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도시' 뉴욕, 서울은?

[건축신문] 도시, 걷다·① 진짜 '걷고 싶은 거리'는 상가가 늘어선 곳

도시를 만드는 사람 간 상호작용의 근본 요건

도시에서 걷기에 대한 논의가 '지금, 여기'의 상황에 현재성과 즉자성을 갖기 위해서는 서울의 '걷고 싶은 거리' 사업이야말로 유용한 텍스트다. 이는 도시에서의 걷기에 대한 의미의 자각 내지는 반성, 그리고 새로운 21세기적인 인식뿐만 아니라 그 인식의 한계를 동시에 포함하기 때문이다.

'걷기'란, 두 팔과 두 다리를 번갈아서 휘젓는 것으로 인간의 신체로 이동하는 행위이다. 가장 원초적이자, 근본적인 이동의 수단인 것이다. 걷기는 또한 운동 효과를 가지고 있어 이 때문에 매일 수많은 사람이 헬스클럽에서 러닝머신의 벨트를 돌리고 있다. 일본 교토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철학자의 길'을 보면,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과 운동을 넘어서 사색을 위한 물리적인 전희이기도 하다. 게다가 KBS <생로병사의 비밀> 등에서 다룬 '걷기의 기적'과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듯이 걷는 행위는 명상을 넘어 일종의 정신요법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걷는다'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이르면, 걷기는 만병통치를 넘어서 개인적 수양의 경지에 이른다.

▲ KBS <생로병사의 비밀> 중.

이처럼 걷기에 적합하고 보기에 쾌적한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겠다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도시에서의 걷기는 운동과 명상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의 복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걷기는 개인과 개인, 시민과 시민이 상호작용을 하는 근본적인 조건이다. 모두가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며 자동차라는 개인의 공간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불가능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도시를 만든다. 도시라는 거대한 유기체를 움직이는 혈액과도 같은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1998년 7월 서울시는 시의 가로(街路) 환경이 전반적으로 '보행불안, 보행불편, 보행불리' 등 '보행 3불(不)'의 도시라며 시민의 보행권과 삶의 질이 보장되는 보행 친화적 도시 만들기를 선언하면서 '걷고 싶은 거리' 사업을 추진했다. 시에서 직접 추진한 '걷고 싶은 거리'가 열 군데이고, 자치구별로 추진한 것도 상당수여서 서울시 전체로는 100여 군데의 '걷고 싶은 거리'가 생겨났다.

'걷고 싶은 거리'는 최초로 걷기의 의미를 일깨웠다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다. 자동차의 통과에 역점을 두었던 개발시대 자동차 중심의 도시 교통체계에 대한 반성과 도시 공간의 질에 대한 고민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서울시의 '보행 3불'의 불명예는 가시지 않고 있으며, '보행권 확보'라는 기본 취지도 사라지고, 보도 폭만 두세 배 늘려 인도에 불법주차 공간이 늘어나는 등 멀쩡한 거리가 더욱 걷기 어려워지는 역설적인 결과만 낳았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서울시가 추구하는 '걷고 싶은 거리'의 문제는 '걷기'라는 동작과 '싶은'이라는 욕망, 그리고 '거리'라는 공간적 배경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기본적인 당위의 차원에서 고안된 '걷고 싶은 거리'는 실천의 방식에서는 진부한 탈도시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면서도 공간적으로는 '도시(거리)'라는 상상의 공간을 동시에 추구한다. 따라서 도시라는 상상의 공간에 대한 실재의 응답은 나무가 우거지고 한적한 길인데, 여기에서 모순과 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말하자면, 도시에서의 걷기는 당위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뻔한 목표를 위한 실행단계에서의 오류 또는 부적절한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고 싶은 거리'는 도시에서의 걷기라는 당연하며 간단한 목표에 도달하기 어렵게 만드는 인식의 오류를 압축하고 있다. 이런 출발에서의 기본적인 오류를 살펴보자.

