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수다 떨고 놀 때 좋아진다"

[격월간 민들레] 읽기, 이야기와 뇌 발달의 상관관계

지난해 11월 11일 자 '영어 잘하는 아이로 키우려면?'에 이른 두 번째 글입니다. 편집자 주. (☞ 바로 가기)

책을 많이 읽으면 머리가 좋아질까?

오늘은 흔히들 뇌 발달에 좋다고 여기는 '읽기'와 '이야기'에 대해 말할 텐데요. 우선 발달이라는 용어가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다. '발달'이라는 건 달리 말하면 '바뀐다'라는 뜻이에요. 뇌는 좋은 쪽으로 계속 진화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 상태가 변하는 것뿐이죠.

'이야기'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책을 떠올리시죠? 저는 '독서'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독서는 이미 이데올로기가 되었어요. '책을 많이 읽는 것'이라고 세뇌되었죠. 아이가 제대로 성장하는 데 무엇이 중요한지 따져보면, 책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요. 책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서 대신 '읽기'라고 합니다. 서구에는 '독서학'이라는 학문이 있는데, '사이언스 오브 리딩(Science of reading)' 을 번역한 말이에요. 여러분은 오늘부터 '독서도 과학'이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뇌과학 연구가 진전되면서 체계적인 독서에 관한 내용도 자연스럽게 뇌과학의 범주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사람들이 독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책 속에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일 텐데요. 인간의 뇌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뇌가 '정보성' 이야기보다 '다른 존재의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죠. 이야기란, 단순히 정보를 교환하는데 그치지 않고 마음을 주고받는 행위입니다. 제가 말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수다'예요. 실제로 수다에 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돼왔습니다.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어요.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한쪽에는 친근한 이야기를 나누며 수다를 떨게 하고 다른 한쪽에는 어려운 주제를 던져주고 심각하게 지식과 정보를 끌어내는 토론을 하도록 했어요. 그리고 30분 뒤에 같은 문제를 주고 시험을 쳤는데, 어느 쪽이 점수가 더 잘 나왔을까요? 수다 떤 그룹이 15퍼센트나 높았어요. 수다를 떨었더니, 인지능력이 올라가고 전전두엽이 활성화된 거예요. 토론했던 그룹은 전혀 변화가 없었고요. 신기한 일이죠? 전두엽은 대뇌의 앞쪽이에요. 전두엽의 가장 앞쪽이 전전두엽인데, 이 부위가 왜 중요한가 하면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을 보여주는 곳이거든요. 다른 동물들도 전전두엽이 있긴 하지만, 인간만큼 복잡하진 않아요. 전전두엽은 마음을 부여하거나,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능력, 절제하는 능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기억'에서 비롯되는 능력이에요. 기억력이 나쁜 동물에게 미래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추론해요. 예를 들어 '아, 태풍이 오겠구나' 싶으면 식량을 조금씩 비축하면서 재난에 대비하죠.

'기억' 덕분에 공감 능력 같은 마음을 부여하는 능력도 생겼습니다.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기도 하고요. 이게 참 중요해요. 남의 고통을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고 마음으로 느낀다는 거죠. 인간의 절제력도 마음 덕분에 생겼어요. 다른 동물들은 욕망, 본능의 수준에서 살아가지만 인간은 본능대로 다 하지 않아요. 운전하다 보면 서로 추월하면서 싸우는 사람들 있죠. 그건 인간의 상태가 아니에요. 제어하는 능력을 잠시 잃은 거죠.(웃음)

수다에 관한 연구 결과를 가장 많이 가져다 쓰는 곳이 경영 쪽이에요. 제가 미국 실리콘밸리를 가본 적이 있는데요. 인상적이었던 건 어떤 회사 안에 24시간 운영하는 호텔 수준의 카페테리아가 있다는 거예요. 한쪽에선 당구 치고, 맥주 마시고, 다른 한쪽에선 해먹을 걸어 놓고 낮잠을 자요. 그것도 근무 시간에…. 그런데도 그런 회사가 왜 망하지 않을까요? 인간은 수다 떨고 놀 때 머리가 좋아져요. 실리콘밸리의 기업 경영인들이 한국의 경영자보다 더 착해서가 아니고, 그렇게 하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거죠. 뇌과학의 연구 결과를 적용한 거예요.

