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귀농, 물질과 정신 모두 정착하다

[귀농통문]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자립

2000년 벽두에 헬렌 니어링의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이석태 옮김, 보리 펴냄)를 읽었다. 새 천 년에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그때 내 삶은 마지못해 '버티고' 있는 형국이었다. 결혼하고 차를 사고 집도 사고 아이들도 남부럽지 않게 키우자는 목표에 집착했다. 낙오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버티고 있었다. 그만큼 공허해지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주말이면 나만을 위한 시간도 보냈다. 외적인 성공과 내적인 행복을 동시에 쫓았다. 두 바퀴가 따로 도는 자전거 같았다.

니어링 부부의 삶은 나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더 이상 성공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았다. 내면의 욕구와 꿈대로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면 그뿐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아등바등 더 가지고 이루고 앞서려고 애쓸 이유가 사라졌다. 갓 서른을 넘긴 나는 어떤 두려움도, 일말의 불안감도 느끼지 못하는 일종의 '러너스 하이'와 같은 삶의 황홀경을 깨달았다. 책을 덮고 첫 발걸음은 부산 귀농학교로 향했다.

▲ 이름처럼 마음은 늘 봄날이다. 딱 봐도 행복해보이지요? ⓒ이춘일

첫 귀농, 꿈에서 현실로 내려오다

귀농학교 수료 후 2년 동안 부산귀농학교 활동가로 일했다. 온전히 몰입하고 신명 나는 시절이었다. 강사들의 다양한 이야기와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사고가 풍부해지고 깊어졌다. 무엇보다 마음을 열고 만나는 뒷풀이가 묘한 마력으로 나를 조직 일에 끌어들였다. 그사이 결혼하고 첫 아이를 갖게 된 우리 부부는 투병 중인 어머니를 모시고 자연농을 하시는 한원식 선생님의 울타리 안으로 귀농했다. 2004년 봄부터 우리끼리는 '밥상 농사'라 부르는 자연농의 삶을 3년 동안 살았다.

빈집을 얻고 산소 벌초해주는 삯 대신으로 밭을 빌렸다. 먹을거리를 모두 자립적으로 해결했다. 한 달 생활비라야 20~30만 원 안팎이 들었다. 종자는 선생님께 얻었고, 땅을 갈지 않으니 농기계가 필요치 않고 똥오줌으로 거름 주니 돈이 들지 않았다. 돈이 안 드니 본전 생각이 나지 않았고 그저 내가 뿌린 대로 자연이 돌려주는 대로 거두어 먹었다. 대파가 떨어지면 쪽파로 대신하고 그마저 없으며 안 먹으면 그만이다. 자연농 700평에 수확물이 보잘것없지만, 생명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니 부족함을 느낄 수 없었다. 부족하기는커녕 생명의 활력을 누리며 살았다.

도시에 살 적에 한창 철인 삼종 경기에 빠졌고 아내는 명상을 즐겼다. 공허한 심리를 보상받기 위해서는 별도의 시간과 열정과 비용을 써야 했던 것이다. 허나 시골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씨 뿌리는 것이 명상이고 김매기가 운동이다. 삶이 바로 명상이 되고 운동이 되니 따로 보상이 필요 없는 충만한 생활이었다. 그렇게 순천에서의 삶은 평화로운 듯 보였다.

3년을 지내자 둘째가 태어나고 가진 돈도 바닥이 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과연 내가 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이곳 자연농의 울타리 안에서 농산물을 파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생명은 값을 매기고 사고팔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생명을 더불어 나누고 모시는 철학으로 일관해 오셨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로 돌아와 직장에 다녔는데, 내가 뿌리내릴 구석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8개월 만에 접고 시골로 향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가노라' 작심하고 철저히 농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시 귀농, 물질과 정신 모두 정착하다

전남 순천 시절이 세상과 단절된 나만의 여행이었다면, 경남 거창 생활은 세상과 소통하며 나를 바로 세우는 과정이었다. 소비자도 맞이하고 공공기관과 소통도 시작했다. 나름 성실 분투하는 모습이 통했는지 농어촌공사의 어떤 분은 여기저기 땅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많은 분들의 격려와 지원 덕분에 지금은 포도밭, 사과밭을 4000여 평을 일구고 있다.

