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영상집단 움의 이영 감독은 10대 레즈비언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작 <OUT: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를 만든 지 8년 만인 2015년, <불온한 당신>을 통해 한국사회의 혐오세력들을 향해 정면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영화 속 혐오세력들의 모습은 논리가 없으니 우습다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생각하니 화가 나다가, 끝내는 공포와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힘겨웠지만 다 보고나니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난하고 괴로운 풍경을 마주하게 해 주어서. 만나보고 싶었다. 혐오를 받는 레즈비언 당사자로서, 절박한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이영 감독과 여성영상집단 움을. 그리고 들어보고 싶었다. 영화와 움의 이야기는 물론, 최근 벌어지고 있는 여성혐오와 성폭력에 맞선 여성들의 저항과 대응에 대한 움의 생각을.
여성영상집단 움의 역사와 현재
권은혜(이하 권) : 여성영상집단 움은 <거북이시스터즈>(2003), <이반검열>(2005), <우리들은 정의파다>(2006), <OUT: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2007), <오이오감>(2009), 최근 <불온한 당신>까지 비가시화된 존재들의 가시화에 초점을 둔 다큐멘터리의 제작과 미디어교육 등을 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움의 역사와 움을 거쳐 간 사람들의 이야기, 현재 움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영(이하 이): 2001년 처음 만들어졌다. 그때 이름은 ‘게릴라 여성영상집단 움’이었다.(웃음) 당시, 집단 이름 앞에 “여성”이 왜 붙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바리터’나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보임’같은 선배세대 여성주의 영상집단들이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 여성주의를 표방하며 나온 다큐멘터리나 영상제작단체는 움이 유일했다. 그래서 ‘여성’을 왜 붙이냐는 시선들이 많았던 것 같다.
처음에 영상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지금의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인터넷 방송국을 만들었는데 그때 초창기 멤버로 활동하면서부터였다. 당시가 신문이나 잡지 같은 페이퍼매체 중심에서 퍼블릭액세스나 인터넷방송과 같은 영상매체로 바뀌어가고 있는 시점이었고 시민단체나 사회운동 진영들에서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운동들의 동향에 대한 기사들을 만드는 대안미디어그룹에서 시민PD로 활동을 한 거였다. VJ 시스템으로 혼자 촬영, 편집, 내레이션까지 입히는 뉴스릴 작업을 했다. 거기서 여성주의 파트를 담당하고 있었던 조석순애라는 친구를 만났다.
활동을 하던 중 내부적으로 성폭력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그 즈음에 정리를 하고 나왔고, 그 친구는 대책위를 맡아서 성폭력예방교육에 관한 규약을 만들고 나왔다. 그러면서 그 친구와 움을 만들었다. 우리가 흔히 미디어에서 전형화된, 스테레오타입의 여성 재현을 자주 접하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 모니터링과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이미지, 서사, 재현을 우리가 직접 생산해보자는 뜻을 모아서 2001년 6월 움을 만들게 된 거였다.
권: 이혜란 감독님, 홍소인 PD님, 이영선 그래픽 디자이너 같은 다른 멤버들은 어떻게 같이하게 되었나?
이: 단체가 만들어지고 일 년 반에서 이 년 정도 흐른 뒤에 멤버가 다섯 명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계셨던 분 중에 여성주의운동을 하시다가 미디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결합하신 분이 있었다. 영상작업에는 어느 정도 전문성과 숙련도가 요구가 되는데 이 정도가 다르다보니 이견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고, 함께 활동을 지속하는 것이 힘들었다. 이후 조석순애씨와 디자인과 그래픽 등 미술 쪽 담당해주시는 이영선씨, 나 이렇게 셋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혜란 감독은 1996년부터 노동관련 다큐를 제작하고 있던 선배였다. 당시 이혜란 감독이 ‘노동자 영상 사업단 희망’ 활동을 하다가 그만 둔 상황이었고, 여성 노동 관련된 부분이 움에서 함께 논의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서 이혜란 감독을 영입하게 되었다. 사무실 이 자리에서(웃음). 작업은 2004년부터 같이 하게 되었고,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움에 합류하게 되었다. 홍소인 PD는 그전까지는 알고 있다가 2007년부터 미디어연구와 분석 관련 분야를 함께 하면서 작품에서는 제작역할을 하게 되었다.
권: 초반의 상황을 제외하고 지금의 멤버대로 10년 정도 지속하셨던 건데 지금까지 위기는 없었는지?