제가 2년 정도 동네 카페에서 수다에 대한 후속 연구를 했거든요.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를 엿들었죠. 그런데 몇 가지 특징을 발견했어요. 첫째,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해요. 일정한 주제나 내용이 없어요. 주된 목적이 정보성 대화가 아니라는 뜻이죠. 둘째, 수다 떨다 보면 꼭 '그분' 얘기가 나와요. 모두가 싫어하는 그분, 동네마다 한 명씩 있잖아요? 그러다가 그분이 실제로 등장하면 수다가 뚝 끊겨요. 이건 어디서나 마찬가지예요.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이 수다 떨다가 교장이 오면 얘기가 뚝 끊기죠. 회사나 군대에서도 똑같아요. 인간은 마음을 트지 않은 사람과는 수다를 떨지 않아요. 수다에서 주고받는 것은 '마음'이라는 뜻이죠.

뇌과학자들이 말하는 '마음 이론'

인간과 유전자가 98.7퍼센트 일치하는 침팬지도 "나 여기 있어!" 정도는 알릴 수 있는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 속에 이야기는 없어요. 침팬지나 동물들의 언어는 일종의 신호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복잡해서 문법을 가지고 있어요. 침팬지의 언어는 문법이 없어요. 유전자는 1퍼센트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어째서 이런 차이를 보이는 걸까요. 이게 '마음 이론(theory of mind)' 때문이에요. 인간의 마음 이론이 '이야기'로 발전한 거예요.

뇌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마음 이론은 '마음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인간의 마음이 있다는 뜻이에요. 마음 이론의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을 알아본다는 거예요. 개는 거울 속 자신을 보고 언제까지 짖을까요? 한평생 짖어요. 개는 자아가 약하기 때문이에요. 자아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져요. 그런데 개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2분에서 10분 정도로 기억력이 굉장히 짧아요. 자아의 기본 재료는 기억이기 때문에, 기억이 많지 않으면 자아가 형성될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의 아이는 두 살 전까지는 개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여섯 살 정도 되면 포유류 중 가장 지능이 높고 사회적 동물이라 불리는 돌고래와 비슷해집니다.

마음 이론의 두 번째는 나와 남을 분명히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이면 아이들은 그전에 안 하던 무엇을 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게 거짓말이에요. 이야기를 막 지어내는 것. 아이가 거짓말하기 시작하면 속으로 기뻐해야 해요. '이 녀석이 드디어 나와 남을 분명히 알기 시작했구나' 하고요.

세 번째, 인간에게는 마음을 부여하는 능력이 있어요. 저는 결혼할 때 아내한테 선물 받은 지갑을 10년째 애지중지 하고 다니는데요, 갑자기 이게 없어지면 제 마음이 어떨까요? 이건 그냥 지갑일 뿐인데, 저는 왜 이걸 중요하게 생각할까요? 누구나 이런 물건이 하나씩 있죠.

이걸 일상적으로 얘기하면 '정(精)'이라고 해요. 정은 기억 속에 있죠. 아직 다른 동물에게서는 찾지 못했어요. 예를 들면 오래된 전통, 그 '전통'이 어디 있는 걸 말할까요? 한국인의 '얼'은 어디 있나요? '정'은 공감 능력의 기반이기도 해요.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다른 존재와 소통하기 위해, 그리고 마음을 주고받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내요. 그게 뇌가 작동하는 방식이고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이에요.

인간은 온 천지 만물과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예요. 돌덩이 앞에 서서 수능 백일기도 올리고 그러잖아요. 그 돌덩이는 그냥 돌이 아니죠. 거기 켜켜이 마음이 쌓여 있어요. 수많은 엄마들이 거기에 간절한 마음을 쌓아 올렸어요. 사실은 돌덩이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 간절한 마음을 만나러 온 거예요.

마음의 산물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문화예요. 인간들은 생물학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불필요한 일을 정말 많이 해요. 술을 먹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손해가 많은 행위예요. 돈 들고, 몸에도 안 좋고, 정신도 못 차리게 되죠. 그러나 이게 문화예요. 생물학적 단계를 뛰어넘어서 문화를 가진 존재로 성장하는 휴먼 스킬(human skill), 앞으로는 인간의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될 거예요.

