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그리 화이트'의 선택, 한반도엔 '빅딜' 기회

[한반도 브리핑 ] 트럼프의 미국, '아시아 재균형' 철수하나

화가 난 미국 백인들(angry white)이 트럼프를 미국 45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사실 트럼프가 했던 여성 비하나 인종 차별은 미국 독립 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All men are created equal)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당시에는 평등의 정신이 충분히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 여성이나 흑인, 노예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조소에 시달리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칭해지는 조지 워싱턴도 독립선언 이후에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미국의 가치를 부정하는 트럼프

하지만 독립 선언 이후에도 미국은 끊임없이 평등의 정신을 강조해왔다. 미국 역사에서 불멸의 연설로 남는 연설에도 이 구절이 포함되었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1865)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어요'(1965)에서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를 강조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오바마를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만들어 준 것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존 케리에 대한 지지 연설이었다. 오바마는 이 연설에서 다시 한 번 이 문구를 인용하였다. 미국 독립선언에서 밝힌 평등의 정신은 미국 건국 이후 세기를 초월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평등을 실현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이를 공개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말로서라도 끊임없이 이 정신을 강조해온 것이 미국의 역사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를 노골적으로 부정했다. 트럼프 당선으로 이런 멋진 구절을 미국의 가치로 내세울 수도 없게 되었다. 미국의 백인들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트럼프의 미국 독립정신 부정에 동조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런데 이른 바 '화가 난 백인'들은 그들의 선택이 이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을 아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화난 백인들이 독립선언에서 말하는 평등의 정신을 기억할 리 없다. 그들은 불안, 불만, 불신이라는 '3불 정치'에 따라서 트럼프를 선택했을 뿐이다.

▲ 도널드 트럼프 제45대 대통령 당선인이 9일(현지 시각) 오전 미국 뉴욕시 힐튼 미드타운 선거본부에서 당선 소감을 밝히고 있다. ⓒAP=연합뉴스

백인들의 불안, 불만, 불신

대서양과 태평양을 낀 미국 동부와 서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정보통신 산업과 선진 기술에 따른 첨단 산업이 발전해왔다. 그 사이에 미국 내륙 지역의 제조업은 쇠락했다. 미국 백인들이 불안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미국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마이클 무어는 이미 이를 간파하고 트럼프의 승리를 오래전부터 예측해왔다.

마이클 무어는 <허핑턴 포스트>에 트럼프가 승리할 5가지 이유를 기고했다. 그가 첫 번째 이유로 꼽은 것이 미국의 사양화된 공업지대인 '러스트 벨트'(rust belt)였다. 러스트 벨트는 미국 제조업 지대로서 1차 대전 이후부터 미국의 번영을 구가하게 했던 중심 지역이었다. 하지만 제조업의 쇠락으로 그들의 번영은 과거의 추억이 되었다. 공장은 멈추고 기계는 녹이 슬었다.

마이클 무어는 이 러스트 벨트가 미국판 '브렉시트'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마이클 무어는 트럼프가 5대호 주변의 민주당 지지 주 네 곳인 미시간,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만 이기면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 대선 개표결과 트럼프는 이 네 곳에서 모두 이겼다.

미국 인구 구성을 볼 때 백인이 60%가 넘는다. 이 가운데 고졸 이하의 학력자는 전체 미국 인구의 50%를 차지한다. 고졸 이하의 미국 백인들은 제조업의 쇠퇴 때문에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경제적 불안 상황에 놓여 있었다.

뿐만 아니다. 이들의 불안은 제조업의 쇠퇴에 그치지 않았다. 백인들은 경기 침체 결과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어온 히스패닉들을 3D 업종의 종사자로, 즉 미국 내 수직적 일자리 분업 구조에서 하위 구조를 담당하고 있는 계층으로 여기지 않았다. 또 테러와 전쟁의 결과 미국도 더 이상 테러의 안전지대가 되지 않았다. 미국인들의 가장 큰 불안은 언제 발생할 줄 모르는 테러이다.

오바마 흑인 대통령 이후 여성이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컸다. 여성 대통령이 나오면 백인의 가치라고 생각해온 총기 소유나 낙태 규제에 대한 조치가 더욱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아가 소수자에 대한 우대 조치를 자신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불안이 불만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들의 불안과 불만은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포퓰리스트 트럼프와 미국의 양극단화

트럼프는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의 심리를 파고들었다. 무슬림과 히스패닉, 여성들을 폄하하는 발언을 절제 없이 쏟아냈다. 불안, 불만, 불신에 가득 찬 중부 내륙 지대의 백인 저소득층 유권자들은 트럼프를 말없이 지지했다. 트럼프의 저속한 성적 농담이나 심지어 탈세 혐의조차도 이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역사의 퇴색한 단면으로 보였을 뿐이다. 트럼프가 무슬림을 비하하는 것을 테러로부터 오는 불안을 해소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히스패닉과 이민자들에 대한 규제를 그들의 일자리 보호로 여겼다. 결국 그들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전세계 언론은 이들은 '화가 난 백인'으로 칭하게 되었다.