이: 잘 맞는다기보다는 잘 맞춰서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서로가 서로의 성향을 잘 안다. 나랑 이혜란 감독만 해도 다섯 살 차이가 난다. 나이나, 활동연차에 있어서 선배이지만 선배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혜란 감독은 ‘둘리’라는 별칭이 있어서 그렇게 부르고, 나한테는 ‘영’이라고 부르고. 물론 그렇다고 해도 어렵다. 작업 방식이나 태도에 있어서 존경심을 갖고 있고, 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많이 배려해주고. 언니가 좋아서.(웃음) 너그럽다. 하지만 많이 싸우기도 한다. 특히 작업할 때는(웃음).
차한비(이하 차): 단체생활 너무 어려운 것 같다.
이: 이혜란 감독과 나는 작업 성향이 많이 다르다. 이혜란 감독은 한 컷 붙이는 데 오래 걸리지만 붙이고 나면 그것 자체가 마스터이다. 하지만 나는 전체 구도가 먼저 서야하고 컷은 유동적으로, 빠르게 붙이는 스타일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성격과 작업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권: <OUT: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가 2007년이고 <불온한 당신>이 2015년이었는데, 그 사이동안 어떤 일을 하면서 보냈나. 영화작업 외에 움이 무슨 활동들을 하는지 궁금하다.
이: 예전부터 미디어교육을 해오고 있었다. 모든 미디어교육을 하는 것은 아니고, 여성주의 미디어교육을 주로 했다. 그걸 해온 이유는 여성주의 활동가, 여성주의 미디어를 바라보는 관점, 여성주의 미디어 활동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다른 곳에서 이미 많은 미디어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서는 미디액트, 퍼블릭액세스 등 굉장히 많은 곳에서 미디어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미디어에 대한 접근권을 좀 더 여성주의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 그 의미들을 찾는 것에 방점을 두고 교육을 해왔다. 이전에도 성소수자, 여성에 대한 미디어교육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는데,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요구도 많았다. 서울에 몰려있는 미디어교육의 자원을 지역에도 공유해줄 수 없느냐는 요구들. 2007, 2008, 2009년 3년 동안 지역의 여성주의 미디어교육 활동가를 양성하는 교육활동을 주로 했다. 서울, 전주, 대구, 제주, 수원에서 여성단체와 함께 활동했다. ‘움’과 같은 여성주의 미디어활동을 하고 싶다는 욕구들도 많았다. 그것에 대한 결과물로 <오이오감>(2009)이라는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고. 그때 지역여성미디어운동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그런 활동들을 2010년도까지 지속했다. 그러다보니 집중이 필요한 기획 작업이 나오기는 어려웠었다. 그런 후에는 성소수자의 역사에 관한 관련된 취재들을 전국적으로 해오고 있었다. <불온한 당신>의 기획은 2012년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전부터 꾸준히 바지씨, 레즈비언 선배님 세대에 대한 취재를 해오고 있었던 거다.
여성주의 미디어 기획단체로서의 움
양주연(이하 양): 미디액트에서 지역여성미디어센터 설립을 준비하기 위해 발간된 자료집을 발견했다. 그 참여단체에 움도 있었다.
이: 그때가 지역의 미디어센터들이 많이 설립되고 활성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미디어센터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들이 여러 단체들로부터 나왔다. 당시 움에서는 여성미디어센터가 필요하다는 제안을 하고, 어떻게 여성미디어센터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했다. 미디어센터라는 하드웨어가 이미 갖춰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 안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여성주의적으로 갖고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성미디어센터는 굳이 장비나 설비 같은 하드웨어 부분이 아니어도, 실제로 진행되는 교육 프로그램과 활동으로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여성주의 미디어 활동가 양성, 활동가들끼리 네트워크가 되는 것, 이 둘에 방점을 두고 활동을 해나갔다. 그런 교육들이 기반이 되어 여성주의 미디어운동 단위들이 생겨났다.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구에서는 여성주의 상영공동체 핀다가 만들어졌고, 그 단위에서 파생된 레즈비언 액티비즘이라는 단체가 있다. 제주에서는 제주여민회에서 제주여성미디어센터를 만들어서 기존에 진행되어 오던 제주여성영화제를 더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권: 활동을 해오면서 여성주의 미디어운동이 기존의 미디어운동과 다른 부분이 무엇인지 느꼈을 것 같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하드웨어적인 부분, 센터설립 같은 것 보다는 여성주의 미디어 활동가 양성이나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도 그러한 맥락 같은데?