걷기를 어렵게 만드는 오류들

'걷고 싶은 거리'의 바탕에 깔린 오해 중 첫째는, 자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다. '걷고 싶은 거리'는 대게 나무와 화초가 있는 자연 공간으로 꾸미는 것이 대부분이다. 호젓한 산길을 산책하는 듯한 기분을 주는 길이라면 한두 번의 방문은 가능하겠지만, 구체적인 생활의 공간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는 도시에서의 걷기를 여가를 위한 보조적이며 2차적인 취미 활동 같은 특별한 활동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전거가 도시적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민망한 운동복을 입고 달리는 특별한 취미로 인식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때의 걷기는 헬스클럽의 러닝머신 위를 걷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목이 우거진 공원 같은 자연의 길이 도시의 시민을 걷게 하리라는 기대는 자동차가 보편화된 지난 100년의 경험을 통해 깨진 지 오래다. 미국의 교외(suburban)를 연구하는 도시학자인 제프 스펙은 그의 저서 <걸어다닐 수 있는 도시(Walkable City)>(박혜인 옮김, 마티 펴냄)에서 녹색은 잘못된 색이라고 지적한다. 즉, 도시 공간에서 걷게 하는 것은 자연적인 환경이 아닌 도시적인 거리라고 지적한다. 도시경제학자 에드워드 레이저는 '자연을 사랑한다면 그에게서 떨어지라', '걸을 수 있는 도시로 가라'고 단언한다. 도시에서의 이동 수단이 걷기라면, 전원에서의 이동 수단은 자동차이기 때문이다. 가장 녹색의 공간, 즉 친환경적인 공간은 도시이며 거리라는 것이다.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태양집열판을 만드는 등 별의별 녹색 기술을 동원해야 하지만, 자동차를 버리고 걷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 뉴욕 시민의 1인당 탄소배출량은 텍사스의 3분의 1인 것으로 조사됐다. 뉴욕은 전체 인구의 72%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걷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입체적인 보차(步車) 분리의 문제는 그 자체가 사람 중심이라기보다는 자동차의 통행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녹지와 보행자 전용도로가 쾌적하면, 시민을 걷게 만들고 도시에 활력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는 공허한 이상이었다는 사실이 모더니즘 도시와 건축의 교훈이었다. 20세기 후반부터 전통적인 거리, 골목의 기능과 환경적 역할에 주목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미국 뉴저지의 래드번과 브라질의 쿠리치바에서 중요한 참조의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래드번은 미국에서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1930년대에 계획되었다. 3000명 남짓의 인구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어서 하루 수십 대의 차도 지나다니지 않을 만큼 한산한 도로다. 하지만 보행과 자동차는 고가도로나 지하도로 철저하게 분리했다. 전체 단지를 순환도로로 두르고, 각 주택으로는 '쿨데삭'으로 끝나는 진입도로로 이어진다. 이른바 '슈퍼 블록'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신경증적인 보차 분리를 통해 아이들이 안전하고 공원과 같은 주거 환경을 만든다는 유토피아적 이상은, 래드번을 평범하고 지나치게 차분한 전형적인 미국의 교외 마을로 만들었다. 아이들이 자라나며 생기는 인구 변화는 공원과 놀이터를 텅 비게 했고, 보차 분리 때문에 고립된 단지는 오히려 자동차를 필수품으로 만드는 역설을 낳았다. 도시의 전통적인 거리라기보다는, 산책로가 이어진 주거단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인구 변화와 보차 분리는 공원과 놀이터를 텅 비게 했고, 보차 분리 때문에 고립된 단지는 오히려 자동차를 필수품으로 만드는 역설을 낳았다. 도시의 전통적인 거리라기보다는, 한산한 산책로로 이어진 주거단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편집자)

