(박두헌), (2) <한일 청년세대 비교연구: 청년들의 달관과 절망 또는 분노>(정명준), (3) <한국 전통연희의 현대적 재해석에 기반한 창작연출론 소고: 통섭연희에 관한 ‘예술가 연구’ (Artistic Research) 방법 구축을 위하여>(김기영), (4) <능동성의 본질을 경험하기: ‘혼저옵서예’ 기획보고서>(이솔잎). 이 중에서 (1)과 (2)는 이론전공 트랙에 속하며, (3)과 (4)는 문화기획창작 트랙에 속한다. 그러나 각 트랙에서 세부 분야를 나누지 않고 논문의 주제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선택하기 때문에 단지 선택 분야만 이론과 기획창작으로 나뉘어지는 사실상의 <자유전공제>인 셈이다.
논문을 쓰기 전, 학생들은 철학-문학-역사-예술 분야의 지식을 공부하는 '개인의 삶' 영역, 정치학-경제학 등 사회과학 분야의 지식을 공부하는 '개인과 사회' 영역, 물리학-진화론-생태학-인지과학 등 자연과학 분야의 지식을 공부하는 '개인과 자연' 영역의 통섭형 이론과목을 수강하면서, 자신 만의 방식으로 '인생관-사회관-자연관을 연결한 통합적 세계관'을 수립하는 훈련을 거친다. 또한 워크샵 강좌를 통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 내재한 암묵적 경험을 새롭게 촉발하면서 도구와 악기를 사용해 보고 도시 걷기와 문화기획 연습 등을 통해서 생활의 변화를 꾀해보는 훈련 과정을 거치고, 이론 수업에서 배운 명시적 지식과 이 경험들을 연결하여 미래의 삶의 방식을 설계해 보는 연습 과정을 거친다.
3. 지순협 대안대학의 교육과정은 ‘보편적 교양교육’의 실현을 교육이념으로 삼고 있다. 물론 이런 지향성은 올바른 의미의 교양교육이 모두 사라져 버린 오늘의 현실과는 대조된다. 그러나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제 다시 보편적 교양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좌뇌중심적인 지식의 습득과 사용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경우, 단순한 육체노동조차 인조노동 로봇에 의해 대체될 경우, 미래사회에서 개인들의 역할은 무엇이며,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잘게 쪼개져 있는 기존의 분과학문적인 지식들은 이런 질문들에 아무런 답을 제공할 수 없다. 부분과 전체, 외부 세계와 인간의 내면, 지성과 감성, 명시적 지식과 암묵적 경험 사이에 드리워져 있던 거대한 장벽을 해체하고, 기존의 모든 이분법을 가로질러,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개인과 사회 사이의 상호작용의 전모를 규명하면서, 새로운 문명에서 개인적 삶의 위치와 역할을 새롭게 찾아내야 하는 노력은 오직 '좌우뇌 균형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올바른 의미에서의 교양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21세기가 필요로 하는 올바른 의미에서의 '교양교육'(liberal arts)은, 학생들로 하여금 '개인과 사회와 자연 간의 동적인 상호관계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가운데 자유로운 자아실현의 방향을 세우고, 이를 위해 필요한 지식을 선별하고 지혜를 쌓아가면서, 대화와 협력의 자세를 확고하게 갖춘 성숙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해가도록 돕는 교육이다. 이는 분과학문의 지식을 입문식으로 개관하는 방식으로 전락한 일반대학의 현행 교양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영국 헤게모니가 해체되고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이 가속화되던 20세기 전반기를 치열하게 사유했던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교육의 목적>(1928)라는 강연모음집에서 대학의 기능은 "원리를 우선시키고 사소한 것을 버릴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데 있다"(2004년 국역본: 86)고 설파한 바 있다. 그는 이 능력을 "일반화의 정신" 즉, "국면 전체를 내다보는 안목이며, 하나의 관념 체계와 다른 관념 체계와의 연관성을 포착하는 안목"(2004: 58)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나무들을 넘어서서 숲 전체를 내다보는 안목, 활기찬 삶 전체를 관통하는 진-선-미라는 가치들 간의 상관관계 전체를 내다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 바로 올바른 교양교육의 역할이다.
“교양이란 사고력의 활동이며, 아름다움과 인도적 감정에 민감한 감수성이다. 단편적인 지식은 교양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지 박식에 그치는 사람은 이 지상에서 가장 쓸모 없는 인간이다. 우리는 교양과 특수영역의 전문지식을 겸비한(필자: 좌우뇌 균형교육) 인간을 육성해야 한다. 전문지식은 교양으로부터 출발하는 데 필요한 무대를 제공하며, 교양은 그들을 철학의 깊이와 예술의 높이로까지 이끌어줄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소중한 지적 개발은 자기 능력 개발(self-development)이다. 이는 대체로 열여섯 살에서 서른 살에 걸쳐 일어난다는 것이다.”(2004: 37)
21세기 이행기인 오늘날 다시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교육이다. 실제로 열여덟 살에서부터 서른 살 사이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사십 대에서 육십 대 후반까지로 폭넓게 걸쳐져 있는 지순협 대안대학 학생들의 연령 분포가 바로 좌우뇌 균형교육으로서의 교양교육에 대한 이 시대의 광범위한 수요를 시사하고 있다. 이 교육은, "전체를 내다보는 사고력, 아름다움과 인도적 감정에 민감한 감수성"을 기르는 교육(진리 탐구적 지성과 미를 향유하는 판단력과 선을 추구하는 이성에 민감한 감수성 교육)이며, 이를 통해 학생 각자가 향후 전공과정에서 어떤 전공지식을 쌓더라도 "철학의 깊이와 예술의 높이"를 지닐 수 있도록 하여(지성의 깊이와 감성의 높이의 선-순환 교육), 평생 동안 스스로 "자기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교육(자기-통치의 역량을 기르는 교육)이다.
