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의 최순실"과 박지원의 정치

[김민웅의 인문정신] 지금 야당이 할 일이 무엇인가

박지원, <열하일기>를 지은 그 연암 박지원은 물론 아니다. 박근혜 퇴진 국면에서 언론은 언제나 그의 입을 주목한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을 정치하는 그가 쏟아내는 발언은 가히 언론이 좋아할 어록생산의 달인이라는 느낌을 준다.

미르와 K스포츠재단이 대기업으로부터 8백억원 불법모금을 한 것을 두고 그는 "한국은행을 털어 좋은 일에 쓴다고 무죄 되나?"라고 받아쳤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대선 입문 논란과 관련해서는 "모든 게 반반이라 반 총장"이라고 슬쩍 꼬집었다. 국민의 당 지도부 안철수, 천정배 공동대표 사임 후 당을 추스르면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고 독려했다.

뉴욕한인회장 출신의 사업가였던 그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미국 망명시절에 맺은 인연 때문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대변인, 원내대표, 청와대 수석, 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그의 경력은 이제 70 중반에 이른 그의 나이와 함께 경륜이 기대되는 노련한 정치인의 위상을 기대하게 한다.

그렇지 않아도 박근혜의 변호인을 맡은 유병하에 대해서는 그의 지난 발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후 "최순실이 없어서 이런 사람을 추천했는가"라고 일갈했다. 최순실이 있었어도 유병하나 그와 다를 게 없는 인물을 선임했지 않나 싶긴 한데, 아무튼 최순실 없는 박근혜의 비정상 상태를 비꼰 것이리라.

박지원이라는 정치적 자산


제2야당인 국민의 당이 그 존재감을 이만큼이나마 부각시키는 것에는 박지원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의 정보력과 화려한 수사, 적절한 비유는 상대할 자가 별로 없을 듯하다. 박근혜와 여당을 상대로 여유와 예의 그리고 풍자능력까지 갖추었으니 저쪽으로서는 쉽지 않은 적수일게다.

더군다나 그가 한반도의 평화적 관계의 수립, 사드배치에 대한 반대 견해 등 일관된 태도를 지켜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달리 말해서 그는 지금 한국정치판에서 야권의 중심에 서 있는 의미 있는 자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면 오히려 미치지 못함과 같다던가? 그만한 경륜과 나이라면 이제 정치 지도자 반열에 오를 법도 하건만 아직 그는 그 정도에는 다다르지 못한 모양이다. 정치기술자라고 하면 심할까? 박지원은 박근혜와 긴급회담 제의를 했다가 야권공조 균열의 책임이 거론되면서 집중포화를 맞고 철회를 결정한 민주당 대표 추미애를 향해 "추미애의 최순실"이라는 말을 뱉었고,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그로서는 언론생리를 제대로 짚은 셈이다.

추미애의 실책은 분명하다. 여당인 새누리당의 기능마비로 박근혜의 오판 가능성에 따른 재앙을 막고 퇴진압박을 최종적으로 가하겠다는 본의와 상관없이 그녀의 선택은 그걸 관철할 수 있는 구조물을 먼저 짓지 않았다. 민심을 대표할 상황도 아니었다. 동력 자체를 스스로 상실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퇴진대상과 통고나 압박 또는 최후통첩이 아닌, 회담을 거론했으니 민심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을 미리 밝혔다면 사태는 그렇게 급류를 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추미애의 최순실"

긴급회담 철회 소식이 나오고 나서 박지원은 환영의사를 밝혔고, 야권공조 복원의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국정농단의 주체인 박근혜와 제1야당 대표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판했고, 그 비판의 연장선에서 그는 "추미애의 최순실"이라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이 말의 뜻을 모를 사람은 없다. 첫째, 추미애는 자기 판단능력이 없다, 그래서 누군가의 꼭두각시수준이다, 둘째, 민주당의 당정을 개인적 인연을 고리해서 농단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셋째, 추미애의 최순실은 정체를 숨긴 채 민주당의 정책을 모두 뒤에서 좌지우지하고 있다. 아니라면 그의 비유는 틀린 것이 된다.

야권공조를 외면한 채 단독결정으로 박근혜와의 독대를 추진한 추미애에 대해 박지원이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야권공조의 상대당 대표를 이런 식으로 모멸한 것은 정당한 것이었을까? 야권 공조 복원에 대한 의지가 없거나 상대당 대표를 바꾸라는 요구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하긴 어렵다. 따라서 박지원은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최순실은 오늘날 이 나라에서 모든 악의 대명사가 된 상태다.