이에 반해 브라질 쿠리치바는 전혀 다른 시사점을 던져준다. 지하철 건설을 포기하고 버스, 걷기, 자전거를 통해 평면적 교통수단을 전면에 내세워 생태도시로의 정체성을 자리 잡았다. 이 도시를 우리나라에 소개한 지속가능도시연구센터 박용남 소장은 쿠리치바의 철학이 '사람의 이동은 평면적'이라는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즉, 보행 친화적 도시가 되려면 입체적 시설이 아니라 거리와 같은 높이에서 걸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전한 육교를 놔두고 무단횡단의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는 위아래로 번거롭게 오르내려야 하는 입체적 이동이 인간 행태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 '서울역고가공원' 조망도. ⓒ서울시

유기체로서의 도시 이해

'걷고 싶은 거리'의 두 가지 오류, 즉 녹지와 입체적 분리와 같은 인식이 극단으로 실현된 예가 청계천 복원이다. 청계천은 서울시의 '걷고 싶은 거리'의 이상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도심에서 자동차의 원활한 통행을 위해 만든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하천을 복원한다는 21세기적 당위를 실천하는 과정에서의 도시와 걷기에 대한 인식은 20세기에 머물러 있다. 움푹 파인 구덩이로 내려가서 걷게 되니 자동차의 침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보행로를 따라 걷다 보면 수초가 우거져 있기도 하고 작은 물고기를 만나기도 한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그러나 도시와 도시의 거리, 다른 시민과의 접촉은 난망(難望)한 철저하게 고립된 공원이 되고 말았다. 도시와 자동차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래드번의 아이디어가 인구 1000만 명의 대도시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서 다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년 완공예정으로 공사 중인 '서울역고가공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도심에 공원이 부족하다며 철거예정이었던 고가도로를 입체공원으로 만드는 사업이다. 그러나 이미 서울의 공원비율은 최상의 수준이며 다만 그 공원과 삶을 연결하는 길과 거리의 질과 유용함에 더 중요하다. 더구나 공중을 가르는 고가도로를 공원으로 바꾸는 일은 청계천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도시에서 시민을 걷게 할까. 도시에서 시민들이 자동차를 버리고 걷게 하기 위해서는 도시라는 현실이며 유기체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제프 스펙은 유용할 것, 안전할 것, 편안할 것, 그리고 흥미로울 것을 걷기를 위한 조건으로 꼽는다. 이 네 가지를 모두 만족하는 것은 자연의 길이라기보다, 상가가 늘어선 도시의 거리다. 상가는 수백 가지 이유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걷게 한다. 밤이면 불을 밝히는 보안등이 되기도 하고, 낮에는 거리를 청소하기도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지나는 곳에서 범죄가 일어날 리 없다. 제인 제이콥스가 말하는 이른바 '자연 감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거리는 도시의 결정체이며 도시를 대표한다. 도시는 인간의 지력과 이성으로 만들어낸 공간이며, 자연과는 다르지만 결코 저열하지 않은 인공의 공간이다. 자연이 순수의 상태로 남아있는 데 반해, 도시는 문화와 경제활동의 배경이며, 지난날의 역사를 담고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도시는 사람과 인공 공간, 즉 건축의 간격이 매우 밀접한 장소이며, 사람과 도시의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하는 장치가 바로 거리이다. 이런 거리에 자연이 무분별하게 침투되어서는 본래의 의미와 기능을 잃게 마련이다. 고립과 자연을 강조하는 '걷고 싶은 거리'는 도시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간다. 자연으로 둘러싸인 산책로가 아닌, 활기찬 도시적 거리를 만들어 낼 때 도시에서의 걷기는 비로소 완성된다.

* '쿨데삭(Cul de Sac)'은 주로 주택단지 내에 설계되는 도로의 한 유형으로, 단지 내 도로의 끝을 막다른 길로 두어 자동차가 회차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을 말한다. 필지를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유럽, 미국에서 주로 사용하며 주민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만들지만 네트워크를 단절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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