이: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우선은 지역에 미디어센터가 건립되어야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지자체 등으로부터 미디어센터 건립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디어운동 내의 여성주의적인 어떤 역할이 필요한데, 거기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이냐의 고민이었다. 미디어에 대한 시민들의 접근권이 기본이고 이러한 상황에서 미디어센터의 운영 안에, 교육 안에, 미디어센터 활동가들의 인적구성들 안에 ‘어떻게 여성주의적 관점을 녹여낼 것인가’하는 것들이었다. 이것들의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역할을 하고 싶었다.
여성주의적 미디어교육의 경우, 일방적인 교육이라기보다는 상호간의 제안들 속에서 이루어졌다. 움에서 ‘여성영상치유방’이라는 것을 모델로 만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반검열 시리즈를 보면, 인물들이 카메라에 대고 이야기를 한다. 그것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들을 작게 만들고, 거기에 카메라를 놓고, 그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언제든지 그걸 꺼내볼 수 있고, 그걸 노출하고 싶은 사람은 노출하고 가지고 가고 싶은 사람은 가지고 가고. 영상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는 것을 시도해 본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역의 여성미디어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황조사부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욕구가 있는지를 조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고, 여성미디어센터 운영기획과정을 제안했다. 지역에 있는 미디어센터를 활용하는 것, 인적자원 자체를 센터로 보는 개념을 제안한 것이고, 그런 방식의 운영기획자 과정을 어떻게 꾸리면 좋겠다는 것을 제안했다. 여성미디어센터가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고, 지역별로 여성단체별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서 특성별 미디어센터,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권: 영화 제작 및 상영과는 다르지만 이러한 활동들을 하면서도 재미있고 뿌듯했을 것 같다.
이: 그렇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했다. 우리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는 활동가이지만, 각 단체별 주체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것으로부터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도록 멘토링하는 역할을 하면서 그걸 지켜보고, 수정해나가고. 새로운 여성주의 미디어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하고 피드백을 받는 것 까지, 이런 활동을 3년 동안 계속 실험한 거다.
권: 그런 활동들을 하면서 ‘여성 미디어운동은 어떤 거다, 어떤 걸 지향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이: 그때도 그랬는데 ‘여성 미디어운동이 무엇이다’라는 답은 없었다. 만약 대구 여성의 전화에서 여성주의 미디어의 방식을 고려한다고 하면, ‘여성영상치유방’ 형태가 맞는 거다. 피해자들의 경우엔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미디어가 해소해줄 수 있는 형태가 그런 것이다. 영상을 통해서 자기 서사를 충분히 표현하고, 영상이 가지고 있는 거리두기의 속성을 통해서 그것들을 보며 스스로 치유하고. 같은 경험을 가졌거나 안전한 공간 안에서는 그것들을 소통 할 수도 있고. 미디어가 가진 긍정성을 끌어올린 경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권: 단체나 지역의 특성에 맞는 방식을 고민하고 거기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여성주의 미디어운동을 생산해내는 방식이 여성주의 미디어운동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이: 그렇다. 정해져 있는 건 없다. 그 단체와 그 욕구에 맞게 만들어내야 한다. 당시 ‘수원여성의모임’이라는 단체의 경우에는 영화를 직접 제작해서 지역의 퍼블릭액세스에 내고 싶어 했고, 여성주의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럼 거기에 맞는 프로그램을 다시 만들어서 해야 한다.
중요한 건 여성들이 미디어를 통해서 스스로 임파워먼트(empowerment)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각자 집중하고 있는 특성 자체를 개성화하고 강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비슷비슷한 걸 하면서 제작 중심으로밖에는 할 수 없으니까. 서로 다른 사례들을 보면서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 것. 이러한 교육들을 진행한 후에 지역의 단체들이 주체가 되고 움은 일선에서 빠지는 방식으로 진행했는데, 우리가 빠지고 나서는 그 동력이 유지되기 벅찬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맞춤별 교육이다 보니, 그 단체, 그 지역에 가서 지내야하고 거기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때의 빚이 아직까지도 있다. 1년에 5개 지역을 하다보니까. 너무 열심히 했던 것 같다(웃음).