따라서 추미애가 바로 그런 종류의 악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이야기라는 것 외에 달리 해석될 수 없는 발언이지 않은가. 단지 추미애가 따로 의논하는 사람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 했다면, 이런 비유는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비유가 적절했다고 여기면 박지원은 이와 같은 해석이 틀리지 않다고 말해야 하며, 아니라면 발언을 수정하거나 사과해야 옳다. 야권공조의 원활한 복원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추미애는 이미 시민사회와 다른 야당에게 사과를 표했다는 점에서 박지원도 자신의 발언에 상응하는 조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깔끔한 처리가 필요하다.

더군다나 "추미애의 최순실"은 비선논란까지 확대되면서 일파만파를 불러왔다. 박근혜와 추미애 사이에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긴급회담을 제안, 기획, 실현했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적시하지 않으면서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식은 정확히 말하자면 비열한 방식이다. 혐의의 대상은 불특정되어 있기에 추측성 논란이 증폭되기 마련이고 민심은 그 명단을 추적하게 되어 있다. 자칫 엉뚱한 사람이 마녀사냥 당하는 격이다.

박지원은 이런 사태를 방관하고 즐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추미애의 최순실" 비선논란은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추측성인 동시에 상대당 교란용에 특정인물에 대한 저격용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황이 된다. 민주당의 입지를 축소시키고 자신이 퇴진운동 국면을 독점적으로 주도하려는 욕망의 결과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이건 제대로 된 정치가 아니다.

"추미애의 최순실" 그리고 비선논란은 야권공조에 절실하게 필요한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명쾌하게 짚고 나가야 할 대목이다. 박지원의 발언대로라면, 자기 판단 능력도 없는 제1야당 대표와 야권공조를 해서 뭣하겠는가. 게다가 비선에 휘둘리는 대표와 박지원은 앞으로 어떻게 야권공조를 하려고 하는 걸까? "잘못을 바로 잡으면 실수가 아니다." 박지원 자신의 말이다.

비단옷을 입은 눈뜬 장님

지금 야당이 할 일은 무엇인가? 민심과 철석같이 결합하고 야권 전체의 결속된 역량으로 박근혜의 퇴진을 강제화하는 동시에 이후의 경로를 확정, 관철해나가는 일이다. 박지원의 정치가 지도자의 품격이 아니라 재주를 부리는 정치라면 기성 정치권에 대한 민심의 환멸은 더해질 것이다. 부디 아니기를 바란다.

비단옷을 입고 가는 장님과 밤중에 비단옷을 걸치고 가는 이가 있다. 장님은 자신의 비단옷을 모르고, 다른 이는 밤중이라 사람들은 그가 비단옷을 입고 있는 줄을 모른다. 이 둘 중 누가 나은가? 연암 박지원이 낸 숙제이다. 풀기 어려운가?

지난 주말 100만 민심은 시민혁명의 비단옷을 정치권에게도 입혀주었다. 이만큼 일을 저질러놓았으니 잘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눈뜨고 장님 노릇하던 정치권은 자기가 무엇을 입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더니 이제는 아예 컴컴한 밤중에 그걸 입고 헤매고 있다.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비단옷이 여기 걸려 찢기고 저기 걸려 나풀거린다. 이러다가 다 헤지고 남루해질 판이다. 아직은 밤중이라 잘 모를 거라고 여기지 말라. 곧 동이 튼다. 누가 비단옷을 그렇게 망쳐놓았는지 세상이 다 알게 될 것이다. 그 비단옷 하나 짜는데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는지 아는가?

제발 정신 차려야 한다. 정치권은 민심을 거스르지 않게 말조심 할 일이다. 좋은 정치는 좋은 말에서 태어난다. 지금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칫 살얼음이지 않는가? 박근혜는 버티기로 들어갔고, 새누리당은 새로운 지도부가 등장하려는 판이다. 이때까지 있는 대로 죄를 저질러 놓고 이제는 다 제 살길 찾으려고 온갖 일을 벌이고 있다. 이들 모두를 똑바로 심판해야 한다.

시민혁명은 겨우 초입이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거칠 것 없는 진격의 자세를 취할 일이다. 민심을 견고하게 떠받치는 비상시국회의의 힘찬 가동이 한시라도 늦춰져서는 안 된다.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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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미국 진보사학의 메카인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동화독법>, <잡설>, <보이지 않는 식민지> 등 다수의 책을 쓰고 번역 했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국제·사회 이슈에 대한 연재를 꾸준히 진행해 온 프레시안 대표 필자 중 하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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