미래사회에 필요한 교육

참 안타까운 게, 오늘날 교육은 국영수 위주의 인지 교육에 지나치게 치중해 있어요. 지금처럼 인간의 다양한 능력을 억누르고 인지능력만 뽑아내 교육한다면 온전한 인간으로, 인간의 방식을 갖춘 인간으로 자라는 데 큰 문제가 생겨요. 게다가 이미 인지 교육의 시대가 저물고 공부하는 기계, 인공지능이 등장했어요. 인간의 지능은 종류가 다양해서 아직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 합의된 결론이 없어요. 사회성도 일종의 '지능'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지능'이라고 하면 아이큐(IQ)만 떠올리잖아요. 인지능력은 인간의 뇌가 수행하는 여러 미션 중 일부분일 뿐이에요.

인지 교육에 매달리는 건,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 거예요.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인지능력 중심의 작업들을 대신 수행하게 될 거예요. 4차 산업혁명을 봤을 때 지금 매달리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으로 바뀌게 되는 거죠. 여전히 부모들은 국영수 과목에 매달리고, 대학시험 볼 때도 그것 위주로 보고 있지만 기업은 좀 달라졌어요. 그것만 가지고 사람을 뽑았더니, 잘 안 돌아가는 걸 경험한 거예요. 기업이 가장 먼저 시대의 변화를 읽어낸 거죠. 교육계는 가장 늦게 쫓아가요, 항상.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키워내겠다'는 건 교육이 아니에요. 그건 권력자의 논리예요. 권력자는 그동안 학교를 자신에게 필요한 무엇을 생산하는 수단으로 생각했어요. 인공지능 시대가 되면 누가 가장 이득을 볼까요? 자본가들, 그중에서도 대기업들이죠. 기술이 지금보다 더 진보하게 되면, 그들이 과연 사람을 고용할까요? 사람 대신 기계 쓰면 월급, 휴가, 야근수당 안 줘도 되고 24시간 전기만 꽂으면 돼요. 그러면 당연히 자본가들은 기계를 더 쓰고 싶어 하겠죠. 온 세상이 기계 천지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방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인간들이 기계를 조종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지옥문이 열리는 거예요. '아이들을 미래에 필요한 '인재'로 키운다' 이 말은 굉장히 천박한 말이에요. 그게 아니라 미래를 열어갈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저는 학교야말로 희망의 근거라고 봐요. 가정의 교육 기능도 약화됐고, 마을공동체도 약화되었어요. 근데 공교롭게도 학교는 그 동네 애들이 다 모이는 곳이에요. 그리고 아이들을 매개로 부모가 연결될 수 있어요. 학교가 그런 기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학교는 아이들이 '수다 떨러 가는 곳'으로 바뀌면 됩니다. 아이들이 학교 가는 이유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예요. 아이들이 휴대폰 붙들고 문자질만 한다고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지금 친구랑 수다 떠는 거예요. 저는 아이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해요. 종일 책상에만 앉아 있어야 하니까, 학교가 끝나고 학원에 가는 틈틈이 휴대폰으로 수다를 떨죠. 눈물겹도록 지혜로운 학생들이에요.

다만, 마음의 재료가 빈약하다는 점은 안타까워요. 마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에요. 기억이 시간과 함께 머물렀을 때 둘의 합작품이 바로 마음이에요. 내가 직접 몸으로 경험한 것으로 다른 존재와 마음을 나누면, 그게 기억이죠. 책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들에게 책을 권하는 이유는 책 속에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앞으로 '마음'이 가장 소중한 것이 될 거예요. 다시 말하지만 사람들이 어떤 기억을 가지게 되느냐에 따라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를 천국으로 만들 수도 있고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미래사회, 지속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마음'을 잘 간직한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감시'하지 말고 '응시'하라

인간에게 언어가 있기 전에는 몸짓, 손짓으로 소통을 했어요. 그전에는 뭐가 있었을까요? 눈빛과 표정이 언어였어요. 눈빛과 표정은 가장 오래된 소통의 도구예요. 인간의 이야기 중 가장 강력한 형태는 '응시'죠. 부모가 아이를 지그시 바라보면 아이의 뇌가 작동해요. 우리는 말로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분석해보면, 말로 전달되는 의사는 7퍼센트 정도밖에 안 됩니다. 10분의 1도 안 되는 거죠. 어조나 억양은 38퍼센트고, 자세·손짓·몸짓·표정·눈빛 같은 나머지 55퍼센트의 비언어적 요소가 가장 많은 '이야기'를 전해요.

