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한광호 열사에게

[문학의 현장] 우리의 양식

거기까지는 가지 못한다
두 번 밟을 수 없는 길이다
숯불을 디디는 맨발로도
열 동이의 눈물로도
백 권의 책으로도

겨우 그대를 잊지 않고 지내는 나날들
부끄러움은 우리의 새 거주지가 되었다
들을 귀 없는 자들과
볼 눈 없는 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산성을 켜켜이 높인 채
침묵하다 그 뒤에서
부끄러움도 없이 수군거린다

죽임이죽음을부르고 죽임이삭발을부르고 죽임이단식을부른다
죽임이구호를 죽임이깃발을 죽임이물가에둘러핀수선화처럼연대를부른다

약한 것 같으나 강하고
지는 것 같으나 끝까지 이기고야 말

그대가 우리의 준엄한 양식樣式이다
부끄러움이 이 시대의 고결한 양식糧食이다

ⓒ김미성

시작노트

전 정권이나 현 정권은 바리케이드를 물리적으로 애용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건전한 시민의식이 싹틀 여지를 잘라내고 좌우로 분열시켜 국민을 정권의 바리케이드로 삼기까지 했다. 재벌기업은 이에 편승했다. 이들은 노동자를 집요하게 벼랑으로 내몰아 이 사회에 영구적인 절대악이라도 구축하려는 걸까.

한 노동자가 죽었다.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스스로 죽었다. 죽을 수밖에 살 길이 없어서 죽었다. 명백한 사회적 죽음이다. 죽음에 대한 한 사회의 태도는 그 사회의 질적 수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들 정권은 불가촉천민에 근접해 있다.

어느 시인은 “어떤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고 했다. 무엇으로도 그 죽음에 동참할 수 없어서 부끄러운 사람들은 부끄러움이라는 새 거주지의 주민이 된다. 한 죽음을 나누어 마시며 연대하는 현장에는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이원적 가치가 대립한다. 현대 본사의 위용과 한광호 열사 농성장의 그 초라한 텐트, 저녁을 먹고 야근을 하러 다시 건물로 들어가는 직원들과 머리에 띠를 두르고 이열 종대로 인도 일부를 점하고 앉은 스물 남짓의 비정규직 시위대열, 양재역 부근을 지나는 퇴근 차량들의 무심한 헤드라이트 속에서 시위대는 매일 이 사회에 고결한 양식(糧食)을 대고 스스로 준엄한 양식(樣式)이 됨으로써 죽음에 동참하고 죽임에 항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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