2001년도에 처음 움을 시작할 때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여성주의 미디어활동가 대회였다. 왜냐하면 없으니까(웃음). 여성주의 미디어 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이야기하면 어떤 느낌일까. 그 실현을 한 번 해본다, 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여기에 쏟았던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그때의 지역 단위들이 여성주의 활동을 해오던 단체들이라서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권: 지금도 소개해주고 싶은 여성미디어 단체가 있다면?
이: 많이들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이름들이 바뀌고, 내부에서 분화되어서 나온다던지 이런 역사들이 있다. 우선은 지금까지 가장 활발히 활동하면서 특성화되어 있는 단체는 대구의 레즈비언 액티비즘이다. 거기는 젊은 활동가들이 지금도 하고 있고, 오오극장과 연계하여 상영회도 진행하며 계속 활동하고 있다. 그 활동이 잠깐 중단되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기를 그리워하며 2년 전에 다시 결성된 케이스다.
강남역 10번 출구, 트위터 해시 태그
권: 강남역 10번 출구도 있었고, SNS를 통해서도 성폭력, 성희롱의 고발들이 연이어 나오고, 페미니즘에 대한 책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어느 때 보다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 요즘이다. 이런 상황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어떤 여성미디어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이: 미디어운동이라는 개념이 더 많이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무거운 기계로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누구나 활동가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플랫폼이 바뀌면서 미디어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시청방식도 바뀌었다. 브라운관보다는 휴대폰으로 보고. 페이스북 자체에 생방송 기능이 있지 않나. 이걸 통해서 바로 생중계 할 수 있고. 시대에 맞는 방식들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슈도 매우 빠르게 바뀌는 것 같다. 이러한 속도감에 맞는 미디어의 활용방식이 있어야하지 않나 싶다. 나는 아직 페이스북에 계정이 없는데(웃음),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이 많이 된다. ‘어떤 방식이 가장 좋을까?’, ‘근데 이미 우리 안에 다 있지 않나?’ 활용도, 접근에 대해서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 이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이 미디어를 잘못 활용했을 때 어떤 피해를 받는지까지. 나의 미디어가 어떠한 영향력 안에 있다, 라고 하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매체성이 완전히 달라진 거다.
트위터 같은 온라인 공간 안에서의 안정감과 여기서부터 촉발된 부분들이 있지 않나. 지금의 세대, 지금의 20대들이 생각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개념을 보아야 한다. 이들은 자신의 싸움의 터가 온라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생활 자체가 온라인 기반이기 때문에. 그래서 메갈을 이해하려면 플랫폼에 대한 이해가 같이 동반되어야 한다. 가끔 온라인을 보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생활방식이 구분되는 사람들은 메갈을 이해하기 힘들다. 왜 이렇게까지 그 안에서 열심히 싸우는지를. 이런 현상들을 봐도 매체에 대한 생각과 고민 자체가 다른 차원으로 왔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움에서 제안했던 방식이 유효한 면도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폐기된 지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차: 해시 태그 트위터가 나오면서 누군가는 트위터가 없어지지 않을 이유를 찾았다고 언급했다. 온라인에서 각개전투가 진행 중인 셈인데, 이런 것들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 고민된다. 미디어운동 하시는 분들은 특히 그럴 것 같다. 감독들과 이야기해보면 일단은 자신이 십수 년 간 사용했던 매체를 포기하는 일도 쉽지는 않고.
이: 그렇다.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자신이 익숙했던 틀, 패러다임을 바꿔야 가능했던 일이니까. 매체가 바뀌면 새로운 직군들이 만들어진다. 데이터 매니저, 미디어 매니저 같은 직군들도 생겨나고. 이 시스템에 대해 다 알아야만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거다. HD로 찍는데, 24프레임으로 안 찍고 29프레임으로 찍으면 나중에 상영을 못하는 거다. 전에는 방송에 퍼블릭액세스도 했기 때문에 방송과 무관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방송보다는 바로 자신의 SNS에 올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뉴스릴 자체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요새는 트위터 페미니스트라는 말도 있지 않나. 트위터에서 여성주의를 배웠다고.
권: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일들과 성소수자의 운동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나?
이: 강남역 10번 출구 집회를 주도했던 이들 중의 많은 수가 성소수자다. 어디든지 여성 퀴어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페미니즘과 성소수자운동이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넘나들며 함께 하고 있는 것이 한국 성소수자운동의 큰 흐름이다. 페미니즘이 성별의 차이에서 비롯된 차별에 반대하고 저항해온 역사이고, 성별뿐만 아니라 장애,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에서 오는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강남역 10번 출구가 여성혐오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분출된 상징적 사건이었다고 한다면, 성소수자들이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 폐기 사태에 대해 시청 점거농성을 하며 제정을 촉구했던 것은 성소수자운동의 가시화이다. 성소수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트위터를 통해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도 알렸다. 성소수자운동의 경우 국제적인 네트워크가 잘 되어 있어서 국제적인 사안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다.