사실 유념할 것은 '이야기하기'가 아니라 '잘 듣기'입니다. 커뮤니케이션 잘하는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잘 듣는 사람이에요. 잘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상대가 말을 잘하게 돼요. 그게 아주 좋은, 진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에요. 잘 듣는 사람의 특징은 주장이 아니라 질문을 아주 잘한다는 거죠. 이게 과학자들의 분석일 뿐인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매일 이렇게 비언어적인 요소로 서로 소통하며 살아요. 결혼한 분이라면 차마 떠올리고 싶진 않겠지만(웃음), 지금 살고 있는 그분과의 첫 만남을 떠올려보세요. 최초의 순간, 아마 눈빛을 주고받았을 거예요.

그래서 '바라보면' 정보보다는 마음이 건너갑니다. 그러면서 삶이 바뀌는 거죠. 그게 쉽지는 않아요. 우리는 사실 응시보다 다른 것을 더 잘합니다. 감시, 지시요. 대체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쓰는 말을 보면 지시와 명령이 많아요. 유격 훈련할 때 조교가 병사들에게 하는 말 같죠. "앉아. 앉으라고! 하지 말랬지! 셋 센다. 하나! 둘!" 그리고 부모들은 '주시'도 잘해요. '너, 내가 다 보고 있어!' 하는 눈빛 말이에요. 부모들은 대부분 자기가 아이를 응시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이 입장에선 그게 아닐 수 있어요.

사실은 '아, 누군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응시는 인간의 뇌를 잘 자라게 해요. 여러분은 '부모님' 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세요? 저는 아버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어요. 근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어요. 평소 무뚝뚝하고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지 않던 분이셨는데, 제가 군에 입대할 때 한참 가다가 돌아보니까 멀어질 때까지 제 뒷모습을 지그시 보고 계시는 거예요.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그런 장면들이 쌓이면 아이에게는 엄마와 아빠가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아이가 클수록 '눈을 맞추는 게' 잘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의미를 더 보탰어요. 지그시 바라보되 '한발 물러서라'고요.

예전에 어른들은 '자식 농사'라는 말을 썼잖아요? 농사는 농부가 다 하는 게 아니에요. 농부의 손길도 중요하지만, 전체를 보면 그건 정말 일부분이라는 걸 알게 돼요. 아이도 그래요. 그래서 자식 농사라는 표현은 정말 기막힌 과학적 통찰이에요. 내가 어떻게 키우고 싶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키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이가 인간이 되는 것은 부모 말고 다른 수많은 작용이 연결되어 이뤄지는 거예요. 그게 자식 농사의 진짜 뜻이에요. 그러니 부모가 자식의 삶을 디자인하겠다는 건 잘못된 거예요. '커서 의사가 되라. 선생님이 되라'라고 하는 건 농부가 과도하게 개입하는 거죠. 그런 개입은 애들을 망쳐요.

근대 교육의 핵심적인 논쟁은 본능과 양육이었어요. 그동안 우리는 양육과 교육을 본능보다 훨씬 강요해왔죠. 끊임없이 아이의 삶에 개입해 단점을 찾고 교정해주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아이들은 유전자의 영향을 따라 생물학적 시간표에 의해 본능적으로 스스로 인간이 되려고 하는 속성을 이미 가지고 있어요. 아이를 그냥 믿어주면 되는 거예요. 좀 과격하게 표현하면, '내버려 두라'는 얘기죠. 오늘날은 인지 교육이 중심이 되면서 양육과 교육이 본능을 완전히 압도해버렸어요.

1990년대 이후 뇌과학이 크게 진전되면서 우리가 인간의 뇌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은 '인간에게도 본성이 있다'는 겁니다. 전에는 없다고 믿었거든요. 그 잘못된 믿음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요. 대표적으로 '사당오락'을 예로 들 수 있어요.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나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하루에 잠을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죠. 그런데 날마다 4시간만 자면 죽어요.(웃음) 졸리면 자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잠 많이 자는 걸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게으르다고 생각하고. 그건 우리가 아니라 자본가들의 논리예요. 개인의 수면 시간을 노동 시간으로 바꿔서 빼앗아간 거예요. '미래에 필요한 인재'를 키우려다 보니, 교육에도 자본가의 논리가 적용되는 거예요. 성장기 아이들은 반드시 8시간씩 자야 돼요. 밤에 제대로 못 자니까 낮에도 계속 조는 거예요. 자는 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의 문제니까요.

뇌를 들여다볼수록, 인간의 뇌에는 본능이 지배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릴 때는 유전자가 훨씬 우세한 시기예요. 그래서 저마다 정해진 '생물학적 시간표'가 있다는 말을 쓰는 거예요. 자식 농사와 작물 농사는 한발 물러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이치와 정확히 맞아떨어지지요.