트럼프는 이들의 심리를 파고들기 위해서 쉬운 단어와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하는 화법을 사용했다. 트럼프가 한국에 방위비 분담 압력을 넣는 것이나, 주한미군 철수, 한국 핵 보유 용인 등의 발언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미국의 백인 저학력층들은 미국 군대가 한국방위를 위해 한국에 주둔하는데 한국이 충분한 방위비 분담도 하지 않는다는 투로 트럼프가 말하는 것에 솔깃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 동맹에 대해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고 한국 방어를 위한 미군 주둔인데도 한국이 비용을 지불하지 않다고 선동했던 것이다. 트럼프의 방위비 분담 압력은 한미 동맹을 비용이 들지 않는 동맹으로 재조정하기 위한 용도인 것이다. 트럼프가 포퓰리스트로 불리는 이유이고, 트럼프가 대선에서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

트럼트는 철저하게 실리 중심으로 외교 정책을 짤 것이다. 미국 외교의 시스템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미국 외교의 시스템에 트럼프의 색을 칠하여 할 것이다. 그것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화난 백인들을 지지층으로 계속 붙잡는 길이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당선은 브렉시트가 유럽연합에 균열을 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지 않아도 양극단화(polarized)되고 있는 미국의 균열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트럼프 당선 직후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미국 연방에서 분리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에 빗대서 캘리포니아의 탈퇴를 의미하는 '칼렉시트'라는 합성어까지 나오고 있다.

반대로 트럼프 지지자들 일부는 트럼프 당선 직후부터 미국을 90% 백인의 나라로 만들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민자들로 만들어진 미국에서 무슬림과 히스패닉과 이민자들은 백주 대낮에 그들로부터 위협을 당할 처지에 놓이기 시작한 것이다.

트럼프는 화합과 단결을 강조하겠지만, 그의 선거 전략은 철저하게 자기 편인 '집토끼'를 모으는 것이었다. 인구의 절대 다수인 백인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그들을 결집시키는 것을 최우선시했다. 그렇게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한 말초적인 정책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이념, 지역, 인종의 여러 측면에서 미국의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질 전망이다.

트럼프와 한반도

트럼프가 선거 과정에서 말했던 한국 핵 보유 용인이나 주한미군 철수를 실행하기는 힘들 것이다. 트럼프의 미래가 예측 불가능하지만, 한국의 핵 보유나 주한미군 철수는 실행 가능한 공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 보유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미국의 시스템이 트럼프의 이런 선거공약을 수정할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미국이 1990년부터 시도해왔던 주한미군 변경 계획을 추진할 수는 있다. 육군 중심의 주한미군을 경량화시키는 방향으로 재편하고, 한국 방위의 한국화와 주한미군의 보조적 역할로 주한미군의 위상을 다시 설정하는 것이다. 해공군을 강화하여 전략적 유연성에 따라서 신속배치군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의 증대는 주한미군의 위상과 역할 재설정에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한국은 트럼프 당선을 계기로 '한국방위의 한국화'를 추진해야 한다. 미국의 언제 어떻게 전략을 변화시키더라도 동맹의 기본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한국 방위를 자주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 미국 45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도널드 트럼프(왼쪽)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 ⓒ연합뉴스

트럼프 당선은 미국의 대북 정책에서도 예측 불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트럼프의 지지층들이 기존의 미국 정치 질서를 불신하더라도 이것이 미국의 대북 정책을 불신하는 데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트럼프의 지지자들도 북한 체제에 대한 불신은 다른 미국인들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또 지금까지 거론되고 있는 트럼프의 외교안보 관련 인사들의 면면은 대북강경파들에 가깝다. 이는 트럼프의 대북정책이 지금까지와 같은 강경책을 유지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트럼프가 북한과 실리외교를 통해서 북한 핵을 폐기시키고 미국인들의 소득을 증대시킬 수 있는 '빅 딜'을 할 경우,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이념이 아닌 '3불 정치'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지층의 성격 때문에 트럼프의 대북정책에는 유연성이 증대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경경책과 파격적인 관계 개선 등 모든 것을 추진할 수 있는 개연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트럼프와 동북아

세계에 충격을 준 미국발 11월의 쇼크는 동아시아 질서에서도 반영될 것이다. 중국은 트럼프의 통상 압력에도 불구하고 오바마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점을 중시 여기고 있다. 러시아는 푸틴과 트럼프의 친숙한 관계가 푸틴의 동아시아 진출 구상에 긍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할 것이다. 푸틴은 트럼프와 협력해서 러시아가 철도, 가스 등을 매개로 동북아에 진출하고 여기에 미국의 참여도 보장할 수 있다. 이는 러시아의 숙원이 이뤄지는 셈이다.

북한은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를 기대하면서도 핵과 미사일 능력 과시를 통해서 미국이 인내하는 임계점을 넘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일본은 전통적 미일 동맹과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협상에 미칠 영향을 주시하면서도, 트럼프와 소통이 잘되는 푸틴의 12월 방일이 동아시아 정세에 미칠 영향에 대해 분주히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주목할만한 것은 트럼프 등장, 전통적 미일 동맹의 변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향상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동할 상황이다. 전통적인 미일 동맹에 대한 트럼프의 관심이 느슨해진다면 일본은 러시아와 중국과 관계 개선에 속도를 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트럼프가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한다는 의미이다. 트럼프는 북한 핵과 미사일을 중국에 '아웃소싱'할 것이므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일 동맹의 효용은 그만큼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서도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에서 벗어나게 된다. 트럼프의 대북정책에서 빅딜의 공간을 만드는 정지작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시기에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위한 한국 외교안보의 컨트롤 타워를 굳건히 다시 새로 세우는 것이 우리의 핵심적인 대응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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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은 고려대학교, 경남대 북한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평화연구소, 한국사회연구소에서 학술 및 연구 활동을 벌였고 1998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정책실장을 지냈습니다. 2003년부터 청와대 NSC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에서 근무했습니다. 현재 (사)한반도 평화포럼 기획운영위원, 코리아연구원 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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