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관기] 트럼프 취임식, 힐러리 등장하자 지지자 적개심 분출

[기고] 공화당 후보 유세장 같았던 미국 대통령 취임식

미국에 머무는 동안 대통령 선거가 있어, 새로운 대통령 취임식도 직접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도널드 트럼프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 취임식이 열린 1월 20일은 흐린 날씨에 간간이 비가 내렸다. 삼엄한 경비속에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고 들어간 취임식 장에는 백인들이 절대다수였다. 가뭄에 콩 나듯 소수 인종들이 보이긴 했지만, 이 날의 취임식은 트럼프가 선거 기간 내내 즐겨썼던 선거 구호(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make America great again)가 적힌 빨간 모자를 쓴 백인들의 행사였다. 이들에게 기념 모자, 티셔츠를 파는 것은 대부분 흑인이었는데 행사에 참석한 흑인보다 더 많아보였다.

그래도 참석한 사람들은 저마다 밝은 표정이었고, 대부분 트럼프를 찍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기뻐하는 분위기였다. 본행사 전 군악대와 합창단의 연주가 있었는데 모두들 음악을 즐기며 동행한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이런 평온하고 흐뭇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본 행사 직전 주요 인사들이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로 단상에 등장했는데 이들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반응이 극명하게 엇갈렸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자신들의 지지 인사들에게는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지만,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등 민주당 소속의 의회 지도자들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등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했던 인사들에 대해서는 야유와 조롱이 쏟아졌다.

▲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필자 ⓒ권오재
특히, 전직 대통령 부부 자격으로 힐러리 클린턴이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등장할 때는 위협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거침없는 욕설과 적개심 가득한 야유가 쏟아졌다. 힐러리 클린턴이 가끔 대형 중계 화면에 잡힐 때도 이런 반응은 반복됐다. 새 대통령의 취임식에서는 승리한 쪽이 겉으로라도 화합과 아량을 베푸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텐데도 그런 모습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승리를 만끽하려는듯 보였다. 콜로세움의 군중과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와중에도 흥미로웠던 것은 오바마 전 대통령과 부인인 미셸에 대해서는 야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인 척 슈머 의원이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취임 선서 이전에 짧은 연설을 할때 군중들의 야유는 절정에 달했다. 척 슈머 의원은 트럼프의 인종주의적 태도, 장애인 비하, 이민자 배척에 대해 일침을 가하려는듯 점잖은 태도 속에서도 "미국이 자랑스러운 것은 오직 미국인들 때문이다. (미국인은 백인만이 아니라)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이민자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이다. 모든 미국인은 법 앞에 평등하고,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완벽히 하나된 미국"이라고 역설했다.

이 때 군중들은 듣기 싫다는듯 "트럼프"와 "USA"를 연호했다. 이들이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지난 8년에 작별인사를 하듯 "굿바이(Good bye)"를 외치기도 했다. 이러한 소란 속에서도 척 슈머 의원은 꿋꿋하게 연설을 마쳤는데 연설중간 트럼프의 떨떠름한 표정과 조용히 박수를 치는 오바마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이날의 취임식은 미합중국 대통령의 취임식이라기보다는 공화당원, 특히 백인 공화당원들이 되찾은 정권과 자존심을 자축하는 행사에 가까웠고 비난과 조롱이 가득했던 공화당 후보 트럼프의 유세장과 더 가까워 보였다. 그렇게 미국의 분열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취임식 참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영상을 다시보니 현장속의 이런 분위기가 제대로 담겨있지 않고, 단상의 절제되고 질서있는 모습만이 전해지고 있었다. 트럼프에 대한 환호와 힐러리에 대한 적개심이 거침없이 개봉된 현장의 느낌은 안방까지는 전달되지 않은듯 했다.

이런 분위기는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선서와 연설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백인 공화당원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눈앞에서 확인하는 것에 환호했다. 다시 시작된, 비와 함께 진행된 취임연설 초반 그는 "하나의 미국"을 이야기했으나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트럼프는 선거유세 연설에서 조금도 진전되지 않은 연설을 되풀이 했다. "미국이 최우선이다. 미국인들의 이익이 우선이다.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되찾고, 번영을 만들것이다"라고 외쳤다. 15분 정도 길이인 연설의 마지막을 그는 선거 유세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을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미국을 더 살기좋게 만들 것이다. 미국을 더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마무리했다. 군중들은 트럼프의 마지막 말을 함께 따라 외치며 환호하고, "트럼프"를 연호했다.

그러나 취임식 참석자의 인종구성과 참석자들의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야유속에서 트럼프가 선거내내 강조해온 '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은 'MAKE WHITE AMERICA AGAIN(백인들의 미국을 만들자)'으로 들리기에 충분했다.

이렇듯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은 백인과 공화당원들이 패배한 상대를 야유하고 조롱하면서까지 승리를 만끽한 세리머니였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의 미국이 자신들이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위대함과 자존심 그리고 권위를 되찾고 유지할 수 있을지는 물음표가 남았다.

▲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초청장 및 입장권 ⓒ권오재

▲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풍경 ⓒ권오재
▲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풍경 ⓒ권오재

4년전 오바마의 취임식에 200만 가까이 운집했던 다양한 인종들의 열기와 흥분이 사라진 자리에 똘똘 뭉쳐 "내가 미국의 주인"이라고 과시하는 백인 공화당원들이 운집한 취임식을 보면서 대의 민주주의 제도에서 말하는 민의는 모든 국민의 뜻이 아니라 선거에 참여한 사람들의 뜻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주권은 모든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투표하는 자에게만 있는것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해봤다. 또한 상실감과 증오를 조직해 투표장으로 끌어내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응 했다.

경제와 정치와 문화가 서로 깊은 영향을 끼치며 상호 의존과 개방, 협력을 피할수 없는 이미 오래된 세계화의 시대임에도 나만 잘먹고 잘 살겠다는 선언은 험난한 미래에 대한 예고로 들렸다. 그 앞에 평화, 환경, 인권, 국제관계에 대한 책임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수사에 그칠것인, 폭주로 현실화 될것인지, 미국 의회는 과연 트럼프 행정부와 어떤 관계를 추구할 것인지는 주목할 점일 것이다.

트럼프는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군중들의 자신에 대한 환호와 상대에 대한 야유를 즐기는듯 보였지만, 두려워하는듯 하기도 했다. 그는 이들에 의해 승리자가 되었지만 이들의 증오와 분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몫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는것일까.

미국 국가 독창까지 한 시간이 걸리지 않은 취임식이 끝나고 의사당 근처 한국식 비빔밥 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나온 길거리 상점의 TV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퍼레이드가 예정된 도로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해 100명 가까이 연행되었다는 실시간 뉴스가 전해지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미국 대통령 취임식 구경이 이렇게 지나가다니. 나는 트럼프의 유세장에 서있었던것 같은 시간이 못내 실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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