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창조' 경제나 미래'창조'과학부라는 이름에 많이들 수군거렸다. '창조론'을 연상시킨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로 알려 졌고, 불교신도들에게도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기독교의 그것이라는 의심을 제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물론 "도대체 창조 경제가 뭐냐?"는 의문은 오랫동안(어쩌면 지금까지) 가시질 않았다. 취임식 때 오방낭 주머니가 주렁주렁 나무에 걸리고, 보기 부담스러운 새빨간 한복을 입고 등장했을 때도 조금은 이상했다. 그 이후로도 대통령이 쓰는 말, 입는 옷, 벌이는 일들이 가끔은 기괴한 게 사실이었지만 주술적인 것이라 여기기엔 우리는 이미 너무나 '근대인'이었다. '십상시'나 '비선 실세' 정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이제 더 이상 '설마'라는 말은 쓸 수 없다. '최태민'이니 '영세교'니, '신정 정치'니 '사교 집단', '신돈'과 '라스푸틴' 등의 말이 현실 정치의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날마다 등장하고, 현 상황을 보도하는 외신 기사에서조차 빠지지 않는다. 67년 만에 이뤄진 태극 무늬 정부 문양으로의 교체조차 차은택 등이 주도했다는 사실이 언론 취재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이를 두고도 '예산 낭비'니 '이권 개입' 정도로만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청색, 홍색, 원형을 숭배하는 이들이 갖다 붙인 부적이 아닌가라는 의혹은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논리적이다(교체 않기로 했던 국가정보원 문양은 '미르=용'으로 어느새 바뀌었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의심과 의혹처럼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가 무속적이고, 주술적인 것이라면 정말 '경천동지'할 일이다. 1876년이 아니라, 1976년이 아니라 2016년의 대한민국이 '무속(巫俗) 권력'에 의해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무당이라니, 주술이라니, 최태민이라니, 라스푸틴이라니. 이 황당한 얘기들이 사실이라면 최순실을 사법 처리하는 걸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의 하야나 퇴진, 탄핵을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비선 실세에 의한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만 표출하는 게 아니다. 지지율의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이 이미 국정 운영 능력 자체를 상실했고, 무속의 언어와 주술의 관계가 사실이라면 앞으로의 국정 운영은 사실상 불가하다는 인식까지 담긴 주장이다. '세속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최순실이라는 '무속 권력'에 의해 조종되었다면 충격과 경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왜 최순실에게? 최순실이 어떻게 박근혜 대통령에게?"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면 '무속과 주술' 이외의 이유로 설명하기가 오히려 어렵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주술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합리화 과정이 '근대'의 특징이라 했다. 지금 상황만 본다면 한국 사회는 '독재 시대'도 아닌, '전근대'까지 정말 멀리 후퇴했다.
그러나 '무속 권력'의 실제 작동은 오히려 지독히 세속적으로 이뤄졌다. 그건 최순실과 정유라만의 얘기가 아니다. 차은택과 고영태만의 얘기가 아니다. 정윤회와 '문고리 3인방'만의 얘기가 아니다. 우병우와 안종범 등 청와대 수석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받아) 적자' 생존 능력만 뛰어난 황교안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최순실 방어를 위해 '7일간의 단식'을 불사했던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그리고 새누리당 의원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우병우 수석의 지휘를 받으며 '수사쇼'를 벌이고 있다고 의심받는 검찰만의 얘기가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예산과 사업을 '하라니까 했다'는 문화부나 기획재정부 관료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뒤늦게 지금에 와서야 '취재'와 '질문'에 열을 올리는 기자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옳지 않은 일에 눈 감았고, 말도 안 되는 일에 입 닫았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은 대통령만이 아니라 이들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 모두가 '무속 권력'의 공모자였고, 협조자였다(물론 언급되지 않은 이들이 훨씬 많다).
2016년의 대한민국은 '무속'과 '세속' 권력의 공모와 협잡으로 무너지고 있다. 최순실은 주술적 요사스러움으로 대통령의 마음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세속적인 욕망의 덩어리였음도 밝혀졌다. 그리고 그 욕망은 세속의 '다른 최순실들'이 함께 했기에 실현될 수 있었다. 온갖 대의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자리,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서로 다투고, 때로 침묵했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당에서는 이번 사태를 '최순실 게이트'가 아니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 부르며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을 물으려 하고 있다. 당연하다. 하지만 '무속 권력'에 휘둘린 대통령의 어리석음과 무책임함에 대한 공세만으로 부족하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나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문고리 3인방' 등 '적극적 부역자'의 존재는 더 큰 문제다. 하지만 그들만으론,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최순실 국정 논단에 직간접적으로 동참했던 '수많은 최순실들'은 자기가 피해자라고 말하거나 실제로 그렇게 믿는 듯하다(어쩌면 박근혜 대통령만 자신을 피해자라고 아직 생각 않을 수 있다). 과연 그럴까? 그저 몰랐다고 하면, 알면서도 당했다면 문제가 없을까? 그럴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군국 지배자의 정신 형태>에서 남경과 마닐라 학살 사건에 연루된 무토오 아키라의 사례를 인용하며 일본 파시즘을 '무책임의 원칙'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했다. 그는 천황에서부터 일반 사병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했던 일본 사회 구조에 대해 신랄히 비판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던 아이히만의 죄를 '악마적 성격'이 아니라고 했다. 규칙을 따르기만 한다면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생각하지 않은 죄', 즉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 '사고력의 결여'가 평범했던 아이히만의 죄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이 천황의 전쟁 책임, 나치의 학살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하게 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실제로 전후 일본의 '1억 총참회론'은 식민지배와 반인륜적 범죄 행위에 대한 천황과 일본 지배층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것이었다). 이번 사건에 대해 "모두가 세속적 권력에 탐닉한 탓"이라는 모호한 성찰과 어설픈 반성으로 마무리 하는 건 위험하다. '무속 권력'이 대통령과 국정, 국민을 농락한 사건 정도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말 철저하고 더욱 광범위하게 파헤쳐야 한다. '무속 권력'과 공모해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것이 왜 나쁜 일인지 집요하게 묻고,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시켜서 한 일"까지도 역사적 범죄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런 책임감도,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무속 권력'의 세속적 공모자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결국 30일 새로운 민정수석에 최재경 전 중수부장이 임명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의 손을 들어 준 게 아니라 MB에게 손을 내민 것으로 보인다. '무속 권력'이 잠시 비운 자리를 또 다른 '세속 권력'이 그렇게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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