<불온한 당신>(2015)과 앞으로의 움
권: <불온한 당신>을 보면, 혐오하는 세력들과의 대치가 이뤄지는 장면 등에서는 감독과 제작진의 분노와 같은 감정이 보인다. 하지만 최소한으로 활용된 내레이션, 다양한 사건들의 조합, 응시하는 것 같은 촬영이 주는 효과 때문인지 영화 전체로 봤을 때에는 2013~2015년 한국 사회의 단면을 풍경처럼 조망하고 기록한다는 느낌이 있다. <불온한 당신>의 카메라의 위치, 편집자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했던 건가?
이: 간단하게 보자면 <불온한 당신>은 혐오세력들의 공격과 성소수자들의 존재와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하지만 이 안에 여러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기도 하고, 한국에서 일본을 오가기도 하고, 광장과 개인의 삶을 오간다. 어떻게 보면 복잡한 층위를 갖고 있는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이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관객들과 같이 호흡하며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감독이 이 이야기들의 안내자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내가 들어간 부분들은 그러한 맥락이다. 레즈비언 감독의 관점에서 영화가 시작되고 관객들도 그러한 관점에서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혐오라는 말은 많이들 하지만 혐오가 어떠한 폭력인지를 체감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이것을 체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가 정보보다는 정서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있고, 많은 정서와 감정들이 폭발하고 있기 때문에 구조까지 복잡하게 가면 힘들어질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영화에서 감독이 안내자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인데, 이것이 판단자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객이 그 다양한 감정들의 결을 느낄 수 있도록, 관객들에게 여지를 더 많이 주고, 보고 싶은 방식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판단은 관객이 하도록 하고 싶었다.
권: 말씀해주신 것처럼 감독이 등장해 안내자의 역할을 하면서도 많은 부분 관객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는, 어찌 보면 상반되는 두 측면 모두가 잘 드러나는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고 실제로 고소하신 분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분들께는 이 영화가 어떻게 보이고 들릴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상영 후 그런 관객들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지. 그런 사람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 거라고 상상하셨는지.
이: 그런 상상까지는 안 해봤다. 하지만 알 수는 있었다. 취재를 할 당시에도 계속 방해하고 협박을 했고, 영화가 다 나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했다. 그 협박이 고스란히 이어져서 자신을 혐오주의자로 편집했다는 이유를 들며 형사고소를 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자기가 혐오주의자로 보였다는 거다. 고소를 한 사람은 동성애반대문제대책위원회 대표였고, 자기가 통과가 되면 다른 사람들까지 줄고소를 진행하려 했었던 것 같은데 무혐의가 났다. 민사소송은 하는 것이 복잡하니까 형사소송으로 했던 것 같고.
권: 이 질문을 한 이유는 혹시나 이 영화를 보고, 그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질 여지나 가능성은 없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며 한 것이었다.
이: 영화 상영 후 관객들의 반응 중에 ‘나 거기에 있었는데 이런 상황인 줄 몰랐다’라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퀴어 퍼레이드를 가더라도 그 안에 있는 것이지 일부러 바깥을 보게 되지는 않지 않나. 또 다른 반응으로는 ‘듣기만 했었는데 직접 보니까 정말 놀랍다’, ‘그 전에는 외면했었는데 이런 상황인지 몰랐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인 분들께서도 ‘부끄럽고 미안하다’, ‘광장에서 이런 험악한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는지 몰랐고, 경악했다’라는 말들을 해주셨다. 다시 한 번 문제의식을 느낀다는 말들도 해 주셨고.
