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이 되고 있는 시민 혁명

[김민웅의 인문정신] 시민 혁명 의식의 탄생

초지일관의 국민

누군가는 "어떻게 30분마다 상황이 바뀌냐?"고 탄식한다. 박근혜의 한 마디에 좌충우돌하는 정치권의 동요에 대한 조롱과 비난이었다. 탄핵전선이 흔들리면서 민심의 분노는 야권에도 조준되었다. 국민들의 자세는 초지일관이다. 오직 박근혜의 퇴진과 새누리당 해체, 부역자 청산에 그 모든 초점이 모아진다. 애초에 탄핵은 이런 목표를 위한 보조 장치에 불과했다. 탄핵이 되던 안 되던 간에 시민혁명의 목표는 그와 상관없이 박근혜의 폐기처분과 그 부역집단의 정리다.

박근혜로 압축되는 구질서의 악폐를 총결산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미래로 진전할 수 없다는 신념은 이제 시민혁명의 사상이 되고 있다. 구질서 극복을 위해 개헌을 해야 한다는 세력은 이 "총결산의 매서운 과정"을 거치지 않는 방식을 선택하는 자들이다. 탄핵 후 즉시 개헌을 논의할 수 있다는 논리는 청산작업의 철저한 단계를 밟아나가면서 새로운 미래를 구상하는 국민적 논의를 배제하는 것일 뿐이다. 더군다나 그 논의는 기존 제도정치의 상층부에서 오가는 정략연대에 불과하고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시민혁명의 요구와는 그 어느 지점에서도 만나고 있지 못하다.

이들 기존 정치권세력이 제기하는 개헌 논의는 마치 박근혜의 제왕적 행태의 책임이 헌법에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헌법체계 아래 있던 김대중, 노무현 시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박근혜의 문제는 지금의 헌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헌법의 유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할 일은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정신의 복구와 이에 따른 범법자들에 대한 처벌이다. 탄핵은 그 처벌의 첫 단계라는 의미를 갖는다.

철저한 총결산의 과정을 거쳐야

구질서 앙시앙 레짐의 철폐를 거치면서 개헌논의가 제대로 되자면, 박근혜 정권의 적폐와 그 역사적 기원을 깨끗이 도려내는 총결산의 의지가 시민혁명을 통해 우선적으로 관철되어야 한다. 그 승리의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분출되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왕성한 논의가 우리 사회에 전면화되는 기반 위에 우리는 제대로 된 개헌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개헌논의는 기득권의 보존과 새로운 기득권 창출에 정치적 사활이 걸린 세력의 계략에 걸려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번 시민혁명의 현장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박근혜 세력과 정치권의 꼼수에 시민들이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만책의 정체에 대해 즉각 꿰뚫어 보고 그에 대한 대응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내놓는다. 정치 공학적 접근에 익숙한 세력과 역사적 과제에 대한 인식이 분명한 세력 간의 대결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꼼수의 난무에 대한 혐오가 이들을 퇴각시키기는커녕 도리어 분기탱천의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다. 박근혜와 부역세력들의 예상과는 달리, 촛불이 횃불이 되는 길이 뚫리고 있는 것이다. 시민혁명의 역량을 만만히 본 탓이다.

성실하게 수사에 임하겠다고 하고 수사를 거부하고, 탄핵의 대상이 되도 좋다고 해놓고 그걸 피하려 드는 식으로 거짓말을 반복하고 있는 박근혜에 대한 불신은 물론이고, 탄핵에 앞장서겠다면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정치인이 하루 만에 입장을 바꾼 것에 대한 민심의 평가는 이미 끝났다. 박근혜 권력에 대한 사망선고는 더 이상 뒤집을 수 없게 되었고 단지 시기와 방식만이 남은 것이다.

국민적 요구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 승복해야 할 명령

그런데 그 시기와 방식은 이후의 상황에 중대한 의미와 영향을 가지게 된다. 박근혜는 자신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국민적 요구를 제도 정치권의 협상대상으로 전환하려 했고, 그로써 국민적 요구가 여기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해버리려 한 것이다. 자신의 퇴진에 대한 주도권을 정략적 협상에 이골이 난 제도권에 넘김으로써 시민혁명의 공간을 소멸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혁명의 기세는 이에 대해 그대로 묵과하지 않았다.

박근혜 퇴진은 협상대상이 아니며 그 시기와 방식도 시민혁명의 요구 아래 놓여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제도 정치권이 이를 두고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민심의 분노는 높아졌고, 이에 놀란 일부 야권은 탄핵 발의 시기를 늦춘 결정을 번복하고 탄핵연대에 다시 합류했다. 압박해야 할 대상을 협상대상으로 설정한 오류의 수정이었다.