과거에는 이런 성격의 교양교육을 '전인교육'이라고도 불렀지만, 단지 소수의 지배엘리트를 육성하는 데에 국한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 양성을 위한 '문/사/철 + 시/서/화 삼위일체 교육'이 그러했고, 오늘날에는 하버드 대학의 교양교육이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전인교육적 교양교육이 소수의 지배엘리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보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주의 공화국은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주권과 사회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적극 참여할 때라야 명실상부하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자기 배려와 타자 배려를 일치시킬 수 있는 성숙한 인격과 폭넓은 지식과 안목을 갖추었을 때라야 민주주의 사회의 토대가 지속적으로 다져질 수 있다.
화이트헤드가 교양교육을 "전체를 내다보는 안목"과 "생기 있는 관념"에 의해 지적 활력에 넘치는 "위대한 것을 향해 인간성을 각성시키게 한 지적 혁명"이라고 강조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식의 홍수와 경험의 표류가 일반화되어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과목 수와 교육 내용을 줄이되 "생기 있는 관념"과 "전체를 내다보는 안목"을 기르기 위해 "철저하게"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양교육이 필요하다. 화이트헤드가 제시한 방법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생들로 하여금 "생기 있는 관념을 체화"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지식을 굳게 결합"시켜야 한다.
“대학의 주요 존재 이유는 단지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교수들에게 연구 기회를 부여하는 데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두 기능이라면 반드시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는 시설 없이도 더 저렴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을 필요로 하는 정당한 이유는 학문이라는 상상적 사색에서 젊은이와 늙은이의 시대를 통합시켜 지식과 인생의 향기와의 연관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대학은 지식을 전수하지만 그것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전수한다….상상력이 풍부한 사색에서 솟아나오는 격양된 분위기가 지식을 변형시킨다….청년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훈련을 통해 상상력이 강화되었을 때, 이 상상력의 에너지는 한평생 상당한 수준에서 보존된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인생의 경험이 부족하고, 경험을 거친 사람들에게는 빈약한 상상력 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의 비극이다. 어리석은 자는 지식 없이 상상에 모든 것을 맡긴 채 행동한다. 현학자는 상상력 없이 지식에만 의존해서 행동한다. 대학의 과제는 상상력과 지식을 굳게 결합시키는 것이다."(화이트헤드, 2004: 199-201)
둘째, 상상력과 지식의 굳건한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열쇠는 "상상력으로 점화된 교수단을 확보"하는 데 있다.
“ 상상력은 오직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학구적으로 노력해 온 교수들에 의해서만 전달될 수 있다.(…) 하나의 대학을 조직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체는 그들의 학문이 상상력으로 점화된 교수단을 확보하는 데 있다.(…) 여러분은 어떤 오래된 진실성을 갖는 고전적인 지식을 다룰 수도 있겠는데, 그런 경우에도 여러분은 학생들에게 그 지식이 마치 지금 막 바다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직접적인 중요성의 신선함을 느끼도록 해주어야 한다. 학자의 사명은 삶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것이다.”(화이트헤드, 2004: 207-209)
2015년 1월 개교한 지순협 대안대학은 여러 가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과제를 충실히 결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2016년 12월 1000만 촛불이 광화문 광장의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동안 제1기 졸업생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첫 논문을 완성했다. 2년의 짧은 교육과정을 거쳐 한 편의 논문을 작성한 것으로 보편적 교양교육이 완료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 과정은 아마도 미래의 삶의 전 과정 동안 지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광장의 정치를 통해 새로운 민주공화국으로의 전환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시기에 1기 졸업생들이 첫 논문을 완성했다는 사실은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를 일치시켜나갈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이들이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기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런 까닭에 제1기 졸업생들의 논문 4편을 모은 첫 논총집의 출판이 지닌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거라고 본다.
지순협 대안대학은 오는 3월 3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은평구 혁신파크에서 2017년 2학기 신입생 모집을 위한 설명회를 개최한다.시간 : 2017년 3월 3일(금) 저녁 7시 30분 ~ 9시 30분장소 : 서울혁신파크 미래청(1동) 4층 402호 지순협 대안대학* 문의- 메일 : kcunion2013@gmail.com- 전화 : 02-6401-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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