권: 이묵 선배를 찾는 과정이 쉽지 않았었다고 들었다. 소문이나 신문기사를 통해 레즈비언 선배님이실 것 같다고 생각되는 분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신 것으로 아는데, 차기작 중 하나로 선배 레즈비언분들의 역사를 다루는 작업을 계획하고 계시다고 들었다. <레즈비언 정치도전기>, <퍼스트 댄스>, 레즈비언 이야기는 아니지만 <3XFTM>, <종로의 기적> 등 레즈비언과 성소수자들의 현재, 오늘을 담은 작품들은 있다. 하지만 먼저 산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은 없었다. 때문에 레즈비언의 역사, 구술사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전 작품이신 <이반검열> 시리즈를 두고 생각해보면 레즈비언의 생애사, 세대사를 구성하려는 시도인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작업을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고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이: 30대에 이반검열 시리즈를 만들면서 10대 레즈비언들을 처음 만났고, 그 친구들도 30대 레즈비언을 처음 봤다고 했다. 그때 그 친구들이 30대에도 레즈비언 하냐고, 어떻게 사는 거냐고 물어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도 레즈비언 선배들이 궁금해졌다. 실제로 그 부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먼저 산 레즈비언들의 구체적인 삶, 개개인의 이야기, 서사들이 발굴되어야만 하는 부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책임을 느끼기도 해서 작업을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찾은 그분들이 곧 돌아가시지 않을까, 그 이야기들이 그냥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스러움이 있었다. 그 이야기들이 전달되려면 세대 간 이해가 있어야 하고, 다리가 되어 줄 수 있는 세대가 필요하다. 그런 연결고리의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차원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소수자 역사 부재의 문제는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고 대만, 일본 등 아시아가 비슷한 상황이다. 내 부모세대에 대한 이야기, 더 어린 친구들에게는 조부모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발굴이 되어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한국에서 성소수자 역사를 보면, 성소수자가 한국에는 없었고 마치 외국, 서양으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불온한 당신>에서 이묵 선배님 부분은 계속해서 한국 땅에서 살고 있었던 바지씨의 존재와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드러남과 존재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성소수자에 대한 공격의 틀을 깨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묵 선배님의 삶은 전통과 계속 협상해왔던 결과이기도 하다. 부정적인 시선 속에서 70평생을 살아왔는데, 그 안에서도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으로 살기위해 사회와 협상을 해 오신 거다. 그러한 노력이 자신의 문화와 커뮤니티가 된 것이고. 그걸 증거라고, 증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재미있는 건 보수기독교에서 공격할 때 성소수자의 삶이 전통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데, 기독교도 전통적인 종교는 아니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한국에서 성소수자들의 삶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 싶다.
권: 국내의 성소수자들의 역사라는 점에서 보면 학술적인 측면도 있는 것 같다. 혹시 이 작업이 책으로 나올 수도 있는지?
이: 일단 영화로 생각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작업이 펼쳐진다고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심명진(이하 심): 왜 영화를 생각하고 있는지? 영화가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는 건가?
이: 먼저는 영화가 나의 도구라서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영화는 것이 사회 속의 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잘 보여줄 수 있는 매체, 장르라고 생각한다. 특히 다큐멘터리는 구술사를 기록하기에도 적합하고, 구어 외의 언어들, 몸짓이나 말, 표정들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한숨 한번만으로도 의미가 전달되고, 더 풍부하게 이해되지 않나.
권: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이: 공동체 상영들은 계속해서 진행 중에 있다. <불온한 당신>은 내년 3월 중에 개봉하는 것이 어떨까 고민하고 있다. 다른 영화들도 공동체 상영에 대한 요청들이 있어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온라인 상영공간들을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고민들도 함께하고 있다.
권: 앞으로의 ‘움’의 계획과 비전에 대해서도 들려달라.
이: 움을 시작할 때, 영화의 여성주의적 서사와 이미지 재현을 실험하고 시도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제작시스템에 대한 부분에도 적용된다. 움이 같이 먹고, 같이 살고, 돈 같이 벌어서 나눠 쓰고 그렇게 사는데, 이러한 여성주의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여성주의적인 영화 만들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의 제작에 있어서는 매번 새로운 영화, 매번 다른 영화, 매번 첫 영화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 마지막으로, 액트에 한마디 한다면?
이: 액트는 만들어진 지 오래된 매체다. 미디어운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매체이고 이러한 운동들을 제안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움도 그 큰 틀 안에서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다.
인터뷰는 11월 14일 늦가을 저녁, 상수동에 있는 움 작업실에서 진행되었다. 비디오테이프와 DVD, 오래된 자료집들과 다양한 여성주의 관련 책들, 다음 날 있을 상영회 준비로 사무실 한편에서 편집중인 이혜란 감독의 모습, 열린 창밖으로 보이는 벚나무 단풍. 학생회관 동아리방 같은 풍경이었다.
*이 글은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 저널 ACT! 101호(2016.12.23)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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