엮이며 풍성해지는 '언어의 풍경'

외국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한국말이 뭘까요? '24시 할머니 뼈다귀 해장국'이에요.(웃음) 실제로, 몇 년 전에 조사한 겁니다. 인천공항부터 넓은 도로, 높은 빌딩 이런 거 보고 감탄하던 외국인들이 시내 뒷골목에서 이런 간판을 보고 기겁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같은 간판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글자만 봐도 침이 꼴깍 넘어가고, 소주도 한잔 생각나죠. 내가 몸으로 경험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와요.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식을 알 수 있어요. 인지 교육을 해장국에 빗대어보면, "받아쓰기 하자. '해장국' 써봐. 야, 너는 2학년씩이나 됐는데 아직도 '해' 를 '헤'로 쓰니?" 이렇게 다그치다가 읽고 쓸 줄 알면, 해장국에 대한 심화학습을 시작해요. "'전주 콩나물 해장국'과 '양평 해장국'의 차이가 뭐지?" 어떤 애가 손을 들어요. "콩나물 해장국에는 선지가 안 들어갑니다." 이게 인지 교육인 거예요. 중학교 가면 해장국의 레시피를 달달 외우게 하고, '다음 중 양평 해장국에 들어가는 재료가 아닌 것은?' 하는 문제를 시험에 내면서 교육이라고 해요. 이건 다 껍데기에요. 진짜 해장국을 가르치려면, 가서 먹어보게 하면 됩니다. 같은 간판을 보고 한국인은 군침을 삼키고, 외국인은 소름 끼쳐 하고,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가지고 있는 기억, 시간,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죠. 몸으로 경험한 기억들이 마음을 만들어요. 이런 현상을 각자의 '언어의 풍경'이 달라서 그렇다고 말해요.

제가 '물'이라는 글자를 써볼게요. 여러분이 물과 관련된 시간과 같이 맞물려 있는 기억, 직접 몸으로 기억하는 것들을 떠올려 보세요. 그게 물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는 '언어의 풍경'이에요. 어떤 사람은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겠죠. 어떤 사람은 할아버지와 약수터에 갔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리움과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고요. 이 모든 것들이 언어의 풍경이에요. 이것이 한 인간의 모든 것이죠.

그런 면에서 책은 아이에게 위험한 물건이에요. 아이들이 우선시해야 하는 건, 언어의 풍경을 풍성하게 만드는 거예요. 인간이 이루어낸 문화의 핵심도 바로 언어의 풍경입니다. 예술은 철저하게 이것에 의존해요. 똑같은 작품을 두고 이를 정보로 대했을 때는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암기하게 됩니다. 근데 잘 떠올려 보세요. 학창시절에 시험 보기 위해서 밤새 외우고,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메모한 것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참 신기한 일이죠. 온 나라의 수십만 수험생들이 별의별 선행학습을 하고, 돈을 쏟아부으면서 공부했던 게 어째서 10년도 못 갈까요? 마음과 상관없이 기계가 데이터 처리하듯 한 거예요.

우리는 학창시절 시험 보는 것에 길들어서 모든 텍스트를 지식과 정보로 인식하는데, 익숙해요. 하지만 이건 앞으로 기계가 인간보다 더 빠르게,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러니 텍스트를 인간답게 읽으려면 마음으로 읽어야 해요. '이 작가는 왜 이런 책을 쓰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마음을 주고받는 게 빠지면 그저 데이터에 불과해요. 마음을 주고받는 '읽기'는 단순히 문학작품에 국한되지 않아요. 흔히 학술 논문도 정보만 담고 있는 것 같지만, 논문을 쓴 사람의 마음마저 고스란히 녹아 있거든요. 저는 취미로 논문을 읽어요. 학자들이 아닌 듯 슬쩍 드러낸 마음을 읽는 게 얼마나 고소하고 재밌는지 몰라요. 법조문도 한번 읽어보세요. 그 안에 담긴 마음까지 같이 읽으면, 각종 사건에 대한 판결문이 얼마나 재밌는데요.

몸으로 경험하는 언어의 풍경이 한 인간의 모든 것이고, 그게 마음을 만드는 재료가 됩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이야기'라는 방식으로 다른 존재와 서로 나누는 거죠. 이게 인간이 가진 소통 방식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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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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