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집회 좀 가봤다는 이들이라면 알 만한 바로 그 깃발들. 재치 터지는 그 깃발들 몇몇이 10차 촛불 집회를 맞아 한자리에 모여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와 만두노총 새우만두노조가 31일 광화문 광장에서 공동 주최한 '아무깃발대잔치'는 이날 열린 송박영신(送朴迎新· 박근혜 대통령을 보내고 새해를 맞음) 사전 대회들 중에서도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왜 아니랴. 수십만 촛불 사이에서 '장수풍뎅이' 깃발을 목격한 많은 이들이 '어머 저건 찍어야 돼'라며 휴대폰 카메라를 들었다. 이후 속속 등장한 재치 폭발 깃발들에 너나없이 낄낄거리며 한 주간 받은 '박근혜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날렸다.
대체 저들은 어떤 자들인가. 매주 토요일을 광장에 반납하고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집회 참여를 독려하고 심지어 엔도르핀까지 분출케 해주는 저들은 대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아마도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공공노조는 지난 23일 '아무깃발대잔치'를 공지하고 발언과 공연 참가 신청을 온라인에서 받았다.
잔치 장소에는 혼자온사람들, 민주묘총, 한국 기름장어 바로알기 협회 뉴욕지회, 한국곰국학회, 무도 본방 사수위원회, 고혈당 천만 당뇨인의 희망, 주사맞기 캠페인운동본부 청와대 건강주사, 화분안죽이기실천시민연합, 전국고양이노동조합, 고려청자 애호가 모임, Hamnesty International(햄네스티), 공빵연(공공노조에서 빵에 갔다온 사람들의 모임) 등이 출몰했다.
행사장에서는 참가자들의 발언과 춤 공연 구경, 깃발을 만들게 된 취지 소개를 들을 수 있는 귀한 기회가 제공됐다.
'혼자온사람들' 깃발을 들고 온 이는 "혼자이면 어떻고 여럿이면 어떻냐"며 '혼집(혼자 집회)'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다른 깃발에 들어가거나 노동 조합에 가입할 생각은 없냐'는 사회자 질문에는 "저희가 혼자 온 사람들 조합을 만들게요!"라며 웃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 모임인 민주묘총 깃발의 주인공은 자신을 '공돌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장수풍뎅이 연구회 깃발을 보고 30분 만에 민주묘총 깃발을 만들었다"며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그 "공범들도 구속하자"고 외쳤다.
한국 기름장어 바로알기 협회 뉴욕지회 기수는 얼마 전까지 성과연봉제 반대 74일 파업을 벌였던 철도노조 조합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전라북도 익산에 세 살, 다섯 살 아이들을 남겨놓고 기차를 타고 온 그는 "기름 장어를 바로 알아야 나쁜 미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고 외쳐 참가자들의 공감 박수를 받았다.
무도 본방 사수위원회는 슬픈 모임이다. 매주 토요일 문화방송(MBC)의 무한도전 시청을 사수해야 하거늘,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 농단으로 '세상 즐거운' 주말 여가 활동마저 10주째 빼앗기고 있다. 깃발의 주인공은 "박 대통령이 퇴진하는 날에야 본방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해 이번엔 위로의 박수를 받았다.
고혈당 천만 당뇨인의 희망은 박근혜 대통령과 국정을 농단한 이들이 서민의 "고혈을 착취하는 모습을 보며 혈압이 많이 오른 환자들이 1000만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진짜 1000만 이상인지를 팩트(사실) 체크하려는 이들은 없기를 바란다. '아무말깃발대잔치' 행사 취지에 어긋난다.
화분 안죽이기 실천 시민연합 깃발의 주인공은 "살려야 할 화분이 있다면, 또 살리지 못한 화분이 있다면 모두 화실련"이라며 각종 동물 관련 깃발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빛냈다.
전국고양이노동조합 깃발을 든 이는 "참 집사가 되고 싶다"며 최순실 게이트 곳곳에서 등장하는 '집사'라는 단어를 불러냈고, 고려청자 애호가 모임 깃발 주인은 "고려청자를 보면 므흣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며 정말로 이 집회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열린 공간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민주노총 깃발을 패러디 해 화제를 모은 민주묘총 깃발 주인공은 깃발 제작 이유를 "고양이, 귀엽잖아요"라고 단숨에 소개했다.
주사맞기캠페인운동본부 청와대 건강주사 깃발 주인은 속상하다. 그는 "옳은 주사를 맞기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다"며 박 대통령 때문에 "필요에 의해 주사를 맞는 사람까지 오해를 받고 있다"고 답답해 했다. 전북 전주에서 매주 많은 교통비와 시간을 들여 도심 집회에 참가하는 그는 "나라 지킬 길이 이거뿐이라 오고 있다"고 했다.
엠네스티를 패러디 한 햄네스티 인터네셔널(Hamnesty International) 모임은 놀랍게도 엠네스티 회원들이 주축이라고 한다.
행사 중간 펼쳐진 공연 시간은 망원동에 모여서 아무 춤이나 추는 모임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퀴어댄스팀 양꼬치 유니온'의 민중가요 '비'와 엑소(EXO)의 '럭키원' '몬스터' 춤으로 채워졌다.
이들의 발랄한 깃발 대잔치는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광화문 촛불 집회 당시 벌어졌던 '깃발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깃발 내려"라는 성난 구호로 '운동권'이 아닌 순수한 시민임을 증명하려고 했던 당시의 시도가 2016년에 이르러서는 '내 나름의 깃발'을 만들어 촛불 속으로 파고드는 상황이 된 배경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당시의 '깃발 내려' 구호는 기실 3.1 운동 때부터 '선량한 사람들이 불순분자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사회 지배 세력의 선동이 긴 시간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사로잡은 결과였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진화하게 마련이다. 과거 민영화에 우호적이었던 시민들이 그 실상을 경험하고 난 뒤에 적극적 반대자가 되었듯이, 보수 정권의 부패와 타락을 목도한 시민은 조직이 있든 개인이든 분노했고 광장으로 나오고 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졌더라도 불의에 저항한다는 공통분모가 밑에서 든든히 받쳤기에 광장은 배타적일 필요도 이유도 없다. 특별히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강박도 불필요하다.
'아무깃발대잔치'가 보여준 2016년 촛불집회의 소통과 공감 에너지가 앞으로 어떻게 더 진화할지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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