땅 한 뙈기 살 돈 없이 시작해서 중농(?) 수준에 이르렀다. 혼자 힘으로 집 짓고 사과밭을 조성한 일이 꿈같다. 일이 겁나게 닥칠 때는 밤낮이 따로 없다. 달빛이 환할 때는 늦게까지 일하고 달빛이 사그라지는 시기에는 아예 초저녁에 잠들었다가 한밤중부터 일한다. 한밤중에 일할 때는 퇴비 뿌리기 같이 대충 눈짐작으로 하는 일을, 날이 밝아오면 꼼꼼한 작업을 한다. 보름달은 늦게 떠서 한밤 내내 비추고, 상현달은 초저녁부터 비추고, 그믐에는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어둡다는 것을 마흔에야 알았다.

▲ 손수 지은 집 앞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다. ⓒ이춘일

건축 일을 한 번 해본 적이 없지만 집 짓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지나가다 공사 현장을 마주치면 꼼꼼히 살펴보고 전후 과정을 짐작하고 계산해보았다. 이런 식으로 설비, 미장, 창호, 보일러, 타일, 전기, 용접할 것 없이 홀로 집을 지었다. 건축 재료의 70퍼센트는 매립장에서 주워온 중고이고 20퍼센트는 얻어오고 모아둔 것이다. 건축 신고 때에 공사비를 1000만 원이라 쓰는 게 부끄러워 500만 원을 보탰더니, 담당자가 "이런 것은 없고요. 세금 덜 내려고 그러시나 본데 3000만 원으로 해줄게요" 했다. 내 값어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어느 해에 우리 식구 생활비 전부가 걸려 있는 포도나무가 모두 죽어버렸다. 역설적으로 그때 비로소 내가 시골에 정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천 시절에는 '돈 떨어지니 어딜 가야 하나. 뭘 해서 애들 먹이나?' 막막했지만 이제는 집 있고 땅 있겠다, 여기서 발붙이고 살기만 하면 된다 싶었다. 그때부터 "저 이제 정착했어요!" 하고 다녔다.

돈이든 땅이든 일이든 어느 정도 경제적 기초를 가지지 않고는 내가 꿈꾸는 삶도 살 수가 없다. 순천 시절이 남긴 교훈이다. 돈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에너지다. 주변의 억대 농부를 보면 은근히 시샘이 난다. '나도 이참에 땅을 늘려봐?' 과욕은 금물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내가 꿈꾸던 삶이 무엇이었나' 하고 자문해 본다.

귀농 13년을 돌아보다

지금은 아이들 학교 일에도 적극 나서서 움직이고, 지역의 친환경단체 실무도 보면서, 한 살림생산자로서 여러 활동도 적극적으로 한다. 경상남도에 급식문제가 불거졌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고 어떤 요청도 없었지만 시민 단체를 자발적으로 찾아가 함께 움직였다. '거창 주민소환 운동본부' 공동 대표로 할 일을 다 했지만, 사실상 주민 소환의 시도는 강탈당하다시피 했다. 사회 문제와 세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그동안 만난 많은 스승과 선배들의 가르침 덕분이다. 그들 대부분은 평범한 농부이지만 누구보다 공익을 우선하고 홍익을 펼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농사와 공동체를 통해 보고 배운 것 자체가 이타적인 삶이다. 자기 것만 알고 자기만 생각하는 욕심을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라 배웠다. 정착하기까지 오직 나와 가족을 위해 밤낮을 잊고 달려왔으니, 이제는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위한 존재가 되고자 다짐해 본다.

나는 진정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사는가? 결론은 '아직은 아니다!'일 것이다. 니어링 부부처럼 하루 4시간만 일하지 않았고, 발가벗고 스키도 타보지 못했다. 한겨울 낮에 벽에 기대어 해바라기도 못해 보았고, 계획에 없는 여행을 훌쩍 떠나보지 못했다. 아직도 나는 니어링 부부의 삶을 꿈꾼다. 꿈을 향해 다가간다. 귀농 첫해처럼 매일매일이 꿈꾸는 삶이 되지는 않지만 하루하루 성장한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농부의 삶을 아이들 셋과 함께 간다. 우리에게 좀 더 완벽한 행복을 주는 삶은 농부의 길에 놓여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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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통문

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7년 10월 현재 83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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