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출되지 않은 권력' 법원의 민주화를 위해

[기고] 반기문 이후⑤ 법원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지난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영장 청구가 법원에 의해 기각되자 한 현직 판사는 영장 시스템을 비판하면서 사법제도 개선을 주장했다.

그는 서울중앙지법 형사 영장전담과 부패전담(뇌물, 정치자금) 등 형사 재판부에 중요 사건을 몰아넣는 사무 분담 방식과 이러한 전담재판 사무 분담의 결정 권한이 서울중앙지법원장과 대법원장에 의해 독점돼 있으며, 영장전담 형사합의부 등 요직 사무 분담에 고등부장 승진을 얼마 안 남긴 잘 나가는 지방부장을 꽂아 넣은 후 고등부장으로 승진시키는 등 영향력이 행사된다고 비판했다.

중앙통제 방식의 법원 사무행정, 판사회의로 넘겨져야


우리나라 법원에서 재판부 구성을 비롯해 영장 시스템 등의 사무 분담은 대법원장과 그를 보좌하는 법원행정처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독일 법원조직법은 재판부 구성에 관한 사항을 사법행정 사무로 분류하지 않는다. 독일에서 사무 분담 및 사건 배당은 사법권 독립의 핵심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이들 업무를 사법 행정 사무로 인정한다든가, 각각의 소송에 따라 그 어떠한 이유를 붙여 임의적으로 재판부나 법관에 배당될 경우 사법권의 독립을 침해할 위험성이 크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각 법원에서 사무 분담 계획의 수립은 '판사회의'의 권한이다. 법관들은 재판상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사무 분담 계획을 수립하고 그 결정 과정에서 어떠한 지시도 받지 않으므로 사법 행정이 영향을 미칠 여지가 없다.

법원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법원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그러나 법원은 재판을 통해 국민 개개인의 일상과 운명을 결정짓고, 국가 정책을 좌우한다. 나아가 법원의 결정은 사회 전체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그리해 법원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본래 행정 사무관리(administer) 업무를 지원하는 기관이 비대해짐으로써 이러한 행정관리 업무를 중심으로 관료적 질서를 구축하면서 조직 내 여타 기관 위에 군림하는 현상은 우리 사회 관료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법원 역시 이런 현상이 존재하고 있다. 법원행정처가 바로 그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법 권력' 법원행정처

'보이는 권력'과 '보이지 않는 권력'이 존재한다. 사법부 조직이라 하면 대법원, 고등법원, 판사 등등 우리들은 상당히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법원행정처라는 기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그리해 보이지 않는 이 법원행정처가 기실 권력기관 중의 권력기관이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전형이다.

법원행정처는 인사관리실이나 기획조정실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법관의 재판을 보조한다는 본래 취지를 넘어 법관에 대한 감독기관으로 기능하면서 전체 법관과 전체 재판을 획일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을 적지 않게 받고 있다.

이렇듯 사법 관료화의 핵심으로 부상한 법원행정처는 일본 식민지시대 잔재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즉, 일본 제국 시대에 일본의 전체 법원과 재판관을 지배, 통제했던 사법성(司法省)을 그대로 모방한 제도인 것이다(사법성은 이후 최고재판소 사무총국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 세계적으로도 법원행정처라는 이 독특하고도 기이한 기구는 선진국 중 가장 사법 후진국인 일본을 제외하고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법원의 권위란 '숫자의 희소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실질적으로 재판을 담당하지 않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하면 대법관은 사실상 12명에 불과하다. 이 12명의 대법관으로 밀려드는 재판을 감당하기 어렵고, 그래서 일종의 편법인 상고법원을 추진하다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대법원은 한사코 대법관 증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현재 대법관 증원에 대한 반대 논리의 저변에는 소수 엘리트주의의 고착에 의한 기득권 유지와 강화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거나 혹은 헌법재판소 재판관 숫자와의 비교라는 경쟁 심리가 깔려 있다고 지적된다.

하지만 최고법원의 권위란 '대법관 숫자의 희소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국민의 신뢰로부터 이뤄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턱없이 부족한 대법관 수를 대폭 증원하고 공정하며 신속한 상고심 서비스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국민이 대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될 때까지 수요가 존재하는 한, 대법원의 재판서비스 기능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독일 대법관 숫자는 320명에 이르고 있다.

사법정의의 실현과 국민을 위한 사법서비스, 이것이 법원의 존재 이유

우리나라의 법관은 우선 숫자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우리나라 법관 정원은 2013년 10월 말 현재 2739명으로서 인구 10만 명당 5.37명에 불과하다. 유럽의 경우, 모나코의 54.5명을 비롯해 우리와 유사한 법제를 가지는 독일이 24.5명, 스위스 16.5명, 프랑스 11.9명 등이다. 심지어 폴란드나 체코, 러시아도 우리의 4배에서 6배의 수준의 법관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전에 고위직 외무공무원 선발 방식이었던 외무고시가 소수 정예화해 엘리트화·귀족화한 것과 동일한 논리로 특권화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워킹맘'이던 30대 판사가 과중한 업무로 과로사한 사건까지 있었다.

오늘날 검찰 권력이 오늘날 무소불위 무제한적으로 행사되고 있는 것도 기실 검찰의 기소권 남용을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법원이 자신이 가진 현재의 영역만을 지키는 데 급급해 역할과 책무를 스스로 포기, 방기하면서 심화된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된다.

무엇보다도 국민의 사법 접근권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법원과 법관을 대폭 증설, 증원하고 사법 서비스의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마련되는 체제를 구축해나가야 한다. 국민을 위한 사법 서비스 제공, 이것이 사법정의의 실현과 함께 법원의 존재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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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섭

1970년대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몸담았으며, 1998년 중국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2004년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회도서관 조사관으로 일했다. <변이 국회의원의 탄생>(2019), <광주백서>(2018), <대한민국 민주주의처방전>(2015) , <사마천 사기 56>(2016), <논어>(2018), <도덕경>(2019)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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