물론 비박 세력의 입장 선택은 탄핵포기이거나 아니면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에 있다. 하지만 이들이 탄핵 결정의 주도권을 가진 것처럼 되어버린 상황을 즐기는 태도는 즉각 시민혁명의 타격대상이 되어 새누리당 해체가 보다 강력한 구호가 되었다. 이들은 지금 시민혁명세력에게 포위되고 있는 중이다. 이대로 가면 정치적 폭파 대상이 되어 향후의 운명을 가늠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다. 탄핵 반대 정치인의 명단 공개와 이들에 대한 민심의 총공세는 그러한 맥락 속에 생겨난 당연한 결과이다.

분명한 점은 퇴진 시기는 즉각적이어야 하며, 방식은 국민의 명령에 승복하는 것 외에 없다. 더는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며 제도정치권의 방식에만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민혁명의 주체는 제도 정치권이 아니라 보통의 국민이다. 이들이 주역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박근혜와 정치권은 모두 시민혁명의 혁파대상이다. 시민혁명의 요구가 제도권에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고 이를 활용의 대상으로만 보는 세력 역시도 시민혁명의 적이다.

시민혁명의 인내, 그 끝

6차가 되는 시민혁명의 집결은 이제 그 인내의 마지막 단계에 처해 있다. 법이 보장하고 있는 시위대의 청와대 접근 거리 단계적 축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상징이 되고 있으며, 그 결정적 타격의 양태가 어떻게 나타나게 될 지에 대한 여러 가지 예상은 긴장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명예혁명이라는 표제어가 붙은 시민혁명의 전개과정이 과연 그렇게만 귀결이 될 것인지 아니면, 인내치의 한도를 넘어 권력거점에 대한 물리적 점거로 이어질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박근혜의 버티기와 이를 위한 기만책은 역설적으로 시민혁명의 의식을 높여주고 있다. 그 의지 또한 강력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우리 사회 모든 부문에서 박근혜에 대한 공세와 그 전략의 집단 지성적 융합은 이들의 대응전략에 중대한 제한을 가하고 있다. 어느 한 부문만 집중적으로 타격하면 되었던 상황에서 이제는 전방위적 방어체계를 가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아무리 공세적 반격으로 전환하려 해도 승패의 전선은 이미 기울었다.

4프로의 지지율, 그러니까 96프로의 국민에게 비토당하고 있는 권력이 이길 방법은 물리력 동원 외에는 남지 않았다. 이는 박근혜가 최근 경찰인사를 그대로 밀고 나간 배경이다. 그러나 과연 그대로 될까? 쉽게 지배되지 않는 시민으로 거듭난 국민들을 경찰봉으로 진압하는 순간, 즉시 파멸이다.

혁명의식의 탄생

김천의 어느 국밥집 할머니가 했다는 말, "이제 우리 국민은 어제의 국민이 아이다."라는 이 놀랍도록 적확한 표현은 시민혁명이 바꾸어놓은 사상의 역사적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어제의 국민에게 통했던 방식을 오늘의 국민에게 들이밀려는 습관이 되풀이 되는 한, 앙시앙 레짐의 수명은 더욱 빠르게 단축될 뿐이다.

이제 시민혁명은 단지 박근혜 퇴진과 부역세력 청산만을 요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불평등한 기존질서, 빈곤의 심화, 은폐된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 기본권의 박탈, 국가적 자존감의 훼손 등 지난 시기에 자행되었던 일체의 역사적 범죄에 대한 단죄와 극복으로 이동해나갈 것이다. 계급이 신분질서가 되고 권력이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며 정의의 수립이 비현실적인 요구가 되는 것을 더는 참지 못할 것이다.

혁명은 이 모든 것과 정면으로 대처하는 의식의 탄생이다. 사상의 성장이며, 역사의 주도권이 바뀌는 대전환이다. 시민혁명은 박근혜의 퇴진으로 촛불의 광화문 집결이 해제되는 날로 막을 내리지 않는다. 우리의 요구는 보다 진보할 것이며, 우리의 행동은 보다 강력해질 것이다. 시민혁명의 총결산은 앙시앙 레짐이 보장했던 신분제도의 철폐가 완료되기까지 끝나지 않는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향해 물밀듯 밀려들어가는 시민들의 장엄한 행렬을 목격하는 순간, 시민혁명은 자신의 역사적 소임을 다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첫 장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거센 바람이 불어 세상을 뒤집어야 한다.

촛불 속에 바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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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미국 진보사학의 메카인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동화독법>, <잡설>, <보이지 않는 식민지> 등 다수의 책을 쓰고 번역 했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국제·사회 이슈에 대한 연재를 꾸준히 진행해 온 프레시안 대표 필자 중 하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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