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혼돈 속으로'…렌치 총리 사임 발표

개헌 국민투표 부결, 경제 위기·난민 문제 복합 작용

의회 구조 개혁을 골자로 하는 이탈리아의 개헌 국민 투표가 부결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 투표에 정치 생명을 걸었던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부결을 사실상 인정하고 사임을 표명했다.

4일(현지 시각) 이탈리아 공영방송 RAI를 비롯해 이탈리아 방송국에서는 투표 마감인 오후 11시가 지나면서 일제히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개헌 반대가 54~59%로 집계돼 찬성 41~46%에 월등히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렌치 총리는 5일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기자회견을 열고 총리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국민 투표 반대 진영이 "놀라울 정도로 명백한" 승리를 거뒀다면서, "패배에 책임을 지겠다. 정부에서 나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라고 말했다.

이번 개헌에는 상‧하원에 동등한 권한을 부여한 현행 헌법을 개정해 하원의 권한을 대폭 늘리고 상원을 축소시키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양원제를 채택하는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이탈리아에서는 상원과 하원 양쪽에 모두 입법 거부권과 정부불신임권이 있어 입법이 지연되는 사례가 자주 발생했다.

이에 민주당 소속인 렌치 총리는 상원에서 입법 거부권과 정부 불신임권을 없애고 의원 수 역시 기존의 315명에서 100명으로 줄이는 헌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사실상 하원에 입법부의 힘을 실어주는 것과 동시에 정부의 권한을 강화시키겠다는 구상이었다.

렌치 총리는 세계 2차대전 이후 70여 년 동안 정부가 63차례나 바뀐 사실을 언급하며, 이탈리아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는 '정치 불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 개헌으로 안정적인 정치 체계를 확립, 2007년 이후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이탈리아 경제에 활력을 넣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실제 여론의 호응도 나쁘지 않았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개헌 찬성이 반대에 비해 두 배 많은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6월을 지나면서 여론의 흐름은 바뀌기 시작했고 결국 개헌은 큰 격차로 부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가 국민투표 출구조사 결과가 나온 이후 기자회견을 열고 사임을 표명했다. ⓒAP=연합뉴스

이탈리아 국민, 개헌 거부한 이유는

이번 투표를 두고 또 한 번의 '포퓰리즘'적인 선거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렌치 총리의 개헌안을 두고 극우 성향 및 포퓰리즘적인 색채를 띄고 있는 야당들이 기존 정치인에 대한 심판론을 꺼내 들며 개헌 반대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제1야당인 오성운동을 비롯한 야당은 렌치 총리가 자신의 정치 생명을 국민 투표와 연결지으면서 현 정부에 대한 심판으로 선거를 끌고 갔다. 개헌 내용에 대한 논의 보다는 더딘 경제 회복과 청년 실업, 난민 유입 등이 렌치 정부의 실정으로 꼽히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심판론이 선거의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실제 이탈리아 청년층의 높은 실업률은 야당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됐다. 렌치 총리는 자신의 재임 기간동안 40%가 넘어가던 청년 실업률이 39.2%로 내려갔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마이너스 1.9%에서 1%로 개선됐다고 밝히며 자신의 정책이 효과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여전히 청년 실업률이 40%를 육박하는 와중에 렌치 총리가 꺼낸 개헌 논의는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한 청년층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또 이 정도의 변화는 국민들이 '경기가 좋아졌다'고 느끼기에 다소 부족한 수치였다는 진단도 나온다.

난민 문제 역시 이번 투표가 부결된 이유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탈리아는 유럽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그리스와 함께 유럽에서 난민 문제가 가장 심각한 국가 중 하나다. 올해만 해도 17만 명이 넘는 난민이 이탈리아로 들어온 것으로 집계돼 종전 최고 기록인 2014년의 17만 명을 이미 넘어 섰다.

이에 극우 정당을 중심으로 렌치 총리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이탈리아의 극우 정당인 북부리그는 렌치 총리가 매년 25억 유로 (한화 약 3조 800억 원)를 쓰고 있다면서 이탈리아 국민들의 난민 혐오를 조장하기도 했다.

이밖에 민주주의 축소에 대한 거부감이 개헌 반대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였던 베니토 무솔리니 체제를 겪어 본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의회의 권력을 줄이고 정부의 권한을 늘리는 것은 곧 민주주의가 축소되는 것이라는 인상을 줬고, 이것이 개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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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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